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2021 가을. 1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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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부 후반기 대북정책과 통일운동

통일운동의 대전환과 민간교류, 무엇을 남겼나

임필수 | 정책교육실장
남북한의 통일정책과 통일운동, 역사와 평가
① 한국전쟁 이후 냉전기의 통일정책과 통일운동: 1960~1987 [2019년 여름]
② 노태우정부 전반기, NL·PD 논쟁의 태동 [2019년 가을]
③ 한소 수교와 남북기본합의서, NL·PD 논쟁의 격돌 [2019년 겨울]
④ 1990년대 한반도 정세와 통일운동 개괄 [2020년 봄]
⑤ 김영삼 정부 시기의 통일운동 [2020년 가을]
⑥ 김대중 정부 전반기 대북정책과 통일운동 [2021년 여름]

 

3. 6·15공동선언 이후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

 
2000년 초까지도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지 확실해 보이지 않았다. 1월 1일 김 대통령은 아사히 신문 인터뷰에서 임기 중에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리라 말했지만, 1월 5일 북한 주창준 중국대사는 남북정상회담의 개최 여부는 전적으로 김 대통령의 행동에 달려 있으며 한국이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국가정보원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3월 9~11일,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남북특사 1차 접촉이 비밀리에 싱가포르에서 열렸고 그후 중국 상해, 북경에서 비밀 접촉이 이어졌다. 4월 8일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남북합의서가 나왔고, 총선(4월 13일)을 앞둔 4월 10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그리하여 6월 13~15일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과 정상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1) 6·15 남북공동선언: 국가연합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채택한 6·15 남북공동선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이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6·15 공동선언에서 3항과 4항, 즉 이산가족 문제나 경제협력, 사회문화교류 문제는 이미 여러 방식으로 실행되고 있는 바를 재확인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그리 새로울 게 없었다. 오히려 2항, 남측의 국가연합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공통성’이 있다는 항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내용을 담고 있었고, 따라서 그 의미가 무엇이냐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쏟아져 나왔다. 

먼저 국가연합과 연방제의 차이를 분명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국가연합은 그 연합을 구성하는 각 국가가 주권을 보유하며, 따라서 국제법인격은 국가연합이 아니라 그 구성국이다. 국가연합의 결합 근거는 조약(국제법)이다. 주민통치권, 과세권, 군사권, 통화발행권과 같은 대내적 통치권이나 외교·국방 대외적 통치권도 각 구성국이 보유한다. 반면 연방국가에서는 지방자치정부(미국의 예를 들면 주정부)가 아니라 중앙 연방정부가 주권을 보유하며, 따라서 국제법인격은 중앙 연방정부다. 국가의 결합 근거는 연방헌법(국내법)이다. 연방정부가 대외적 통치권을 보유하고, 대내적 통치권 중 군사권과 통화발행권도 연방정부가 보유한다. 대내적 통치권 중 주민통치권과 과세권의 일부를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배분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국가연합의 사례는 무엇인가? 많은 논자가 국가연합이었다가 연방으로 나아간 사례로 1789년의 미국, 1848년의 스위스, 1866년의 독일을 꼽는다. 그렇지만 국가연합이 통일국가로 나아가는 데 실패한 사례로 1958년 이집트-시리아-예멘의 ‘통일아랍공화국’도 존재한다. 필자가 보기에 현재 국가연합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영연방(the Commonwealth)인데, 영국 본국과 함께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52개의 국가로 구성되었고, 사실상 느슨한 ‘국제기구’ 성격에 가깝다. 다만 연방의 상징적인 수장이 존재하고(현재는 엘리자베스 2세), 국기와 국가(國歌)가 존재하며, 연방 내 특혜관세를 통한 일종의 경제동맹(관세동맹)의 기능을 수행했다. 즉 현실에서 국가연합이란 주권국가 간 상징적 연합(수장, 국가, 국기)이거나 경제동맹(관세동맹)을 뜻한다. 

따라서 국가연합과 연방국가는 질적으로 심대한 차이가 존재하므로, 국가연합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 간에 공통점이 있다는 말에는 다시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를 파악하려면 북측이 밝힌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무엇인가 살펴보아야 한다. 

2000년 10월 6일,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20돌 기념 평양시 보고대회에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안경호 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의 통일을 달가워하지 않은 외세의 조종 밑에서 남조선 당국자들이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실정에서 수령님께서는 1991년 신년사에서 민족적 합의를 보다 쉽게 이루기 위하여 잠정적으로 연방공화국의 지역자치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며 한편으로는 중앙정부의 기능을 높여 나가는 방향에서 연방제 통일을 점차적으로 완성할 데 대한 방안도 천명하시었습니다. 이 방안이 결국 낮은 형태의 연방제안입니다.”
 김 주석의 1991년 신년사 이후, 1991년 4월 28일 북한 윤기복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심의위원장은 “잠정적으로 지역자치 정부에 더 많은 권한, 즉 외교권, 군사권 및 내정권 등을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한 1991년 9월 유엔총회에 참석한 강석주 외교부 부부장도 ‘고려민주연방제안을 수정할 용의가 있다’고 발언했다.

 이러한 발언을 종합해보면, 수정된 고려민주연방제안이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고, 그 핵심은 지역자치정부가 내정권뿐 아니라 외교권과 군사권을 보유한다는 것이다. 1980년 10월 10일 제안된 고려민주연방제안에서는 중앙행정부격인 ‘연방상설위원회’가 군통수권과 외교권을 보유하며, '민족연합군'을 통솔한다고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란 단순히 고려민주연방제안의 ‘수정’이라고 말할 수 없는 질적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오히려 연방제 창설의 실질적 포기라고 볼 수밖에 없다. 만약 지방자치정부가 외교권과 군사권을 보유한다면, 그것은 사실상 독립국가이며 이러한 조건에서 양 독립국가의 결합은 결코 연방국가일 수가 없고, 분명히도 국가연합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직접 제시한 고려민주연방제안을 결코 공식적으로는 폐기하지 않을 것이며, 국가연합이라는 용어를 결코 공식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것이지만 말이다. 6·15 공동선언 직후에 나온 이런 분석은 2008년에 나온 임동원의 『피스 메이커』에서도 확인된다. (개정증보판은 2015년 창비에서 나왔다.) 책은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완전통일은 10년 내지 20년은 걸릴 것이라고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완전통일까지는 앞으로 40년, 50년이 걸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말은 연방제로 즉각 통일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냉전시대에 하던 얘기입니다. 내가 말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건 남측이 주장하는 ‘연합제’처럼 군사권과 외교권은 남과 북의 두 정부가 각각 보유하고 점진적으로 통일을 추진하자는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연방제 통일방안을 실질적으로 포기하게 되었을까? 북한 김 주석의 신년사는 순전히 ‘외세의 조종을 받는 남조선 당국자들이 연방제를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북한의 방어적, 수세적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서독에 의한 동독의 흡수통일이나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연쇄적 해체를 목도하는 조건에서, 북한으로서는 한반도에서 2국가 체제를 보존하는 것이 사활적 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2)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의 확대, 북한의 외교적 고립 탈출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 경제협력, 사회문화교류는 계속 확대되었다. 6월 27~30일 1차 적십자회담은 이산가족방문단 교환과 비전향장기수 송환을 합의했다. 그에 따라 8월 15~18일 1차 이산가족방문단 상호교환이 이뤄졌고, 9월 2일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판문점을 거쳐 송환되었다. 7월 29~31일에는 1차 장관급회담도 열렸고, 8월 14일 남북연락사무소 업무가 재개되었다. 8월 8~10일에는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소 500마리와 함께 방북해, 김정일 총비서와 면담했고, 개성을 서해공단 부지로 선정하고 특별경제지구로 지정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9월 18일에는 경의선 기공식이 열렸고, 9월 25~28일 남북경제협력 1차 실무접촉에서는 식량차관 제공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었다. 북측에 외국산 쌀 30만 톤, 옥수수 20만 톤을 차관으로 제공하기로 했다. 그리고 10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또한 김대중 정부는 2000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3차 아시아유럽 정상회담(아셈) 3차회의를 앞두고 유럽연합에서 북한과 국교가 없는 국가를 대상으로 북한과 수교를 요청했다. 김대중 정부는 가능하다면 10월 아셈 정상회의 무렵에 수교방침을 확정해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영국은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독일은 사회민주당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이끌고 있었다. 영국, 독일, 스페인 총리가 서울 도착을 전후해 수교방침을 천명했고, 11월 중에는 영국, 독일, 스페인, 벨기에에서 외교관계설정 협상을 시작하는 서한을 보냈다. 

북한 역시 수교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예컨대, 독일은 수교의 조건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북한에서 활동하는 독일 외교관과 원조기관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할 것, 둘째, 원조기관이 원조사업의 진행상황을 직접 지켜볼 자유를 보장할 것, 셋째, 북한 내 독일 기자의 활동편의를 제공하고 원칙적으로 독일 기자의 입국을 허용할 것, 넷째, 인권, 지역안보, 군비축소, 대량살상 무기와 미사일 기술 비확산 문제를 망라한 군비관리 문제를 논의할 것. 놀랍게도 북한이 파격적으로 이런 요구를 모두 수용함으로써 독일과 북한의 수교는 빠른 속도로 타결되었다.

태영호는 북한이 기존 입장을 버리고 파격적 전제조건을 수용하면서 수교를 서두른 이유가 바로 미국에서 부시 행정부의 등장이 예고되는 상황에 있다고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 본인이 부시 행정부의 대북강경책이 정립되기 전에 유럽과 빨리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밀어붙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독일이 제시한 수교 조건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했을까? 태영호의 증언에 따르면, 2001년 5월 유럽연합을 대표해 북한을 방문한 스웨덴 페르손 총리가 김정일 위원장에게 “북한이 인권분야에서 국제공동체와 협력하는 것이 장기적인 견지에서 보면 오히려 득이 될 것”이라고 하자, 김정일 위원장은 “인권 대화에 쾌히 응하겠다”고 답변하면서도, 동시에 외무성에는 “유럽을 얼려(속여) 넘기는 대책을 연구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에 따라 외무성이 내놓은 대책은 △유럽연합과의 인권대화에서 양측의 인권 개념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예비접촉과 인권전문가 양성을 위한 교류를 주장하면서 시간을 지연시킨다, △외국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 법원, 감옥, 수인을 준비힌다, △인권공세가 격심해지면 핵실험과 같은 강경조치로 시선을 핵문제로 집중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유럽연합 국가도 결국 ‘선 핵, 후 인권’으로 돌아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든 아셈 회의 후 2000년 12월부터 2001년 3월까지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독일, 룩셈부르크, 그리스 순으로 북한과 수교했다.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스위스, 포르투갈은 1973~75년 시기에 북한과 수교했고, 이탈리아는 아셈 전인 2000년 1월에 북한과 국교를 맺었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사회주의권의 연쇄 붕괴, 한소·한중수교의 충격과 외교적 고립상태로부터 한 걸음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프랑스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이런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인권 문제와 핵개발 문제 때문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유럽연합 의장국이었는데,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데 북한과 수교하면 핵 억제가 더 어려워진다고 보았다. 지금까지 프랑스는 북한과의 미수교 정책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3) 2000년 북미 미사일회담의 불발과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무산

 
2000년 10월 9~12일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자 인민군 총정치국장 조명록 차수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였다. 10월 12일 발표된 공동코뮤니케에서 양국은 “미사일 이슈의 해소가 양국 관계의 근본적 개선에 핵심적으로 기여할 것이라는 데 합의했다”는 문구가 담겼을 뿐만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올브라이트 국무부 장관이 방북하여 클린턴 대통령의 관점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직접 전달하고, 미국 대통령의 방북이 있을 수 있는데 이를 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 국무장관의 방북에 이어 미 대통령의 방북이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은 곧 미사일회담의 타결이 임박했다는 신호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10월 23~25일 평양을 방문했는데, 그녀는 “특히 미사일 문제에서 중요한 진전을 이룩했다”고 밝혔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6년 4월에 개시된 북미 미사일회담이 약 5년만에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냐는 기대를 높였다. 또한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이 성사된다면 김정일 위원장과 상호 국가승인 협정을 맺을 것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그렇지만 2000년 11월 1~3일, 6차 미사일회담이 열렸지만, 최종적인 타결에 이르지 못했다.  당시 양국이 의견 접근을 본 것은 북한이 장거리미사일 개발을 중단하면 미국이 북한 인공위성을 대리 발사해 준다는 것이었다. 또한 미국이 요구한 ‘미사일 개발 중단을 검증할 수 있는 안전장치’에 관한 세부사항에 대해서도 일부 진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미국이 중시한 다른 쟁점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견 차이가 재확인되었다. 

이처럼 11월 초 미사일회담이 완전한 결실을 보지 못하자,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도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11월 2일, 29명의 한반도 전문가들을 국무부에 초청하여 대통령의 방북에 관한 의견을 수렴하였는데, 이때 27명이 반대하였다. 11월 4일 백악관은 퇴임 전 방북 가능성은 남아 있다고 말했으나, 협상의 불발로 사실상 실현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11월 7일 공화당의 부시 후보와 민주당의 고어 후보가 맞붙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플로리다주의 재검표 사태라는 사상 초유의 이슈가 불거지면서 혼란을 거듭하자 12월 28일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 내에 방북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 샌디 버거는 선거결과를 둔 분쟁이 지속되는 중에 백악관을 비우면 ‘헌정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며 방북을 만류했다고 알려졌다. 

2000년 말 시점에는 비록 6차 미사일회담이 최종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추가 회담을 통해서 머지않아 협의, 조정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보통 그 원인을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노선 탓으로 돌리지만, 과연 그렇게 인과관계가 단순한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4) 부시 행정부의 등장 


2001년 1월 20일 공화당의 부시 대통령이 취임했다. 그는 선거기간에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너무 유화적이라고 비판했고, 집권 이후 대북정책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부시 선거 캠프만이 아니라 공화당 전반이 공유했던 바다.

 첫째, 공화당은 제네바합의가 과거 핵 문제에 대한 진실 규명이 미흡했고, 따라서 이미 보유하고 있는 플루토늄으로 핵 개발을 강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나아가 북한의 핵 개발 동결의 대가로 미국이 경수로와 중유를 제공하기로 한 약속은 나쁜 행동에 물질적 보상을 주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 또한 미국이 제공하는 경수로를 통해 북한이 핵 물질을 추출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둘째, 공화당은 1998년 8월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실험과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을 계기로 제네바합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북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북한의 위협에 대비한 미국 본토 미사일방어망(NMD) 구축을 요구했다. (실제로 클린턴 행정부는 공화당의 요구를 수용해서 2005년까지 NMD를 구축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또한 금창리 지하시설 사찰의 대가로 식량을 제공하고,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에 대해 경제제재를 완화한 조치도 불량국가에 일방적 시혜를 제공하는 나쁜 선례다.   

그렇다면 공화당의 대안은 무엇이었는가? 페리 보고서에 준하여 공화당 계열의 인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대안으로는 1999년 2월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방차관보가 주도해서 작성한 아미티지 보고서가 있었다. 아미티지 보고서 역시 북한과 외교협상에서 미국의 요구에 북한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경우 경제제재의 완화, 세계은행을 비롯한 국제금융기구에 의한 한반도개발기금 창설과 같은 반대급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페리 보고서의 접촉정책(engagement policy)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아미티지 보고서의 특징은 북한이 이를 거부할 경우 북한 핵·미사일 시설에 대한 선제공격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당근과 채찍 중 더욱 강력한 ‘채찍’을 강조했다는 점에 있다. 또한 미국이 중시했던 핵·미사일 이외에 (휴전선 일대에 북한이 배치한) 재래식 전력의 감축도 협상 의제에 포함시키고자 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인식을 다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북미 제네바합의는 북한의 핵 위협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한반도와 동북아정세가 오히려 악화되었다. 둘째, 북한과 같은 국가를 상대하면서 물질적 보상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며, ‘벼랑끝 전술’이 결국 성공한다는 그릇된 믿음을 북한에 줄 수 있다. 셋째,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무조건적인 양보이며, 그에 상응하는 북한의 양보가 부족하다. 따라서 미국 정부가 북한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 즉 핵, 미사일, 재래식 전력의 위협이라는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넷째, 과거 미국 행정부는 핵 회담, 미사일 회담, 4자회담, 대북경제지원 회담 각각에 임할 때 종합적인 원칙 없이 임기응변 식으로 대응함으로써 긴장완화라는 성과를 거두는 데 실패했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부시 행정부는 투명성과 검증, 상호주의라는 세 가지 원칙을 내세우게 된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부시 행정부는 2002년 10월 2차 북핵 위기가 발생한 후 ‘포괄적이며, 검증가능하며, 비가역적인 핵 폐기’(CVID)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실제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단순히 승계하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확고히 밝혔고, 대북정책을 전면 재검토하면서, 이 기간 중 북한과의 대화를 중단했다. 북한은 이에 강력히 반발했는데, 2월 21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미국 행정부가 지금까지 양측 사이에 이뤄진 합의사항을 지키지 않는다면 미사일 문제와 제네바 기본합의문 이행에 매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부시 행정부 등장 초기에 김대중 정부의 대북 인식 차이도 드러났다. 예컨대, 아미티지 국무부장관 내정자는 1월 워싱턴을 방문한 한화갑 민주당 최고위원에게 “햇볕정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대중 정부가 남북관계에 정권의 운명을 걸고 있어 (햇볕정책이) 실패했을 때의 부담이 크다”고 말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 아미티지 내정자의 발언은 ‘햇볕정책은 북한에 너무 유화적이고 김정일 위원장에게 끌려가는 느낌이다’ ‘햇볕정책이라는 용어보다는 접촉정책 단어가 더 낫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었다. (미국의 ‘engagement policy’를 언론이 보통 사용하는 식대로 포용정책이라고 번역한다면 햇볕정책과 큰 뉘앙스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이를 접촉, 개입으로 번역한다면 상당한 뉘앙스 차이가 드러난다.)  

또한 2001년 3월에 개최된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부시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으며 북한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북한의 무기수출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고, 북한의 폐쇄성 때문에 합의 내용에 대한 투명성 확보가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며, 완전한 검증절차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부시 행정부는 2001년 6월 6일 대북정책 재검토의 종료와 북한과의 대화 재개를 선언했다. 그 의제로는 △제네바 기본합의 이행의 개선, △북한 미사일계획의 검증가능한 억제와 미사일 수출금지, △재래식 군사력 태세 문제가 제시되었다. 그러면서 6월 13일,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첫 북미 접촉이 이뤄졌다. 북한은 6월 18일 외무성 대변인 발언을 통해 대화재개 선언이 ‘유의할 만한 일’이지만, 미사일, 핵, 재래식무기를 협상의제로 제시한 것을 비난하며 경수로 건설 지연에 따른 전력손실 보상 문제가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수정 제의했다.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를 기다리고 있다”며, 협상을 위한 기세 싸움을 벌였다.  

그렇지만, 북미 대화가 본격화되기도 전에 9·11 테러 사태가 발생했다. 9·11 사건은 북미관계나 한반도 정세에도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는 이미 대북정책 재검토로 수개월의 시간을 보낸 데다가 9·11 테러 이후로는 ‘테러와의 전쟁’이 정부 최고의 관심사로 부상하면서 북한 문제는 실제 관심사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북한이 아주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구사하지 않는 ‘상냥한 무시’(benign neglect)가 작동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9·11 테러의 여파 속에서 북한을 포함한 ‘불량국가’에 대한 강경한 정책적 레토릭이 가해졌다. 


5) 부시 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과 ‘악의 축’ 


9·11 테러가 발생한 후, 11월 3일 북한 외무성은 테러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반테러 국제협약, 즉 ‘테러에 대한 재정지원을 억제하기 위한 국제협력’, ‘인질반대 국제협약’에 가입했다. 또한 2001년 하반기부터 북한은 유럽연합과 인권대화를 위한 접촉을 개시했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분위기에 맞춰가려는 듯한 태도를 보인 셈이다. 

그렇지만, 미국은 2002년 1월 의회에 제출하기 위한 『핵태세 검토보고서』를 완성했다. 이 보고서는 기밀문서였으나 3월에 유출되었다. 보고서는 핵타격 능력을 계획할 때 “당면한 위협, 잠재적 위협, 예상치 못한” 위협을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위협을 낳을 수 있는 국가로 북한, 이라크, 이란, 시리아, 리비아를 지목했다. “이 국가들은 미국과 오랫 동안 적대관계에 서있고, 테러리스트를 후원하거나 은닉하며, 활발한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또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시나리오로 대만을 둘러싼 중국과의 대치뿐만 아니라, 북한의 남한 공격, 이라크의 이스라엘 침략을 꼽았다. 
 

따라서 보고서의 내용은 제네바합의의 조항, 즉 “북한에 대해 핵무기로 위협을 가하거나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항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를 낳았다. 실제로 북한은 핵태세 보고서가 “북미 사이에 합의한 모든 문제들에 대한 난폭한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2002년 1월 29일 부시 대통령은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북한은 주민을 굶주리게 만들면서 미사일과 대량살상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정권”이며, “북한은 이란, 이라크와 함께 테러동맹국들과 더불어 세계평화를 위협하기 위해 무장을 하면서 악의 축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에 대해 북한은 “우리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다”고 강력히 비난했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 내에서의 정치적 레토릭과 달리, 2002년 2월 서울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자극적 표현을 자제하고,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 의사를 거듭 밝히기도 했다. 파월 국무장관은 ‘악의 축’ 발언이 있었지만 이들 국가와 마찰을 일으키려는 어떤 계획도 세워놓은 것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6) 2002년 미국의 대북특사와 2차 핵위기 


2002년 4월 미국은 교착상태에 빠진 북미대화를 재개하기 위해 대북특사를 북한에 보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렇지만, (2002년 한일월드컵이 진행되던 와중인) 2002년 6월 29일 서해에서 교전(제2 연평해전)이 발생하고 한국측 해군 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7월 1일 파월 국무장관이 특사방북을 ‘재검토’한다며 사실상 연기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그렇지만, 7월 25일 북한이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북한이 (제1 연평해전과 달리) ‘유감’을 표명하며 재발 방지 노력을 언급하고, 외무성이 미국 특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면서, 미국의 특사 방북이 재추진되었다.   

그래서 2002년 10월 4일 켈리 국무성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방북해 강석주 북한 외무성 1부상과 회담을 열었다. 미국의 특사 방북은 양국 간 교착상태를 타개할 계기가 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그런데 사태는 전혀 뜻밖의 방향으로 이어졌다. 

10월 17일, 국무부 대변인은 충격적인 내용을 발표했다. 켈리 방북단이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보유를 시사하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북한에 전했으며, 북한이 놀랍게도 이를 시인했다는 발표였다. 이에 대해 북한은 10월 25일 외무성 담화를 통해서 북한은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말해주었다”고 밝혔다. 

이 상황에 대해서는 지난 호에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생략한다. 다만 결론만 다시 짚어보면 실제로 이 시점에 북한이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실행 중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게 사실이라면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아무리 선의에 기반을 두었다고 하더라도 북한의 핵 개발 프로그램을 막지 못했다는 문제, 즉 햇볕정책의 지지자로서는 매우 곤욕스러운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켈리 특사의 증언이 워낙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10월 17일 김대중 대통령 역시 “어떤 경우에도 북한의 핵개발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에서 어떤 즉각적인 정책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10월 19일부터 진행된 8차 장관급회담에서 대화에 의한 핵문제 해결을 주장하면서도 철도·도로 연결, 개성공단 조성, 동해어장 공동이용과 같은 기존 의제를 계속 추진해나가겠다고 확인했다. 

반면, 미국은 12월부터 제네바합의에 따른 대북 중유제공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이때 당장 경수로 사업이 완전히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2003년 8월에 개최된 6자회담이 성과가 없자,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는 2003년 12월부터 1년간 경수로 사업을 일시중단한다고 밝히게 된다.) 또한 12월 10일 스페인 해군이 북한 화물선 소산호를 인도양 공해에서 나포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미국은 남포항에서부터 이 배를 위성으로 추적했고, 미 해군이 수색한 결과 15기의 스커드 미사일을 발견했다. 그러면서도 12월 31일, 부시 대통령은 북핵 문제를 ‘외교적’ 방법으로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제 북핵 문제는 한국 정권이 바뀐 후, 2003년부터 시작된 6자회담 테이블로 넘어가게 되었다.   


7) 2002년 9월 북일 평양선언 


한편 미국 특사의 방문 전 시점인 9월 17일 일본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이 있었고, 국교수립 협상의 재개를 선언하는 ‘평양선언’이 발표되었다. 2002년 평양선언이 나오기 전까지 국교수립을 둘러싼 양국 간 쟁점은 전혀 해소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즉 1950~60년대 한국과 일본의 국교협상 과정에 등장한 쟁점과 거의 동일하다. 

즉 북한은 한일병합조약이 일본의 강요에 의해 체결되었으며, 따라서 법적 구속력이 있는 공식문서에서 사죄를 명기해야 하며, 정신적, 물질적, 인적 피해에 대한 보상은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반면 일본은 한일합병조약이 합법적으로 체결되었으며, 과거 북일관계는 교전관계가 아니었으므로 배상이나 보상에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1995년 무라야마 총리의 담화가 사죄 문제에 관한 기본입장이며 이를 북한에 표명할 수 있으며, 한일관계에 적용했던 재산청구권 형태의 (즉 경제협력방식의) 처리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평양선언에서 북한은 놀라운 태도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 측은 과거 식민지지배로 인하여 조선인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준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통절한 반성과 마음속으로부터의 사죄의 뜻을 표명하였다. 

쌍방은 일본 측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 대하여 국교정상화 후 쌍방이 적절하다고 간주하는 기간에 걸쳐 무상자금협력, 저이자 장기차관 제공 및 국제기구를 통한 인도주의적 지원 등의 경제협력을 실시하며 또한 민간 경제활동을 지원하는 견지에서 일본국제협력은행 등에 의한 융자, 신용대부 등이 실시되는 것이 이 선언의 정신에 부합된다는 기본인식 밑에 국교정상화회담에서 경제협력의 구체적인 규모와 내용을 성실히 협의하기로 하였다.
쌍방은 국교정상화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발생한 이유에 기초한 두 나라 및 두 나라 인민의 모든 재산 및 청구권을 호상 포기하는 기본원칙에 따라 국교정상화회담에서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협의하기로 하였다.

또한 일본 국민의 생명 및 안전과 관련된 현안문제에 대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은 조일 두 나라의 비정상적인 관계 속에서 발생한 이러한 유감스러운 문제가 앞으로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확인하였다.

즉 북한이 기존 입장을 완전히 변경하여, 국가·민간청구권의 상호포기와 경제협력이라는 한국과 동일한 방식의 국교정상화 방식이 합의된 것이었다. 게다가 북한은 ‘일본 국민의 생명 및 안전과 관련된 현안문제’라는 표현으로 일본이 강력히 제기한 일본인 납치문제를 인정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특수기관 일부의 망동주의자가 영웅주의로 달려 이런 일을 했다”며 “일본어를 학습하고, 그 신분을 이용해 한국에 잠입하기 위해서였다”고 해명했다. 또한 평양선언이 발표된 날, 북한 외무성은 확인된 생존자는 본인이 희망할 경우 귀국, 또는 고향방문이 실현될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다. 

북한은 왜 이 시점에 이렇게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보였을까? 이는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기류에서 벗어나 일본 쪽에서 활로를 찾으려는 전략적 의도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태영호는 북한이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는 것이 목적”이었고, “이를 통해 경제적 난관을 해결하고 미국의 대조선 압박공세를 완화시키려고 했다”고 풀이했다. 

즉 1990년대 이후, 북한은 남한이 대북 강경기류를 보이면 미국과의 대화 흐름을 조성하려 했다. 또한 미국에서 강경기류 조짐이 나타나면, 한국과 정부 간 회담을 열거나 유럽연합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넓히거나 일본과 대화통로를 여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렇다면, 당시 일본과 국교정상화가 이뤄지면 북한이 대략 어느 정도의 ‘경제협력’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1965년 한일국교 수립 과정에서 합의된 액수가 5억 달러(무상 3억, 유상 2억 달러)였는데, 이를 준거로 해서 엔화의 가치변화, 남한과 북한의 인구비율, 한국과 국교정상화를 한지 40년의 세월이 지났다는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추산에 따르면, 50억~100억 달러라는 수치가 나왔다. 50억 달러라고 하면 현재 한국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큰 액수라고 말할 수 없지만, 북한의 관점에서 보면 2001년 북한 GDP의 32%에 달한다. 1965년 5억 달러는 당시 한국 GDP의 14%였기 때문에 북한 경제에 더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는 금액이었다. 한편 태영호는 당시 북한이 적어도 100억 달러가 들어올 것이라고 기대했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이때 북한이 일본에 넘겨준 ‘납치 사망자’ 요코다 메구미의 유골이 본인 것이 아니라는 판정이 나오면서 일본 내 여론이 크게 요동쳤다. 태영호의 증언에 따르면 메구미는 정신질환으로 49호 병원에서 사망했는데, 당시에는 사망자가 발생하면 병원 뒷산에 장례도 없이 매장했다. 북일회담으로 당에서 메구미의 유골을 찾으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병원 관계자의 기억에 의지에 사체를 매장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뒤져 유골 한 구를 발굴해 일본에 보내게 된 것이었다. 즉 의도적으로 가짜를 보내려 한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일본을 기만하는 행동을 한 셈이 되었다. (북한은 디엔에이(DNA) 검사장비가 없었다.) 

이 뿐만 아니라 당시 북한이 일본 조사단에 제공한 사망자 8명, 행방불명자 2명의 정보 전반에 대해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는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그리고 북한은 납치 생존자의 해외여행을 허락한다는 명목으로 5명이 2주간 일본에 귀국하도록 허용했는데, 이들이 북한에서 겪은 일을 증언하자 오히려 북한에 대한 여론이 극히 악화되었다. 그에 따라 일본 정부는 납치 문제의 해결 없이 국교정상화가 불가하다는 입장을 제시하게 되었으며, 북한은 이미 해결된 일이며 재조사가 이뤄지려면 양국 간 신뢰관계가 구축되어야 한다며 다시금 강력히 대립하게 되었다. 게다가 북한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이슈까지 덧붙여지면서 국교수립 문제는 다시금 가시권 밖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8) 대북송금 이슈 


한편 김대중 정부 마지막 해인 2002년에 대북송금 문제도 불거졌다. 그 계기는 2002년 3월 25일 미국 의회조사국 래리 닉쉬의 「한미관계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는 현대가 공식 지불금 4억 달러 외에 비밀리에 4억 달러 웃돈을 주었고 이 돈이 군사비로 전용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를 《월간 조선》 5월호가 인용하면서 국내에 알려졌다. 의혹이 증폭되는 가운데, 9월 25일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이 국정감사에 현대그룹의 4억 달러 극비지원 의혹을 제기하고, 김문수 의원이 국가정보원의 개입 의혹을 제기했다. 감사원은 2002년 10월 산업은행에 대한 특별감사를 착수했다. 2003년 1월 말 감사원은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4000억 원 가운데 1760억 원은 현대 측의 운영자금으로 사용됐고 사용처가 규명되지 않았던 2240억 원을 정상회담 직전에 북한에 보낸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의 자료를 제출했다.

2003년 2월 3일 검찰은 “현재 정치권에서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이 진행중이므로 검찰수사를 유보한다”고 밝혔고 2월 14일 김대중 대통령은 대국민성명을 통해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해명이 미흡했다는 근거로 2월 26일 단독으로 특검법을 통과시켰고, 새로 취임한 노무현 대통령은 3월 14일 특검법을 국회 원안대로 공포했다. 

6월 25일 특검의 수사결과는 이랬다. “박지원 전 장관은 2000년 3월 현대와 함께 북한과 협상을 벌인 결과 4월 8일 현대그룹이 대북 경제협력사업권을 획득하는 대가로 4억 달러(현금 3억 5천만 달러와 평양체육관 건립 등 현물지원 5천만 달러)를 지급하고 정부도 정상회담 대가로 현금 1억 달러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1억 달러 마련에 어려움을 느낀 정부가 현대 측에 1억 달러를 대신 지급해 줄 것을 요청함에 따라 결국 현대상선이 2억 달러, 현대건설이 1억 5천만 달러, 현대전자가 1억 달러를 분담해 대북송금자금 4억 5천만 달러를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박지원·이기호씨 등은 산업은행에 외압을 행사, 현대상선이 4천억 원을 대출받도록 했으며 국정원은 2000년 6월 9일 현대상선 대출금 중 2천 2백 35억 원을 2억 달러로 환전해 북한에 송금했다.” 또한 “4억 5천만 달러가 정상회담 전에 모두 송금됐고 송금과정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며 국민의 이해를 구하지 않고 비밀리에 송금함으로써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않았던 관계로 정상회담과의 연관성을 부인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고도 지적했다. 
 

특검은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임동원 전 국정원장, 이기호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이근영 전 산업은행 총재,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 등 8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그러나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이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전달했다는 150억 원의 실체를 밝히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이 의혹은 검찰로 넘어겄으나, 정 회장은 150억 원의 비자금 조성에 관한 압박을 이겨 내지 못하고 그해 8월 4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엄청난 사건이 남긴 교훈은 무엇인가? 국내적으로 보면 정책결정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기본적 절차를 완전히 무시했는데, 이는 결국 언제가 세상 밖으로 드러날 문제였다. 당시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현대에 대한 특별지원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기호 경제수석은 남북경제협력기금으로 할 것을 제안했으나 박지원 통일부 장관과 임동원 국정원장은 그럴 경우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며 반대해 산업은행 대출을 추진하게 되었다. 만약 정말로 ‘국익’을 위해 대북송금이 불가피하다면 국민들에게 설명하든가, 최소한 국회에서 동의를 구했어야 했다. 대북송금의 정당성을 논하는 한 논문은 “외교 문제에서 불가피하게 비밀유지를 필요로 하는 경우, 이를 국회에 보고하고, 국회가 각 사안의 중요성 정도에 따라 국회가 공개의 범위, 공개 시점을 결정하는 방안”을 향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2002년 의혹이 제기된 후 청와대는 “터무니없는 얘기”라는 발언으로 발뺌했고, 한광옥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내 양심과 인격을 걸고 그런 사실이 없다, 내 말이 거짓이라면 정치를 하지 않겠다”며 모든 사실을 부인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낳을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거짓말은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불신을 더 크게 부채질하는 효과만 낳았다. 

다른 한편, 대북송금이 남북관계에 미치는 후과도 검토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정부는 [대북송금이] 평화와 국가이익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실정법상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용했다”고 말했지만, 긍정적인 효과만 있었을까.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한 인도주의적 정신에 입각한” 송금이라고 하든, “남북정상회담 대가”라고 표현하든 간에, 이런 방식의 정상회담 개최 합의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남북관계를 비정상적인 관계로 왜곡시키는 효과를 발휘하지 않았겠는가. 이런 면에서도 보더라도 비밀접촉과 상호주의의 폐기는 남북관계에 부정적 후과를 남기게 되었다.   
 

4. 6·15공동선언 이후 통일운동  

 
지난 호에서는 6·15 공동선언 이전까지 점점 더 악화일로를 걷던 통일운동 내 갈등 상황을 다루었다. 1998~1999년 북한은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을 강력히 비난했고, 이는 남한의 주류 NL 통일운동이 김대중 정부에 대해 적대적 기조를 취하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통일운동은 과거 민족회의와 민주당 출신 인사가 주도하는 민족화해협력범국민위원회(민화협), 민주노총과 전국연합이 주도하는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자통협), 기존의 범민련-범청학련으로 분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운동체 간 갈등과 경쟁은 해소될 기미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을 계기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남북 최고지도자가 합의한 6·15선언은 통일운동을 하는 모든 세력과 집단에게 강령적 차원에서 6·15합의 수준을 넘지 않고, 위상 및 활동과 관련해 합법적이고 대중적으로 할 것을 제시해준 일종의 통일운동의 '가이드 라인'으로 이해할 수 있다... 6·15선언으로 인해 생긴 가장 큰 변화는 과거와 같이 통일운동세력과 정부가 갈등과 탄압(피탄압)의 관계가 아니라 6·15선언을 함께 실천하는 각각의 주체로 섰다는 점이다. 특히 그동안 정부가 이적시 해왔던 범민련 남측본부가 최근 강령과 규약을 6·15선언 수준에 맞게 손질하고 또 합법화운동을 펼치는 것은 분명 6·15선언이 통일운동세력에게 제시한 함의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6·15 공동선언 이후로는 통일운동 조직체 간 갈등을 봉합하려는 노력이 이뤄지고, 남북 교류행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김대중 정부 4년 차인 2001년부터 이명박 정부 1년 차인 2008년까지 8년에 걸쳐, 6월 15일과 8월 15일에 맞추어 대규모의 남북공동행사가 개최되고, 그밖에 다양한 남북교류사업이 펼쳐졌다. 그런데 여기서 궁극적인 질문은 이러한 남북교류행사가 과연 ‘통일운동’이냐는 것이다. 즉, 1980~90년대의 통일운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민족통일에 실제로 기여하는 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냐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먼저 남북정상회담 후 통일운동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첫 번째 8·15대회 


(1) 범민련과 자통협, 민주노총 

지난 호에서는 1999년 누가 8·15대회를 주도할 것이냐를 둘러싼 ‘점 콤마 논쟁’을 소개했다. 2000년 6·15공동선언 전까지 통일운동 단체 사이에는 1999년 대회를 둘러싼 심각한 갈등의 여파가 강하게 남아있었다. 범민련은 2000년 2월 공동의장단 회의에서 ‘2천년 통일대축전 11차 범민족대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즉 점, 콤마가 없는 대회 명칭이다.) 또한 2월 말 범민련과 자통협은 “99년도 명칭합의 정신에 기초하여” 2천년 통일대축전 11차 범민족대회라는 하나의 대회를 치른다고 합의했다. (이것이 2000년 대회의 첫 번째 명칭이다.)

 그런데 자통협이 낸 「2000년 통일대축전 평가」라는 문건에 따르면, 명칭에는 합의했지만, 실제 준비 과정이 아주 순조롭지는 않았다. 4월 10일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다는 보도가 나온 후, 5월 하순 자통협과 범민련 남측본부 대표들이 만난 준비위원회에서 “준비위원장이나 준비위원은 나이 든 분이 많은 범민련 남측본부가 주로 맡되 집행기구는 상호동등한 숫자를 내어 꾸리자”는 데 합의했으나, 사무처나 문예위가 범민련 남측본부 중심으로 구성되어 통일대축전 행사가 범민련 쪽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또한 범민련 내부에서 1999년 말부터 이른바 ‘강범-이범’(강희남 범민련 대 이종린 범민련) 갈등이라는 매우 심각한 조직 내 분쟁이 발생해서 준비위원회 구성도 지연되었다. 강희남 목사의 사퇴로 촉발된 내분과정에서 한총련은 범민련의 새로운 지도부 구성에 반발해 강 목사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지도부 구성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이종린과 강희남 중에서 누가 범민련의 대표성이 있는가를 두고 대회 준비위 내에서도 갈등이 이어져, 범민련 조직 내 분쟁이 대회 준비위로 전이되기도 했다.

그런데 6·15공동선언 이후 상황이 급변하였다. 6월 29일 북측은 일본 동경의 범민련 공동사무국을 통해서 “올해 8·15 통일행사를 북남공동선언을 지지하고 그 이행에 유리한 환경을 마련하는 방향에서 북·남·해외가 각기 지역단위로 조직하되 여러 통일운동단체들과 광범위 연합하여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대회명칭은 “각 지역단위로 진행되는 대회성격에 맞게 합리적으로 정하자”, 범민련과 한총련의 방북대표단에 대해서도 “올해는 파견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한 마디로 말해, 남북해외 삼자연대 방식의 범민족대회를 잠정 중단한다는 뜻이었다. 남측에서는 6·15 공동선언을 지지하는 단체를 폭넓게 모아, 범민족대회가 아닌 별도의 명칭으로 대회를 치르라는 얘기였던 셈이다. (이러한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그래서 7월 12일 준비위 운영위에서 자통협 측은 남측 민간통일운동의 폭넓은 참여를 위해 명칭을 ‘2000 통일대축전’으로 간결하게 바꾸자, 즉 ‘11차 범민족대회’를 빼자고 제안했으나, 범민련은 이를 거부했다. 다만 범민련의 제안으로 명칭에 6·15공동선언이 포함되어서 6·15남북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2000 통일대축전 11차 범민족대회로 바뀌었다. (두 번째 명칭이다.) 

그러나 다음 날, 7월 13일 범민련 북측본부의 입장이 한 번 더 전달되면서 상황이 또 바뀐다. 즉 북측본부는 “범민련, 한총련 조직의 고유한 특성을 살리면서 공동선언을 지지하는 단체, 인사라면 정부, 정당은 물론 경실련, 민화협을 비롯하여 광범한 시민운동단체들까지 망라하여 하나의 행사로 성대히 개최되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범민련 남측본부는 입장을 전변하여 ‘6·15남북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2000년 통일대축전’으로 명칭을 변경하자고 제안하고, 이미 정부, 민화협과 접촉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 자통협은 범민족대회라는 명칭을 빼자는 제안을 했지만, 정부·민화협과 공동행사를 치르는 데는 반대했다. “김대중 정부가 6·15 남북공동선언을 훼손하고 있고, 민중생존권에 대한 탄압을 가속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민화협과 함께 하려하기보다는 자주적 민간통일운동진영의 단결을 우선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회 기조에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범민련의 입장이 관철되어 대회 명칭은 6·15 남북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2000년 통일대축전이 되었다. (세 번째 명칭이다.) 

한편 전국연합은 이러한 입장 차이를 조정하기 위한 ‘묘수’를 찾고자 했다. 그래서 13~14일은 범민련과 민화협이 각자 자신의 행사를 진행하고, 15일 당일 모든 단체가 한자리에 모여 ‘6·15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범국민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민화협 측도 “올해만큼은 대단결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민화협 내에는 범민련, 한총련과 함께 할 수 없다고 강력히 반발하는 보수단체도 있었다.)

하지만 특히 민주노총이 계속해서 이러한 명칭과 사업계획에 강한 반대의견을 개진했다. 민주노총은 당시 시점에서 롯데호텔노조·사회보험노조와 같은 현안에 직면하여 있었다. 따라서 김대중 정부가 총력투쟁의 핵심적 표적인 마당에, 남북공동선언의 지지(이행)를 표명하거나 나아가 정부·민화협과 공동행사를 마련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이때 민주노총의 지도부는 단병호 위원장이었다.) 그리하여 7월 24일에 최종적으로 명칭이 확정되었는데, 민주노총의 요구를 수용하여, 남북공동선언 관철과 민족의 자주·대단결을 위한 2000년 통일대축전이 되었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명칭이다.) 여기서 관철이나 민족의 자주·대단결과 같이 더 강한 표현이 들어간 것은 김대중 정부에 대해 대결적 자세를 취하겠다는 함의를 담고 있었다. 정부 당국이 노동자 생존권 투쟁과 한미 주둔군 지위에 관한 협정(SOFA) 개정 운동에 대한 탄압을 지속한다는 게 그 논거였다. 또한 범민련 북측본부와 남측본부와 정부·민화협과 공동행사를 치르자고 제안한 바에 대해서는 정세 추이를 보아가며 참여단체의 만장일치로 추진 여부를 결정하기로 해, 민주노총이 계속 반대하는 한 불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했다. 

대회는 8월 13일 저녁 개막식부터 15일 오전 8·15기념식과 걷기대회까지 이어졌다. 15일 2시부터 대학로에서는 ‘공안탄압 분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저지, 비정규직 노동자 차별철폐와 정규직화, 근기법 개악 없는 노동시간 단축, 국가보안법 철폐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다. 그런데 통일대축전 준비위는 대학로 노동자대회에 대한 참가를 조직적으로 결정하지 않았고, 개인들의 결정에 맡기기로 했다. 그래서 노동자대회와 같은 시간에 민화협이 주관하여 열린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2000년 통일맞이대축전’에 참여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민주노총은 김대중 정부에 대한 강력한 투쟁의지를 천명할 때, 한총련과 민화협 대회에 참여한 6·15 공동선언 이행을 주장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2) 민화협과 정당·종교·시민사회단체공동회의 

한편 민화협은 정상회담 이후 7·4 남북공동성명 기념식에서 남북 정당·사회단체 공동회의와 8·15 민족공동행사로 ‘2000 온겨레 통일맞이 대축전’을 제안했다. 그러나 7월 31일 남북 장관급회담을 결산하는 공동보도문 ③항에서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남과 북, 해외에서 각기 지역별로 남북공동선언을 지지 환영하며 그 실천을 위한 전민족적 결의를 모으는 행사를 진행한다”고 밝힌 것처럼 남북공동행사가 실현되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범민련-자통협과 민화협의 남한 내 공동행사가 치러지지도 못했다. 그래서 민화협은 8·15를 맞이해서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2000년 통일맞이대축전’을 개최했고, 특히 8월 14일 ‘민족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정당·종교·시민사회단체공동회의’가 열렸다. 

그런데 이에 앞서, 1999년 후반기에 천주교, 불교, 기독교, 원불교, 천도교, 성균관, 민족종교 등 7대종단의 협의기구인 ‘온겨레손잡기운동본부’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다음해 2000년 3월 1일 전국에서 약 20만 명이 참여하는 온겨레손잡기운동을 펼쳤고, 6월 10일 ‘남북정상회담 성공기원, 화해와 평화를 향한 겨레대합창 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런 흐름이 정당·종교·시민사회단체공동회의로 이어졌다. 이 행사는 기념사로 강만길 민화협 상임의장, 격려사로 김광욱 천도교 교령, 축사로 서영훈 새천년민주당 대표, 박용길 민화협 상임고문, 이부영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참여했다. 또한 한반도 평화를 위한 특별결의문은 윤재철 대한민국 상이군경회 회장이 낭독했고, 정세보고로 장수근 한국자유총연맹 연구실장이 참여하기도 했다. (자유총연맹이나 상이군경회는 민화협 참가단체였다.) 남북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세부 과제에 대한 토론에는 한총련 김형모 중앙위원이 발표에 나서기도 했다. 즉 공동회의는 자유총연맹에서 한총련까지 망라하는 모습을 취했다. 

이러한 구성을 반영하여, 공동회의에서 채택된 ‘6·15 남북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결의문’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특별결의문’은 어떤 ‘정치색’도 배제하고 최대한 무난하게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자는 “남과 북의 종교 사회단체들의 뜻을 하나로 모아서 6·15 남북공동선언을 지지하고 실천을 약속하는 거족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후자는 “어떤 성격의 전쟁이라 할지라도 이 땅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단호히 반대”한다는 게 핵심 요지였다. 공동회의에 참여하는 모든 단체가 무난히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결의문을 쓸 수밖에 없는 게 객관적 현실이었다. 하지만, 이후에 이어질 남북공동행사나, 남측 내부행사에서 이러한 양상이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다룬다.) 

어쨌든, 공동회의는 앞으로 열리리라 기대하는 ‘남북 정당·사회단체 공동회의’의 준비과정이라고 스스로 분명히 규정했다. 북측에서도 이번 8·15 대회를 “정부, 정당은 물론 경실련, 민화협을 비롯하여 광범한 시민운동단체들까지 망라하여 하나의 행사로 성대히 개최”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던 것처럼, ‘남북 정당·사회단체 공동회의’라는 전망이 결코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3) 2000년 8·15대회는 무엇을 남겼나? 

그럼 2000년 8·15대회는 어떤 극적인 변화를 보였는지, 무엇을 남겼는지 정리해보자. 

첫째, 범민련과 한총련이 주도하던 범민족대회가 잠정적으로, 그리고 곧 확인될 것처럼, 영구적으로 중단된다. 지난 글에서 인용했던 것처럼, 1999년 범민족대회에 대해 범민련 측은 극히 승리적으로 평가했다. 사상 최상의 수준으로 남북해외 삼자연대를 실현했고, (북한이 제시한 고려민주연방제 통일방안을 포함한) 조국통일 3대헌장을 통일의 대강으로 폭넓게 확인했으며, 민족대단결의 구심체로서 범민련의 위상을 비상히 높여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해인 2000년 범민족대회는 북측의 사실상 ‘일방적인’ 통보를 통해서 폐지되었다. 

범민련은 2001년 평양에서 개최된 민족통일대축전 기간에 강령과 규약을 바꾸었다. 먼저 강령 3항 “두 제도, 두 정부가 공존하는 연방국가를 건설한다”는 연방제 통일방안을 삭제하고 “7·4 공동성명과 6·15 공동선언 정신에 따라 범민족적 통일국가를 수립한다”고 대체했다. 또한 규약 13조의 “범민족대회 개최”라는 부분도 삭제했다. 즉 그동안 범민련이 금과옥조처럼 강조했던 연방제 통일방안 합의 확산과 남북해외의 직접적인 삼자연대(범민족대회) 양자를 폐기한 셈이다. 또한 기존 강령에는 외국군대의 철수, 상호군축, 비핵평화지대화 실현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배격한다”는 추상적인 문구로 대체되었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과거 민족회의가 새로운 통일운동체를 건설하자며 표방하던 바를 범민련이 맹렬히 비난했던 논거가 무색해진다. 1989년 문익환 목사는 방북 당시, ① 북한이 ‘두 개의 조선’ 정책이라는 식으로 교차승인을 무조건 거부해서는 안 되고,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한시적’, ‘과도적’으로 교차승인에 참여해야 하며, ② 남측이 제안하고 있는 국가연합안이 연방제를 점진적, 단계적으로 실현하는 현실적 방안이라는 사실에 동의해야 하며, ③ 북한이 정치군사회담 우선이라는 기존 입장을 바꾸어 정치군사회담과 경제문화교류를 병행 추진해야 한다고 설득하고자 했다. 이중에서 남북 동시 유엔가입으로 교차승인 문제가 실현되었다면(물론 북미, 북일 국교수립 문제가 남아 있으나), 6·15 공동선언은 문 목사의 두 번째, 세 번째 주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또 한편, 민족회의는 협의체 수준을 넘어서는 연합체 수준의 남북해외 상설통일기구가 현실에 부적합하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범민련의 강령규약 변경은 민족회의의 주장을 사후적으로 승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범민련의 기존 주장대로라면 범민련은 유일무이한 남북해외 통일운동기구로, 통일을 지향하는 모든 개별단체라면 당연히 범민련에 가입해야 하고, 범민족대회에 참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둘째, 그렇다면 그동안 북한에 대해 교조적인 태도를 보였던 일부 통일운동 단체들은 이러한 변화를 계기로 입장의 근본적 변화가 있었을까. 한총련은 위에서 언급한 2000년 8월 14일 정당·종교·시민사회단체공동회의에서 “정부, 정당은 민간통일운동의 6·15 남북공동선언 지지, 이행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어야 하며, 민간 통일운동도 정부, 정당과 적극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그 이전까지 김대중 정부를 ‘사대매국 정권’으로 규정하고, 민화협을 격렬히 비난했던 입장에서 180도 바뀐 것이었다. 나아가 다른 단체들이 2000년 8·15대회에서 정부, 민화협과 공동행사를 열지 않기로 합의한 정신을 외면하고, 한총련은 민주노총 노동자대회가 아니라 민화협 행사에 참여하기로 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러한 극적인 태도변화는 북한이 남한을 대하는 태도가 180도 바뀐 사실에 기인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셋째, 북측이 범민족대회를 중단하기로 하였다고 하여, 남한의 통일운동을 자신의 정치적, 외교적 목적에 따라 도구적으로 활용하려던 태도에 근본적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까. 이 문제에 관한 답은 남북정상회담 이후, 노무현 정부 시기를 거쳐, 이명박 정부가 집권했던 2008년까지 이어진 남북공동행사, 남북교류사업을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검토하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북측에서는 남한의 ‘민간통일운동’에 상응하는 민간기구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남측의 통일운동은 사실 북측의 ‘관’과 직접 대면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북의 ‘관’은 남북 정부 간 회담, 협상과 남북교류사업 양자를 전략적으로 배치하고 활용하고자 한다. ‘남북의 정부 간 관계가 경색되어 있을 때 민간교류가 남북관계의 끈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는 식의 남측 민간통일운동의 평가는 과대한 자기만족일 수 있다.   

넷째, 8·15대회의 전 과정을 되돌아볼 때, 특히 민주노총이 강력하게 반대하지 않았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정부, 민화협과 공동행사가 치러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6·15 공동선언 ‘지지와 이행’이라고 말하든, ‘관철’이라고 말하든 간에, 양자는 6·15 공동선언 그 자체는 긍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민주노총이 롯데호텔노조나 사회보험노조와 같은 현안에서 정부와 강력히 대치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6·15 공동선언 그 자체를 긍정한다면 정부, 민화협과의 공동행사로 나아갈 길은 얼마든지 열릴 수 있었다. 따라서 그 후 민주노총의 ‘통일사업’이 6·15 공동선언의 지지 또는 관철을 명분으로 활짝 개방되었다. 
 

실제로 민주노총은 김대중 정부 출범 후, 이미 1998년에 통일위원회를 중심 축으로 하여 “통일염원 남북(북남)노동자축구대회”를 추진하기로 하여, 1999년 8월 12일~13일 평양에서 남한의 한국노총, 북한의 ‘조선직업총동맹’(직총)과 함께 축구대회를 치렀다. 또한 2000년에 서울 축구대회는 성사되지 않았지만, 2000년 12월 11일부터 14일까지 금강산에서 민주노총, 한국노총, 조선직업총동맹 공동주최로 ‘남북노동자통일대토론회’도 개최했다. 여기에는 민주노총 18명을 포함해 남측에서 30명 정도 참여했고, 채택된 공동호소문에서는 “자주와 애국애족의 열정으로 가득찬 우리 남북노동자들의 힘을 조국통일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 남김없이 바치자”고 결의하기도 했다. 
 
(4) 범민련 조직분쟁 후 

한편, 범민련 노선의 극적인 변화에 어떤 반발은 없었을까. 1999~2000년 범민련 내부 조직분쟁의 한 중심축이었던 강희남 목사는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범민련을 떠난 후 범민족대회도 못 해요. 내가 [1999년] 10차 범민족대회까지 하고 떠났어요. 지금 11차 범민족대회를 해야 하는데 없어요... 그런데 그거 못하게 하니까 10년 동안 내가 문서로서만 연락해서 [범민족대회를] 형식으로만 한 거예요. 그렇게라도 해야... 통일운동 역사가 얼마나 뜻있는 것인가를 알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범민족대회도 못하고, 연방제라는 말은 지금 범민련 규약에서 삭제해버렸어요. 이것이 통일운동입니까?.. 지금 ‘통일연대’도 연방제에 대해서 절대 말 안 해요... 이런 것은 사이비 통일운동에 다름 아니에요... 나 같은 사람은 밀어내고 자기들이 다 해서 한번에 북한에 300명씩 간다고 그래요.

그래서 얼마 전에 몇 사람과 함께 민족연방제 통일연구회를 만들었어요... 내가 범민련을 떠난 이후로 관계하는 통일운동 단체로는 서울의 ‘[6·15남북공동선언] 실천연대’라는 것이 있어요. 젊은 대학생들이 일을 참 잘해요.. 그리고 ‘김양무정신계승사업회’라는 것이 있어요.... 그리고 ‘주미철’이라고, 주한미군 철수하라는 작은 단체가 있는데...”

그렇지만 강희남 목사처럼 연방제 통일방안과 범민족대회를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은 극소수였을 것이다. NL 입장에 선 통일운동의 경우에도, 북한이 이미 입장을 완전히 바꾼 마당에 과거의 노선을 고수하는 게 실질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고려민주연방제를 의미할 것일) 연방제를 강한 의미에서 계속 밀고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강 목사 본인 표현대로 ‘몇 사람’뿐이었을 것이다. 예컨대, 강 목사가 본인이 계속 관계를 맺는 단체로 언급한 ‘6·15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실천연대)도 명칭에 6·15선언 실천이 들어간 것처럼 6·15공동선언을 ‘통일운동’의 새로운 가이드라인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실천연대는 2000년 10월에 결성된 단체인데, 필자는 범민련 조직 분쟁의 여파 속에서 결성된 것으로 알고 있다. 과거 실천연대 홈페이지에서는 실천연대 가입단체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김양무정신계승사업회, 주한미군철수운동본부와 그 외에도 그림공장, 우리나라, 청춘, 가극단 미래, 박성환밴드, 전국어민총연합이 열거되어 있었다. 즉 조직형식으로 보자면, 실천연대는 한총련의 상급단체였다. 즉 1990년대 후반, 한총련 주류의 교조적 노선과 궤를 같이 했다.  


2) 2001년 민족통일대축전 


그리하여 2001년부터는 남북교류사업이 봇물이 터진 듯 쏟아져나왔다. 5월 1일 노동자통일대회(금강산), 6월 14~16일 민족통일대토론회(금강산), 7월 18일 농민통일대회(금강산), 8월 15~21일 2001 민족통일대축전(평양) 등등. (농민통일대회의 주최는 남측의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북측의 조선농업근로자동맹〔농근맹〕이었다.) 그럼 이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1) 통일연대와 민화협의 남북공동행사 추진: 민주노총과 자통협의 반발 

먼저 2001년 3월 15일 ‘6·15 남북 공동선언 실현을 위한 통일연대’가 결성되었다. 여기에는 전국연합, 범민련 남측본부, 민주노총, 한국노총, 한총련 등 30개 단체가 참여했다. 통일연대는 결성과 함께 북과 해외에  6·15 남북공동선언 1주년을 기념하는 민족대토론회를 제안했다. 또한 6·15~8·15 기간을 ‘민족통일운동 촉진기간’으로 정하고 8·15에 민족 공동의 거족적 통일대축전을 열자는 북측의 제안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2001년 4월 통일연대와 민화협은 각각 북측 민족화해협의회(북민화협)와 대북접촉을 추진하였는데, 단체의 대북성향 때문에 민화협은 정부의 승인을 받았지만, 통일연대는 끝내 승인을 받지 못했다. 이에 따라 북민화협은 남측 민화협과의 만남에 나오지 않았고 그 이유로 통일연대의 방북 승인 불허를 들었다. 즉 각각의 이유로 통일연대와 민화협이 독자적인 대북교류사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 

그에 따라, 민화협과 7개종단(온겨레손잡기운동본부), 통일연대가 공동으로 대북교류사업을 하기 위해 5월 23일에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2001 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추진본부)를 결성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런데 결성식을 하루 앞둔 5월 22일, 통일연대 대표자회의에서는 통일연대의 추진본부 참여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이 자리에서는 입장이 강하게 엇갈려 표결 문제까지 언급되었는데, 자통협은 주한미군, 미사일방어체제(MD)에 대한 민화협의 태도를 문제로 삼으며, 정부나 민화협과 함께 할 수 없다며 표결에 불참하고 퇴장했다. 민주노총은 정부와의 불편한 관계를 들어 참여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23일 결성식에는 통일연대가 참여하지 않았다. 그 후 6월 2일 통일연대는 다시금 대표자회의를 열어 2001 추진본부 참여를 결정했다. 하지만 민주노총과 자통협은 여전히 추진본부 행사에는 불참하는 대신 통일연대쪽의 행사에만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민주노총은 김대중 정부와 매우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1998년 이후 2001년 5월말까지 노동쟁의 관련 구속노동자는 528명이었고(김영삼 정부 5년 동안 구속노동자 507명을 넘어선 수치였다), 2001년에 구속된 노동자만 해도 89명에 이르렀다. 민주노총은 “6월 12일부터 1백 25개 사업장, 5만 5천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하는 연대파업에 돌입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12일에는 서울 대학로에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 김대중 정권 퇴진 민주노총 총력투쟁 결의대회’를 열었다. 6월 15일 정부는 민주노총의 연대파업을 빌미로 간부들에게 검거령을 내렸다. 2001년 8월 2일 단병호 위원장이 자진출두했으나, 형집행정지가 취소되어 다시 수감되었다. 
그런데 민주노총이 추진본부에 참가하지 않기로 했다고 하여, 남북공동행사를 완전히 보이코트한 것은 아니었다. 남측의 추진본부와 북측의 ‘6·15~8·15 민족통일촉진운동을 위한 북측준비위원회’가 개최한 6·15 민족통일대토론회(금강산)에 민주노총은 5명의 대표를 파견했다. 8·15 민족통일대축전(평양)에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대표 30명이 참여했다. 다만, 민주노총은 서울행사 중에서 통일연대가 주최하는 연세대 8·15 통일대축전 행사에는 참석하되, '민족공동행사추진본부'가 주최하는 여의도 행사는 사실상 정부 차원의 행사라고 판단하여 불참키로 했다. 실제로 여의도 행사는 문화광광부, 행정자치부, 통일부, 서울시가 후원했고, 통일연대 행사 참가자 대부분이 이 여의도 행사에 참여했다. 
 

한편, 2001년 추진본부가 결성될 때 종단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민화협 측 인사의 평가도 있다. 당시 민화협 정책실장을 맡았던 김창수 씨는 민화협과 통일연대가 단일한 지도력을 세우기 힘든 상황에서 종단이 두 세력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으며, 그후에도 남북공동행사를 치를 때 종단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2) 2001년 남북공동행사의 복병 

2001년 남북공동행사 추진을 위해 남측에서 민화협, 7개 종단, 통일연대가 추진본부가 결성되고 북측에서도 준비위가 구성되었으나, 실제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복병이 나타났다. 

첫 번째는 범민련, 한총련 문제였다. 6·15 대토론회를 앞두고 북한은 실무회담에서부터 범민련과 한총련의 참여를 보장해야 행사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남한 정부도 이적단체라는 실정법의 구속력이 있기 때문에, 이를 허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예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범민련, 한총련은 대표급 간부가 참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통일연대의 회원자격으로 참가하는 데 동의했고, 정부 당국도 이를 허용 또는 묵인했다. (범민련과 한총련 회원이 각기 10여 명씩 참가했다.) 

두 번째는 정부가 특정 참가자에 대해 방북 불허를 내는 문제였다. 2001년 노동절 남북노동자 공동행사에서 이규재 민주노총 부위원장의 불허 문제는 이미 언급했다. 6·15 민족대토론회의 경우도 남측 대표단 6명에 대해 향군법 위반, 재판 계류 중, 수배 중, 집행유예기간, 국정원 내사 중 등 사유로 방북을 불허했다. 즉 현행법상 처리가 진행 중인 인사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이때 추진본부는 정부의 방침에 항의의 뜻을 전달하면서도 남북공동행사의 성사라는 대승적 목적을 위해 이 문제는 일단 접어두고 방북을 하였다. 북한은 방북불허에 대한 항의 표시로 자유총연맹과 재향군인회 회원의 참가를 거부했으나, 그후 다시 허용했다. (정부 당국의 방북불허 문제는 8·15 공동행사에서 큰 문제로 불거지지 않았으나, 뒤에 서술할 것처럼 8·15대회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이 한국 내에서 큰 논란이 되자, 2002년부터 더 큰 쟁점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세 번째, 가장 까다로웠던 문제는 북한이 평양에서 열릴 8·15 민족통일대축전의 개막식과 폐막식을 ‘3대헌장 기념탑’에서 열겠다고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시작되었다. 이 3대헌장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에서 합의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원칙’,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1980),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1993)을 말한다. 이 중 7·4남북공동성명은 남북이 합의한 것이지만, 나머지 두 가지는 김일성 주석이 직접 제시한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북한의 통일방안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행사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 국내에서 이념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하여 개·폐막식 참여를 불허했다. 8월 13일 북측은 ‘참관’ 자격으로 와도 좋다고 했고, 추진본부는 이를 수용했다. 그러나 14일 한국 정부는 3대헌장 기념탑 행사에 참여하지 않고 고려연방제를 지지한다는 식의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는 조건으로만 방북을 허용한다는 입장을 다시금 밝혔고, 추진본부는 각서를 쓰는 데 동의했다. (정부는 참가자 전원의 각서를 받고자 했으나, 추진본부 대표 4인이 각서를 쓰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8월 15일 10시가 개막식 예정시간이었으나 정오에야 남측 참가단이 북쪽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추진본부 측은 자연스럽게 개막식 참가 문제가 해소되리라 희망하기도 했으나, 평양에 도착한 후 평양 시민 2만여 명이 기념탑 앞 행사에서 남측의 ‘참관자’를 6시간 이상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오후 6시 넘어서까지 북측 안내원은 참여를 집요하게 종용했고, 통일연대 참가자들이 ‘우리라도 가겠다’고 버스에 올라탔고, 결국 340명의 참가단 중 100여 명이 개막식장을 가게 되었다. 결국 예상되었던 것처럼, 그 다음날 8월 16일 국내언론은 참가단의 ‘약속 파기’를 비난하는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마지막으로, 참가단은 8월 15일부터 8월 21일까지 6박7일의 일정을 소화했는데, 강정구 교수가 만경대(김일성 주석이 태어나서 유년시절을 보낸 지역)를 방문했을 때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달성하자”는 방문록을 작성한 게 국내에서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정부는 3대헌장 기념탑 행사 참여를 주도한 16명도 귀환하자마자 즉시 소환했다. 
 

국내 여론의 공격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추진본부는 도착성명을 통해서 “발생한 사건들로 국민 여러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사과의 말씀을 올린다”고 밝히기도 했다. 다만 “당초 예정했던 부문 간 대화가 잘 진행된 점에 대해서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 이번 사건이 민간교류의 단절로 이어지는 빌미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때 기독교, 불교, 원불교, 천도교 등 종교계와 여성, 농민 단체의 부문 간 교류가 이뤄져서 남북 청년대회, 여성대회, 개천절민족공동행사, 3·1절 민족공동행사가 이뤄지게 되었다. 
 
(3) 2001년 통일대축전, 무엇을 남겼나?  

1988년 범민족대회라는 아이디어가 최초로 제시되고, 1990년 1차 범민족대회가 열렸지만, 실질적인 의미에서 남북공동행사는 2001년 평양 대축전이 최초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역사적 의미와 비교했을 때, 그 후유증이 매우 컸다. 대축전 참가자 중 7명이 구속되고, 9월 3일 한나라당이 제출한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이 자민련의 동조로 국회에서 통과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김대중-김종필의 연합, 즉 DJP 연합이 깨진다. 이러면서 새천년민주당은 국회에서 과반수를 통제할 힘을 잃게 되었다.)  

또 한편 2001년 6·15와 8·15는 1월 부시 행정부의 출범과 9·11 테러사건 중간에 있었다. (9·11 사건을 미리 예견할 수는 없었지만) 부시 행정부 출범 후 북미관계는 냉각되고 남북 정부 간 대화도 중단된 상태였다. 그래서 추진본부 측은 대규모 민간교류 행사가 남북관계의 경색된 분위기를 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따라서 추진본부 측으로서는 후폭풍이 매우 곤욕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이 파문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는 문제를 두고, 민화협과 통일연대 양측의 의견이 갈리기도 했다. 

당시 민화협 정책실장 김창수 씨는 “이번 행사에서 민간통일운동의 가장 큰 손실은 통일운동을 통일에 대한 의지가 높은 사람들만의 특정한 부문으로 전락시켰다는 점입니다. 훨씬 대중적인 운동으로 만들 수 있었는데 오히려 국민들이 거리감을 두게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반면 한충목 통일연대 상임집행위원장은 “이번 행사 파문도 수구세력과의 갈등 속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는 겁니다. 특히 이번 파문의 경우 문제를 증폭하고 방향을 오도한 세력들이 조직적으로 존재했다고 봐요”라고 평가했다.

즉 민화협 측은 지도부의 방침을 따르지 않은 (주로 통일연대 소속) 인사들의 개별적 행동이나, 남한 내 여론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역시 통일연대 소속) 인사들의 언행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했다. 반면 통일연대 측은 참가단이 통일사절로서 북한의 입장을 배려할 필요가 있었고, 오히려 ‘수구 보수언론’의 조직적 행태가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양자의 입장 차이는 논쟁으로는 좁혀지기 어려웠다. 이는 그 이후 남북 교류행사가 실제로 어떤 식으로 진행되느냐를 통해서 실천적으로 검증될 문제였다.   
 

3) 2002년 6·15와 8·15 


2001년 남북공동행사의 여파가 매우 컸지만, 추진본부에 참여했던 단체들이 남북교류사업을 이어가려는 의지도 매우 높았다. 그에 따라 2002년 이후로도 2008년까지, 즉 이명박 정부에서 남북관계가 사실상 동결되기 전까지 남북공동행사는 꾸준히 이어졌다. 

‘2002 설맞이 민족공동행사’도 2월 27~28일 금강산에서 열기로 하여 사업이 추진되었는데, 방북불허자가 46명에 달했고, 이중 41명이 통일연대 소속이었다. 그에 따라 통일연대가 불참을 선언했고, 행사는 결국 무산되었다. (북한은 한국 정부를 전적으로 비난하기 보다는 오히려 미국 부시 행정부를 비난했다. 2월 27일 북측대표단 성명은 “이번 사태의 원인은 전적으로 미국의 계획적인 파괴음모책동에 기인하고 있다. 미국은 6·15 북남공동선언 자체를 무시하면서 우리 민족끼리 단합하여 통일하는 것을 극력 반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2001년 8·15 행사의 여파로 정부가 방북심사를 강화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는 현행법상 법적용이 진행 중인 인사 외에도 범민련 남측본부나 한총련과 같은 ‘이적단체’의 주요 구성원인 경우에 개별적인 위법행위가 없다고 하더라도 방북을 금지했다. 하지만 6·15행사부터는 3대헌장 기념탑 행사에 참여했던 사람이라도 공동행사 참여를 막지 않기로 입장을 바꾸기도 했다. 그래서 2002년 6·15행사(금강산)에는 13명, 8·15행사(서울)는 북쪽에서 열린 행사가 아님에도 25명에 대해 행사 참가를 불허하면서, 불허자 폭이 다소 줄기도 했다.  

한편, 4월 3일 임동원 통일특보가 대통령 특사자격으로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한 후 정부 간 관계가 다시금 풀려나가면서 민간교류도 이어질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남측에서 구성된 ‘2002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는 6월 14~15일 금강산에서 ‘6·15공동선언 발표 2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을 개최했다. 이 행사는 민속놀이, 체육활동, 문화예술 공연이 주를 이루었고, 함께 식사하고 산행을 하는 형식을 취했다. 

6·15행사를 무난히 마친 후 추진본부는 서울에서 8·15대회를 열기 위한 활동에 돌입했다. 그렇지만 2002년 6월 29일 서해에서 교전(제2 연평해전)이 발생하고 한국측 해군 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이 유감을 표명했으나, 국내에서 긴장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8·15대회 때 서울에서 반북시위가 벌어질 개연성도 있었다. 

애초 남측 추진본부는 남측대표단 400명, 북측대표단 100명, 참관 400명 등 1천여 명이 참여하며, 북측 대표단 숙소인 워커힐호텔을 주된 행사장으로 하되 올림픽체육관과 서울조달청에서 사진전, 미술전을 개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8월 9일 정부가 참가규모를 400명으로 축소하고, 한총련·범민련의 참여를 배제하며, 워커힐호텔에서만 행사를 치르도록 하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다만 코엑스에서 북측무용단의 공연은 허용되었다. 통일연대는 이러한 정부의 방침에 따른 행사 참여 문제를 두고 표결까지 했는데, 결국 북측 대표단이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한다는 중요성 때문에 대회는 성사시켜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20 대 2로 가결되었는데, 자통협이 ‘추진본부가 너무 정부에 끌려다닌다’며 반대표를 던졌다. 그렇지만 자통협 본부 외에 소속단체의 참여는 자율에 맡김으로써 민주노총, 전빈련이 참여하게 되었다. 민주노총은 ‘북측 직업총동맹 대표단이 오는데 우리가 불참하면 누가 손님을 맞이하겠는가’라면서 통일연대 대표자회의의 결정을 따랐다.

한편 8월 14일 통일연대는 워커힐호텔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건국대에서 ‘민족통일대회 경축 한마당’을 열었다. 이들은 범민련, 한총련을 배제한 정부를 규탄하면서도, 행동반경을 건국대 내로 제한함으로써 정부와 충돌을 회피했다. 통일연대는 그 전년도 평양 8·15대회가 몰고온 일파만파를 고려해서 이번 서울행사에서는 극히 신중한 행보를 보였던 셈이다. 《민족21》의 기사는 2002년 대회의 성공으로 “비로소 통일연대는 주홍글씨를 뗐다. 8·15로 입은 상처가 8·15로 치유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4) 대북지원 민간단체의 확대: 북민협의 결성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 벌어진 최악의 식량난을 계기로 국내외 민간단체의 대북지원사업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 이전에는 대한적십자사를 통한 ‘창구 단일화’가 이뤄졌다면, 김대중 정부에 들어와 1999년 2월 민간 차원의 대북지원 창구 다원화 조치가 취해졌다. 그에 따라 준법성, 전문성, 분배 투명성과 같은 요건을 갖춘 민간단체라면 독자적인 대북지원이 가능해졌다. 

2000년부터 민간단체의 대북지원 사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정부는 남북협력기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협력기금 지원이 시작된 이래로 지원금액과 사업 수가 계속 증가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마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부는 협력기금을 지원하기 때문에 사업운영 실태를 점검할 수밖에 없었고, 사업의 실질적 성과를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와 검증을 요구했다. 반면 민간단체는 정부가 현장성을 고려하지 않고, 감시와 통제라는 틀로 접근한다고 반발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대북지원 민간단체 상호 정보공유, 의견공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정부를 대상으로 하는 정책 전환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민간단체의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는 인식이 제기되었다. 그에 따라 2001년 2월 29일 대북지원 민간단체 간 유기적 협력체계 구축을 목적으로 하는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이 결성되었다. (홈페이지에 따르면 2021년 8월 기준으로 58개 가입단체가 있다.) 

북민협 구성단체는 다종다양한데, 설립배경에 따라 시민사회 기반, 복지활동 기반, 종교활동 기반, 지방자치단체 지원단체로 분류할 수 있다. 시민사회에 기반을 둔 단체는 대북지원사업 뿐만 아니라 대북정책, 통일정책에 대한 정책제안 통해 정부를 견제, 감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다. 복지활동 기반 단체는 대북지원 사업을 통해 자신의 활동범위와 위상을 강화한다는 목적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종교활동 기반 단체는 아무래도 선교라는 목적을 이면에 담고 있다. 지방자치단체 지원단체는 단체장의 업적 마련이라는 이면의 목표가 있기도 하다. 

어쨌든 북민협은 정부가 협력기금을 지원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북지원민간단체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2002~2003년에 성장기를 맞이한다. 정부가 당시 30~40개 민간단체를 개별적으로 상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협의회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그 후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4~2007년에는 정부와 파트너십을 형성하고 정부 위탁사업도 수행했다. 특히 2004년 4월 북한 용천역 폭발사고를 계기로 북민협의 역할이 커졌는데, 각 단체가 개별적으로 지원을 하는 것보다 북민협을 중심으로 체계적이고 전략적으로 지원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정부는 시멘트, 중장비와 같은 복구자재를 지원하고, 적십자사는 자체 보유하고 있는 생필품을 지원하고, 민간단체는 북민협을 중심으로 대국민 모금활동을 펼치고 수집된 물품을 북에 전달했다. 이러한 사업을 계기로 2004년 9월 ‘대북지원민관정책협의회’(민관협)가 구성되어 북민협과 정부의 남북교류추진협의회가 상호 협의기구를 구성한 것이다. 또한 개별단체별 지원사업뿐만 아니라 북민협의 이름을 건 지원사업도 추진하게 되는데, 농업용 비닐방막 지원이 그 사례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대북 직접 식량지원이 중단되고 북한 핵실험 후 민간단체의 방북도 제한되었다. 그러면서 북민협의 활동도 침체를 겪는다. 
 

5) 종합평가: 김대중 정부 시기 통일운동의 대전환을 어떻게 볼 것인가? 


김영삼 정부 4년 차에 8·15 범민족대회를 둘러싼 엄청난 폭력사태(연대사태)와 김대중 정부 4~5년 차에 평양과 서울에서 열린 남북공동행사를 비교해보면 김대중 정부 시기에 통일운동의 대전환이 벌어졌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함의는 무엇인가? 

첫째, 통일운동은 사실상 ‘민간교류’ 운동으로 전환되었다. NL 통일운동이 1980~1990년대 통일운동의 4대과제라 했던 ① 연방제통일방안 합의 확산, ② 주한미군 철수, ③ 북미 평화협정 체결, ④ 국가보안법 철폐라는 과제를 완전히 폐기한 것은 아니지만, 6·15공동선언 이행이라는 추상적 구호로 대체되었다. 최소한 남북공동행사에서 이런 구호는 사라졌다. 유기홍 씨가 2005년에 발표한 글에서는 남북공동행사를 이렇게 평가했다. 

“지난 4년간 남북공동행사가 성공적으로 지속될 수 있었던 데에는 정치적 언급이나 입장을 피력하는 것을 민간 공동행사 차원에서는 철저히 배제하려 하였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간 공동행사는 문화공연, 체육활동 등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2001년 민족통일대축전에서의 개막식 파문과 만경대 파문을 계기로 남북은 향후 남북공동행사 지속을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는지에 암묵적 동의를 만들어 준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민화협 김창수 정책실장도 “이념, 노선이 아니라, 온 국민이 동의하는 행사를 중심으로 하는 통일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실제로 이를 실행하고자 했다.

둘째, 남측의 ‘민간’ 통일운동이 상대하는 북측도 실제로 ‘민간’이냐는 쟁점이 잠복해 있었다. 역시 유기홍 씨의 글에서 2001년 6·15 민족통일대토론회에서 있었던 일화를 들을 수 있다.  

“[남측] 이돈명 단장의 축하연설문에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을 환영하는 표현을 하려 하였으나, 답방은 김위원장이 직접 결정할 문제인데 축하연설문에 포함되어 있으면 김위원장이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북측이] 수정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허혁필 북측 실무접촉 단장은 김위원장의 답방에 대한 질의를 할 때마다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으나 김위원장이 직접 결정할 문제이므로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수시로 피력하였다. 정치분야 모임에서도 신창균 선생이 김위원장의 답방을 촉구하였으나 북측 김영대 회장은 수뇌부의 결단이므로 여기서는 삼가자고 하였다.” 

정도상 통일맞이 사무처장도 이 토론회를 회고하며 “분과 간담회에 나온 북측의 대표들이 어떠한 재량권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내면을 나누었다는 측면에서 성과가 컸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일화가 말해주는 바는 민간이 자율적으로 입장을 정해서 정당이나 정부에 어떤 건의를 하는 것조차 북한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김정일 위원장 답방 문제에 대해 북한의 누구도 먼저 나서서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바가 드러난 셈이었다. 즉 정부에 대해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라는 의미에서 ‘민간’이란 북에서 만날 수 없다는 뜻이다. 

한편, 북한의 남북접촉 의도가 크게 변했다는 의견도 있다.

북한은 민관합치와 창구단일화 정책으로 대남통일전선부 관계자가 민간, 정부 모두의 창구역할을 하는데, 햇볕정책 이후 정부 간 대화로 업무가 폭주하면서 민간단체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 전통 통일운동세력(주류 NL)과의 교류협력이 북한에 이렇다 할 메리트를 주지 못한 점이 크게 작용했다. “현대의 금강산 관광 산업 한 건에서 9억 달러를 얻을 수 있는데 소규모 지원에는 성이 차지 않게” 된 것이다. 북한은 경제적 실리를 얻거나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제고하는 데 대남정책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북한 정권은 남북접촉과 관계개선을 “생존을 위한 이익추구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다. 민간교류협력 분야와 허용 범위에서 통일 및 인도주의와 같은 표면적 언표와는 달리 ‘경제적 실익이 거의 유일한 준거’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부에서 본격화된 남북공동행사가 긍정적 의미가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남과 북이 전쟁을 하지 않고, 빠른 시일 내에 통일을 추구하지 않으며, 분단을 평화적으로 관리한다는 목표에 서로 동의하고, 이런 합의를 널리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았느냐, 또한 1980~1990년대를 거치며 북한의 대남선전기조에 대해 교조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남한 내에서 폭력사태를 유발하는 운동을 전개했던 한총련·범민련 식의 사업이 억제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느냐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데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의 남북공동행사에서 남측 인사가 북측의 입장에 일방적으로 동조하는 듯한 발언을 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동전의 이면으로, 북측의 입장을 비판하는 듯한 발언도 할 수가 없었다. 2000년대 북한의 핵 문제와 인권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한 쟁점으로 부상하여도, 남북공동행사에서 북한의 핵 문제나 인권 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우려를 표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2005년 평양 민족통일대축전을 회고하는 글에서 이태호 6·15 공동위 남측위원회 협동 사무처장은 핵 문제에 관한 논란을 소개했다. 4월 실무접촉에서 남측은 ‘한반도 비핵화’를 제시했으나, 북한이 난색을 표해서 남측은 이 용어를 빼고 “동북아 평화와 우호협력”으로 대체했다. 오히려 북한이 연설문에 “우리가(북이) 21세기 이후 확보한 전쟁억지력이 민족의 존엄을 지키는 힘이요, 6·15공동선언 이행에 가장 든든한 담보가 되므로, 온 겨레가 이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요지의 문장이 들어가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 다음 날 북한이 양보해서 이러한 직접적인 표현이 삭제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핵 억지력이 민족의 존엄이라는 북한의 주장이 삭제된 것과 등가로, 남한의 한반도 비핵화 요구도 삭제된 셈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게 된 셈이다. 다시 말해, 남북 ‘민간교류’에서는 핵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게 증명된 것이다. 큰 틀에서 보면, 이는 남한의 ‘통일운동’이 북한 핵 문제보다는 어쨌든 남북 민간교류 사업의 지속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는 사실을 함의할 것이다. 과연 이런 방식의 운동이 ‘정치색을 배제함으로써 온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통일운동을 한다’는 애초의 아이디어처럼 “온 국민이 동의할” 방식인지는 머지않아 심각한 쟁점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다음 호에 연재의 마지막으로 노무현 정부 시기의 통일운동을 다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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