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에 대한 소박한 질문
번역: 김진영 정책교육국장
역자 해설
지난 8월 초 발표된 국제연합(UN)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6차 보고서는 2011년부터 2020년까지 지구 기온은 1.09도 상승했음을 보고하면서, “지난 10년간 관측한 극도로 높은 고온은 인간의 영향이 아니고는 발생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2010년대 들어, 이러한 현실에서 세계적으로 기후정의운동이 부상했다. 기후변화 대응은 진보적 사회운동과 노동조합 운동에도 중요한 의제가 되었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어떠한 방향으로 기후변화에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린뉴딜’과 ‘탈성장’이라는 서로 대척점에 있는 두 주장이 경합하고 있다. 대체로 그린뉴딜 주장은 친환경 기술 개발·사용 확대, 재생에너지로의 전환 등을 통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하면서, 1930년대 ‘뉴딜’이 그러했듯 현재 침체된 경제에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자는 맥락이다.
반면 탈성장을 지지하는 이들은 인류가 경제성장 추구를 멈춰야 할 뿐만 아니라, 생산·소비를 줄여 경제규모를 지금보다 줄여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한국에서도 점점 주목을 받고 있다. 탈성장 관련 저작은 2010년대에 비해 출간 빈도가 올해 확연히 늘어나, 9월 초까지 이미 4권이 나왔다. 그중 지난 8월 번역 출간된 『디그로쓰』(degrowth, 탈성장)는 세계 탈성장 진영의 허브 ‘리서치 앤드 디그로쓰’에 참여하는 생태경제·정치학자들의 공동 저작으로, 2018년 『탈성장 개념어 사전』에 이어 한국에 소개되었다. 『디그로쓰』 책 소개는 이 책을 통해 탈성장 운동이 비로소 사회경제 시스템 전환 계획을 품은 현실 정치 운동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탈성장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것은 최근 기후위기에 대한 관심과 논쟁이 폭발적으로 확대하고 있는 현실의 일부다. 특히 지난 8월 1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이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 녹색성장법’을 야당들과 기후운동단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처리하여 논란이 커진 상황에서, ‘녹색성장’, 나아가 ‘성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스웨덴 청소년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2019년 UN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생태계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어떻게 끝없는 경제 성장의 신화만 이야기하고 있냐”는 연설을 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와 같이, 명시적으로 ‘탈성장’을 이야기하지는 않더라도 경제 성장 추구는 기후위기 대응과 함께 갈 수 없다거나,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는 성장·소비 추구를 내려놓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탈성장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반드시 짚어야 할 여러 지점을 제기하는 글로, 《뉴레프트리뷰》 2021년 3·4월호(통권 128호)에 실린 츠다 켄타의 「탈성장에 대한 소박한 질문」을 번역하여 싣는다. 필자 츠다 켄타는 현재 미국 ‘보존법재단’(CLF)의 전략 소송 및 ‘깨끗한 공기와 물’ 프로그램 담당 변호사다. 보존법재단은 뉴잉글랜드 지역에 기반을 둔 환경보호단체다. 이전에는 환경문제를 다루는 미 변호사들의 비영리단체인 ‘어스저스티스’ (Earthjustice) 소속 변호사로 알래스카에서 일했다. 하버드 로스쿨 입학 이전에는 런던에서 《뉴레프트리뷰》의 편집자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필자는 탈성장론이 ‘성장’이나 ‘소비’와 같은 개념에 있어 경제학적이지 않고 불철저하며, 그 부분을 자기 절제의 도덕 이론으로 채우려고 한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탈성장은 몇몇 개인의 삶의 자세를 바꿔서 될 일이 아니라, 사회 전체 규모로 진행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전망을 실현하려면 시민에게 욕구 절제를 강제할 수밖에 없다.
이어서 탈성장의 방법론에 다양한 문제를 제기한다. 탈성장론은 기술 개발이나 효율성 제고로는 기후위기를 벗어날 수 없는 까닭으로, 효율성 향상이 오히려 소비 확대로 이어진 ‘제번스 반등’ 효과를 지목한다. 그러나 모든 효율성 향상이 소비 확대로 상쇄된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 탈성장론자들은 지구의 ‘물질 처리량’을 측정할 명확한 지표도 내놓지 않는다.
실행 과정에도 난관이 많다. 탈성장 목표를 너무 낮게 잡으면 환경 문제 해결에 실패할 것이고, 목표를 너무 높게 잡으면 불필요한 고통이 야기될 것이다. 모든 산업과 기업에 대해 무엇이 꼭 필요하며 무엇은 그렇지 않은지를 일일이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탈성장론은 어디까지가 ‘필요’인지의 기준이나, 어떤 정치 제도를 통해 탈성장을 실행할 것인지 제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들은 국제적 차원에서는 더욱 확대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한편 기후변화는 지구 환경에 유일한 위기가 아니며, 가장 심각한 위기도 아니다. 기후변화 대응 자체만을 목표로 하면 필요한 정책 목록은 상당히 명확하고, 탈성장처럼 지나치게 크고 많은 난점을 수반하지 않는다. 핵심 질문은 왜 이렇게 명확한 정책들이 지금까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느냐다. 필자는 그 까닭으로 미국 정부와 거대 화석연료 회사들을 지목한다. 대기업들은 특히 1970년대의 ‘거대한 침체’ 이후로 자신들의 경쟁력을 지키기 위해 환경을 희생해왔다. 따라서 진정한 문제는 ‘정치’, 즉 어떻게 문명 파괴로 치닫는 세력들을 대체하여 민중이 정치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정리한다. 탈성장론은 경제의 성장이 아니라 침체가 기후위기를 가속화하고 있는 현실을 완전히 거꾸로 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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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환경 전략에 대한 논의는 두 가지 입장을 중심으로 양극화되는 경향이 있다. 로버트 폴린은 이를 ‘탈성장 대 그린뉴딜’이라고 요약했다. 대립하는 두 입장은 각각의 안정적이고 일관성 있는 제안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탈성장론의 전제가 타당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해왔다. 예를 들어, 생태경제학자 허먼 데일리는 탈성장 프로젝트에 공감하기는 하지만, 탈성장 운동은 [전략, 정책] 프로그램을 찾기 위한 구호 내걸기 차원의 운동이라고 묘사한다. 사실 탈성장론에는 고의적인 경제축소를 관리할 기관을 명시하는 백서도, 어떠한 법적인 변화를 만들 것인지도 없다. 그러나 프로그램은 여러 다른 분석 수준에서 제안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그린뉴딜’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일련의 법을 예고하는 14쪽 분량의 결의안으로 현재 명시되어 있다. 탈성장 제안도 이와 비슷한 일반적 수준에서 제기되는 경향이 있다. 한 영향력 있는 논문은 ‘장기·단기적으로 인간의 복지를 증진하고 지역 및 세계 수준의 생태 조건을 향상하는 공정한 생산과 소비 축소’를 요구한다. 대체로, 탈성장 지지자들은 세계 경제활동의 규모가, 이를 지탱할 우리 행성의 수용력을 이미 넘어섰다는 명제에서 출발하여, 세심한 관리에 따른 경제생활 축소를 요구한다.
다음은 탈성장 이론에 대한 일련의 질문이다. 이 질문들은 예비적이라는 뜻에서 ‘소박하다’. 탈성장 관련 저작들은 성숙하고 있으며, 관련 학계는 통합 중이다. 여기서 제기하는 논점들은 탈성장 지지자들이 앞으로 적절한 답변을 개발할 가능성을 배제하려는 것이 아니다. [GDP(국내총생산)와 물질 처리량 간] 탈동조화(decoupling), 물질 처리량(material throughput), 관리된 경제축소 등 탈성장론의 중심 범주를 초심자의 시선에서 보는 목적이다. 그리고 일관성 및 관리 가능성 문제를 논박하는 것이다. 이 에세이는 탈성장론자들이 탈성장이 해법이라고 주장하는 문제의 본질과 대안적 해결책의 본질을 살피기 앞서, 먼저 탈성장의 방법론적 쟁점, 그 다음으로 실질적 쟁점을 검토한다. 그러나 우선 우리는 ‘성장’과 ‘소비’ 개념에 기초한 몇 가지 가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보통 말하는 ‘성장’
탈성장론자들은 ‘소비’에 있어,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쇼핑을 통한 기분 전환’과 같은 일상대화 속 의미와, ‘재화나 용역으로서 자원의 최종적 사용’이라는 경제학적 정의(定義)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경제학적 정의에서 소비는 탈성장론자들이 줄이거나 금지할 수 있는 외관상 불필요한 자원 사용뿐만 아니라, 영양가 있는 음식, 널찍한 주거지, 보건의료, 보육 등 분명히 필수적인 자원 사용도 포함한다. 비록 모든 개별적인 소비 사례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어도, 보통 더 많은 소비 능력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 소비 증가의 일부는 기존 부의 재분배를 통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데일리에 따르면, [더 많은 소비를 위해] 성장하는 게 바람직하고, 그것이 가능하기도 한 무언가가 언제나 존재한다. [자원을] 재할당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바람과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기술적 해결책을 통해 최대한 평등주의적인 인공지능인 ‘리바이어던’을 만들어낸다고 상상해보자. 리바이어던은 엄청난 초지능과 역량으로, 세계를 통합하고 완벽한 평등주의를 구현한다. 리바이어던은 형언할 수 없는 인공지능 방식으로, 경제 왜곡과 행정 문제가 생기는 것을 피하고 전 세계 78억 인구에게 순자산 360조 달러(약 36경 원)를 분배한다. 그러면 1인당 금액은 포르투갈 성인의 자산 중간값보다 약간 낮은 금액인 약 46,000달러다. 리바이어던은 또한 순세계소득을 분배하여 각 개인에게 연간 약 18,000달러를 할당하는데, 이는 일부 유럽 국가의 중위 소득이다. 리바이어던은 모두에게, 틀림없이 상당한 수준의 부와 소득을 주었다.
세계 시민은 리바이어던이 제공하는 부의 수준을 고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찬성하며, 모든 미래의 성장을 적극적으로 포기하는 정책들을 지지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추가적인 부의 편익은 [경제학의] 한계 개념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미 적절한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더라도, 성장을 통해 더욱 더 번영할 수 있다. 건강수명이 늘어날 수 있고, 아이를 더 낳기로 결정할 수 있다. 현재 수준의 번영을 더욱 확실하게 보장하는 미래가 가능해진다. 생물 의학 연구나 기초 과학의 최첨단 연구개발(R&D)에 추가로 자원을 투입하고, 국가 역량과 필요 충족 과정에 투자를 더 많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모든 한계에 만족하고 성장이 더는 바람직하지 않은 시기가 원칙적으로는 올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이 이미 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실에 눈 감는 것이다.
전통적인 용어로, 경제 성장은 칼도-힉스 효율적인 교환(transaction)이다. 교환으로 이득을 본 사람이 교환으로 손해를 본 사람에게 보상해주기에 충분한 이득을 창출하므로, 잠재적으로 아무도 교환 이전보다 더 나쁜 상황에 놓이지 않고, 상황이 더 나아진 사람도 생긴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GDP 성장이 반드시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모든 경제적 효과가 식별 가능한 것은 아니며, GDP 자료가 경제 현실을 왜곡할 수 있다. 탈성장론자들만 그러한 지표들의 결함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 보고에 쓰이는 공식들은 때때로 자의적인 방법론적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그 결과 GDP는 모든 식별 가능한 경제 활동을 잡아내기에는 너무 한정된 지표가 된다. 더 중요한 것은, GDP 수치에는 정량화할 수 없는 경제 효과가 필연적으로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효과는 인간의 지식으로 설명되지 않거나, 측정 결과나 깔끔한 표현으로 나타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교환은 복잡한 사회-경제 관계의 거미줄에 박혀 있다. 교환은 착취적이고, 해로울 수 있다. 이 글의 논의에서 중요한 점은, 교환은 생태적으로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이러한 수많은 외부효과는 제대로 이해되지 않거나, 심지어 파악조차 되지 않으므로 GDP로 포착할 수 없다.
둘째, 성장이 바람직한지 여부는 정치적 문제며, 그러므로 역사적 문제다. 정치권력의 분배라는 쟁점을 벗어나서 성장이 바람직한지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복지국가주의자들은 성장을 정당화할 때, 더 큰 파이를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방식으로 분배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분배는 정치적으로 결정되고, 종국에는 강요에 의해 결정된다. 과두정치가 친성장 정책을 사전에 정당화하기 위해 복지국가주의 이론을 들고 나올 때에는, ‘동태적 비일관성’(time inconsistency)을 예상해야만 한다. [동태적 비일관성이란 계획이 상황 변화에 따라 뒤바뀌는 것을 일컫는 경제학 용어다.] 즉, 확대된 파이를 재분배하는 일이 끝없이 뒤로 미뤄질 수 있음을 예상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세력의 균형이 재분배를 실현하기에 충분하다면, 모두가 칼도-힉스 효율적 교환에 동의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혁명적 사고(思考)에 있어 가장 중요한 도박이다. 생산력의 자본주의적 발전은 칼도-힉스 효율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혁명세력이] 더 큰 파이를 재분배할 수 있는 미래 권력이 무르익어가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성장은 바람직한 것이다. 성장이 사회를 구성하는 데 미치는 영향과, 성장이 바람직한지에 대해 [구체 현실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즉 몰역사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지나친 일반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성장은 오직 ‘현실에 적용된’ 결과를 통해서만 평가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탈성장 이론은 21세기 환경 위기를 근거로 경제 팽창을 비판한다. 그러나 생태학 밖의 다른 근거도 지나가면서 언급한다. 지금까지, 반(反)소비 도덕 이론을 명확히 하려는 시도는 주로 [탈성장] 프로젝트의 어려움을 드러냈다. 예를 들어, 요르고스 칼리스는 ‘제한의 문화’를 옹호한다. [칼리스가 제안하는 ‘제한의 문화’란 성장에 대한 욕망을 자제하고, 대중이 집단적으로 경제규모를 제한하고 운영하는 개념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제한의 문화’를 따왔다. 칼리스는 ‘제한적’ 자유의 윤리를 중심으로 조직된 집단적 삶을 제안한다. 인간은 욕망을 단련하고, 자만심 때문에 생긴 환상적 욕구와 달리 ‘진짜’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행동을 국한하는 한에서 번창한다. [필자의] 개인적 관점에서, 이 제안은 흥미롭고, 어쩌면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러나 탈성장은 필연적으로 집단적인 일이다. 탈성장은 사회적, 특히 세계적 수준에서 일어날 공산이 크며, 그렇지 않다면 아예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어떠한 탈성장 사례든, 개인의 선호뿐만 아니라 대중의 선택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 제한의 윤리에 따라 사는 것을 선택하는 것과, 그것을 법으로 만들기로 선택하는 것은 별개다. 칼리스는 제한의 철학을 시민이 ‘자주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것이 예언이라면, 이 예언이 맞을 것 같진 않다. 설령 한 개인이 그가 묘사한 엄격한 삶의 설명 일부에 마음이 기울어진다고 해도, 그런 삶이 보편적으로 적용이 가능하다고 선언하고, 국가가 이를 강요해도 환영할 것이라는 생각은 비약이다. 탈성장론자들은 더 설득력 있는 도덕 이론을 한창 만드는 중일 수도 있다. 그들이 그런 도덕 이론을 내놓기 전까지는, 생태학을 벗어난 [도덕적] 주장에 기초한 탈성장 사회전략은 근본적으로 자의적일 것이고, 고도의 강압을 필요로 할 것이다.
무엇을, 얼마나 탈성장시킬 것인가?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개념은 기본적인 타당함이 있다. 탈성장에 관한 논증은 일종의 우주적 관점에서 자주 시작하여, 생태경제학자들이 강조한 지구의 유한성을 언급한다. 데일리가 설명한 것처럼, ‘경제는 더 큰 시스템, 즉 생태권의 하위 시스템이다. 생태권은 유한하고 확장되지 않으며 물질적으로 닫혀 있다.’ 기발한 발상, 사업 수완 또는 정부 투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물리적 현실의 제약(접근 가능한 물질의 비축량, 태양 복사열의 유출입)은 극복할 수 없다. 어느 순간 성장은 끝난다. 그러나 그 시점이 언제인가가 중요하다. 인류의 그 어떠한 행동과도 상관없이, 태양은 언젠가는 적색 거성으로 변하고 지구는 인간이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현재의 현실적-정치적 목적에는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탈성장이 지금 필요하다고 합리화하는 부담은 탈성장 지지자들의 몫이다.
지구상의 생명체가 현대 ‘물질 처리량’의 규모, 즉 ‘자연에서 원료를 추출하고 자연에 폐기물로 돌려주는’ 비율에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 탈성장 논지의 필수적 전제다. 이러한 관점은, ‘경제 성장은 불가피하게 처리량을 증가시킨다’고 본다. 탈성장론자들은 ‘제번스 반등’이라는 역학 때문에, 더 청정한 에너지나 더 효율적인 자원 사용을 통해서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고 보았다. 1865년,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는 석탄 연소의 효율성이 향상되자, 직관에 어긋나게도 석탄 공급 고갈이 가속화하는 결과가 나왔음을 보여주었다. 효율성 향상은 처음에는 석탄 수요를 감소시킨다. 기계 작업 단위당 필요한 석탄 양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 [석탄] 가격이 변동되자, 석탄 소비자들은 이에 반응하여 더 많은 기계 작업(새로운 증기 엔진은 더 넓은 적용 범위에서 비용 효율이 높아졌다.), 따라서 더 많은 석탄을 요구했다. 탈성장론자들은 19세기 석탄 시장에서 일어난 제번스 반등 효과를, 종합적 고려에 따라 문명 차원에서 물리적 물질을 사용하는 것에까지 일반화한다. 기술 진보는 자원을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한다. 같은 작업이나 소비를 더 적은 자원으로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탈성장론자들은 모든 효율성 향상이 [소비] 규모 확대로 상쇄된다고 상정한다. 규모 축소 정책 없이 기술 진보를 통해 물질 처리량을 지속 가능한 수준으로 감소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거시 수준의 반등 효과가 꺾어버린다고 주장한다.
거시경제적 반등 효과는 탈성장 이론이 자명한 진리라고 여기는 것이지, [조사, 연구를 통해] 발견해 낸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반등 효과를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다. 반등 효과가 특정한 효율성 향상에 적용되는지 여부는 경험적 문제다. 일단 보기에 반등 효과는 19세기 석탄 연소의 효율성 향상에는, 적어도 잠시는 적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모든 상황에 적용된다고 믿을 이유는 없다. 예를 들어, 효율성 개선으로 기존과 완전히 구별되는 대체재를 만들어낸다면, 반등 효과는 나타나지 않는다. 석탄 연소 엔진보다 효율이 높은 석유 연료 엔진의 사용이 늘어난 일은 석탄 소비 반등 효과를 낳지 않았다. 적어도 제번스가 설명한 메커니즘과 같은 방식으로는 그렇다. 오히려 별개의 자원인 석유의 사용을 늘렸다. 탈성장론자들은 위 예의 석탄과 석유와 같은, 모든 지구 자원의 공통성을 강조함으로써 이 사실을 회피했다. 모든 자원과 흡수원을 아우르는 ‘물질 처리량’은 대체재가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큰 개념이다. 인간은 물리적 현실을 벗어날 수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도 없다. 하지만 ‘물질 처리량’은 도움이 되는 범주일까, 아니면 단순히 자리 채우기용 용어일까?
추상적으로는, 적어도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인간은 세상에 존재해온 물리적 투입물(자연 자원)과 산출물(재화, 용역, 폐기물)을 가지고 문명의 물질대사나 생산 기능을 수행해왔다고 상정할 수 있다. 오늘날에 비해 1900년의 투입물에는 비례적으로 말, 석탄, 장작이 더 많이 포함되었고, 규소와 탄소 섬유 전구체는 더 적게 포함되었다. 2100년에는 지금보다 말과 석탄은 더 적게, 규소와 탄소 섬유, 그리고 오늘날 거의 사용되지 않는 다른 물질들은 더 많이 사용될 수도 있다. 즉, 이러한 대사나 생산 기능의 구성은 매우 가변적이고 불안정하다. 탈성장론자들은 어떤 구성 단위를 기반으로, 인간의 기술 역사 전반에 걸쳐 서로 전혀 다른 투입물들과 산출물들을 동등하게 취급하는가?
탈성장론자들은 ‘물질 처리량’의 의미를 확실히 고정하기 위한, 신뢰할 수 있는 자원 사용량 측정 방법을 명시하지 않는다. 측정 문제에 직면하면, 그들은 [측정·계산하려는 다른 것을 대표하도록 이용하는] 대용물(proxy)을 언급한다. 어떤 이들은 물질 처리량의 대용물로서 소비 질량(consumption mass), 즉 시간 경과에 따라 소비된 물리적 물질의 중량을 집계한 결과값을 거론한다. 소비 질량은 국내 물질 소비 측면에서, 국가 차원으로 이미 추산되고 있다. [소비 질량을 거론하는] 이들은 이것이 물질 처리량의 대용물로 삼기에 너무 거친 지표라는 것을 인정한다. 활동에 수반되는 질량만으로는 생태에 주는 영향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용물로서 소비 질량은, 수은이 함유된 석탄재 더미와, 퇴비통에 그것과 똑같은 질량만큼 들어 있는 음식물 쓰레기가 생태에 주는 서로 다른 피해를 나타내지 못한다. 이뿐만 아니라, 통계학자의 역량으로 인간의 활동에 영향 받은 모든 발생원과 흡수원을 포착하여, 그 영향을 질량 단위로 식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고 전제된다. 이는 매우 벅찰 뿐만 아니라, 내가 알기로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임무다. 대안적 대용물로는 GDP 성장 그 자체가 있다. 데일리에 따르면, GDP 성장은 ‘총물질 처리량을 파악하는 데 있어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좋은 지표’다. 그러나 이것은 탈성장론자들이 GDP 성장과 물질 처리량 간 ‘동조’에 대한 주장을 할 때, 치명적인 모호함을 초래한다. 이때 탈성장론자들은 물질 처리량에 대해 어떤 대용물을 쓰고 있는가? 대용물이 질량인 경우, 양자 간 관계의 경험적 근거는 신뢰할 수 없다. 대용물이 GDP 성장 그 자체라면, 그 주장은 동어반복이 된다.
이러한 방법론적인 식별성 문제에 더해서, 탈성장론자들은 [탈성장의] 규모라는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그들은 물질 처리량의 증가를 늦추기 위해 GDP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러 다른 형태의 피해들(예를 들어, 알래스카 만의 명태 남획과 아마존 삼림 벌채)을 해결하는 데에 똑같은 양의 처리량 감축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탈성장 체제는 가장 민감한 자연계를 보호하는 데 필요한 임계값까지 처리량을 줄이기 위해 신중해져야 할 것이다. 그 임계값은 얼마인가? 그리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GDP 감축이 필요한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은 언제 탈성장을 시작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가? 성장-처리량 곡선 위에서, 우리가 현재 있는 지점의 기울기는 얼마인가?
이 질문들의 답은 지극히 중요하다. 눈금 매기기에 어떤 식으로든 오류가 생기면 심각한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탈성장 목표를 너무 낮게 잡으면, 인류가 경제 축소에 따른 갈등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여전히 거주 불가능한 황무지가 되어버린다. 탈성장 목표를 과도하게 잡으면, 지구는 인류가 살 수 있는 곳으로 남는다. 그러나 인류,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불필요한 고통을 겪고, 사회적 투자와 과학 발전이 존재하는 대안적 미래를 놓치게 되는 ‘사중손실’이 발생한다. 다시 말해, 문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처리량을 줄여야 한다는 탈성장론자들의 진리를 받아들이자면, 얼마나 감축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탈성장론자들은 권능을 갖춘 민주주의 국가가 식량 공급, 주거, 교육, 투자 및 혁신의 사회적 비용을 부담하고, 재분배, 사적 부의 몰수 또는 통화 정책을 통해 국가의 역량을 강화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조차도 국가는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자원이 필요할 것이다. 강압적인 [국가] 기구 그 자체와, 그 기구의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인력 말이다. 축소되는 경제에서, 국가는 축소된 조세 기반과 더욱 텅 빈 재정, 더 엄격한 공공 금융 제약을 운용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다른 모든 여건이 똑같다면, 매년 경제축소가 심화될수록 국가의 역량은 약해질 것이다. [탈성장] 규모의 중요성으로부터 벗어날 정치적 수단은 없다.
궁극적으로, ‘물질 처리량’은 사고실험에는 쓸모 있는 범주일 수 있지만, 효과적인 환경 정책 결정의 근거로서는 큰 결함이 있다. 처리량을 직접 알아낼 수 없으며, 가능한 대용물들은 의미 있는 실증적 조치가 불가능할 정도로 불충분해 보인다. 탈성장 이론은 규모 문제, 즉 처리량의 임계값과 탈성장의 목표 양자에서 얄팍하다. 탈성장론자들이 [자신들의] 개념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야 자유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이들이 “quod gratis asseritur, gratis negatur”라는 라틴어 격언으로 정당하게 대응할 수도 있다. 이 말은 ‘실체 있는 근거가 없는 자유로운 주장은, 자유롭게 거부될 수 있다’는 뜻이다.
실행?
하지만 방법론적 어려움은 접어두고, 사고실험을 확장해 보자. 탈성장 체제가 물질 처리량을 정확하게 측정하고, GDP와 맺는 관계를 믿을 만하게 모델링하는 수단을 개발했다고 상상해 보자. 탈성장 체제는 명확한 처리량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GDP 감축량을 계산했다. 이 체제는 이제 그 계획을 실행해야 한다. 계획대로 축소를 집행하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경제축소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탈성장론자들은 ‘통제된’ 또는 ‘관리된’ 축소 정책을 주장한다. 경제축소가 신중하게 설계된 상태에서, 사회가 물질 처리량의 최적 수준으로 하향 전환함에 따라, 탈성장 체제는 실업, 노숙, 기아 및 기타 빈곤에 대한 공적 교정 조치를 조율할 것이다. 이 계획의 핵심은 부문 간, 또는 아마도 기업 간 차별에 대한 산업 정책이 될 것이다. 사회적으로 유익한 (따라서 환경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기업은 확장할 수 있는 반면, 해로운 기업은 직접 폐쇄 대상이 될 수 있다. 그 결과 전체 경제가 축소되는 속에서, 일자리, 세수, 혁신 등에 있어 성장이 국한된 단위로 나타날 수 있다. 무엇을 계속해야 할지에 대해 탈성장론자들의 명확한 행정적 제안이 없는 상태에서, 이 체제가 세법을 활용할 수도 있다고 상상해보자. [기업이] 반박할 수도 있는 [기업의] 위해성 추정으로 시작해서, 기업이 순성장을 보고할 경우 가산세를 부과한다. 공익에 기여한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기업은 성장할 자격이 주어지거나, 가산세를 면제한다. 다른 대안으로는, [탈성장] 체제가 정부 기관에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기업을 식별하고, 그런기업을 질서 있는 단계적 축소를 위한 관리 상태 같은 것에 배치할 권한을 위임할 수도 있다.
기업들이 더욱 광범위한 탈성장 정책을 약화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탈성장] 체제는 모든 주요 기업을 관리해야 할 것이다. 각 기업은 공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분류되어 평상시처럼 사업을 계속하도록 허락받거나,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분류되어 단계적 축소의 대상이 되거나 해야 한다. 국한된 폐쇄 후보 몇몇은 이미 알기 쉽다. 탈성장론자들은 석탄 화력 발전을 [폐쇄 대상으로] 언급한다. 마찬가지로, 국한된 성장의 후보임이 명확한 것들이 있다. 획기적인 의료 기술, 새로운 에너지 공급원, 유독성 폐기물 정화 서비스, 어쩌면 탈성장 연구 자체 등이다. 다른 경우들은 [분류하기] 더 힘들다. 예를 들어, 마크 버튼과 피터 서머빌은 건설 산업을 위한 철강과 시멘트 생산을 단계적으로 폐쇄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여기서 단계적 축소 정책은, 친환경 녹색 주택 가격을 감당할 수 없는 저소득층 주택조합이나 노동자들의 저항에 직면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산업과 기업을 분류하다보면, 이러한 맞바꾸기가 흔히 일어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관료들은 실수를 저지르고, 유익한 사업을 접고, 파괴적인 사업을 지원할 수 있다.
탈성장론자들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경제 활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필요는 유한하기 때문에, 이를 충족하는 데 필요한 경제활동도 유한하다고 주장한다. 정부의 과제는 필요 충족 활동을 육성하고, 불필요한 활동을 없애는 것이다. 그러나 탈성장론자들은 인간의 필요에 대해 결정적인 목록을 제공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러한 장부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필요는 독립된 범주가 아니다. 필요는 윤리적 또는 사회적 번영에 따른 다른 조건들에 의존한다. 어떤 꼬리표가 붙든, 어떤 필요들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인간은 식량, 주거, 보건의료, 기본 교육, 다정한 동료 인간들과의 유대관계를 누려야 한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할 수 있다. 여기서 더 넓혀보면, 양심의 자유, 자기표현 역량, 사생활, 적절한 수준의 표현의 자유 등이 있다. 그러나 필요에 기초한 이론은 이러한 권리들을 정의하는 데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모든 보편주의 정치 이론이 이러한 권리들에 대해 동의하고 있다.
어떤 이론이 자기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그 이론의] 경계선을 긋는 데에 있다. 탈성장론자들의 필요 이론은 이 지점에서 부족하다. 필요 충족이라고 정당화되는 성장에 대한 모든 의견 충돌에 대해 말하자면, ‘필요’라는 범주의 경계에 대해 서로 충돌하는 의견이 봇물처럼 쏟아질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탈성장론자는 공공 축제라는 ‘연회’(conviviality)를 주관하는 국가 조직을 제안하고, 이것이 사회적으로 공급되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필요의 충족이라고 철학적으로 합리화한다. 그러나 이 기고문의 필자(아론 반신잔)는 그렇게 정의된 ‘연회의 필요성’이 보편적이지 않다고 거부하며, 그처럼 많은 사람이 모이는 사교, 교화 행사를 피하기 위해 적극적 조치를 취할 것이다. 어떤 사람의 필요는 다른 사람에게는 하기 싫은 따분한 일이다. 일부 이론가는 보편성의 기준을 높게 잡고 필요를 분류하여, 정확히 규정하기 힘든 [필요의] 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안한다. 예를 들면, 기본적인 필요를 신체적 생존, 건강 및 개인 자율성까지로 국한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필요는 행위자들이 ‘다른 어떠한 가치 있는 목표’를 달성하기에 앞서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화 역시, 변호사들은 ‘모호함에 따른 무효’(void for vagueness)라고 부를 것이다. [미국 헌법은 ‘명확성의 원칙’을 따른다. 형벌법규는 범죄의 구성요건과 그 법적 결과인 형벌을 명확하게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 시민이 이해하기에 너무 모호한 규정은, ‘모호함에 따른 무효’로 간주되어 집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심지어 이런 이론가들도, 건강과 자율성에 무엇이 수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할 여지가 있고 뚜렷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탈성장 정책은 안정적인 필요 범주에 따라 논리적으로 진행될 수 없다. 그러한 범주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절차에 대한 탈성장론자들의 주장은 더 부실하다. 이들은 관리된 경제축소가 민주적으로 집행되고, 시민 스스로 소비에 제한을 부과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 이론에 관한 책을 펴보기라도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선언이 불충분함을 알아차릴 것이다. 탈성장론자들은 그들의 민주주의에 대해 어떤 방식을 상상하고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달성할 것인가? 이들은 어떤 제도가 공익을 위한 정책을 내놓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국민투표 민주주의? 민주집중제? 제도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는 상태로 민주주의를 기원하는 것은 공허하게 들린다. 요컨대, 탈성장론자들은 관리된 경제축소를 어떻게 집행할 것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그 과정은 엉망이 될 수 있다.
국내 정책은 시작에 불과하다. 탈성장론자들은 국제적 [탈성장] 조정 문제를 직접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짐작컨대, 필요한 물질 처리량 감축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대형 경제가 축소되어야 할 것이다. 한 나라에서의 탈성장은 시작 단계조차도 안 된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탈성장을 조정하는 것은, 일국 내 조정 과정에서의 문제를 국가 간 정치의 무정부적 역학관계 속에서 재생산할 위험이 크다. 여기에서는 [국가마다] 경제 규모에 따른 군사력으로 무장되어 있다. 모든 국가는 탈성장하는 세계에서 상대적 지위를 극대화하는 것, 즉 다른 국가에 비해 최소한으로 탈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강대국들은 서로를 제약하기 위해 국제 협정, 말하자면 세계 탈성장 협정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다. 협정은 의무 불이행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메커니즘을 포함할 것이다. 협정 회원국은 국가 차원의 경제축소를 측정할 지표에 대해 합의할 것이다. 국가 차원의 통계가 탈성장 계획 일정을 준수하지 못하면, 예를 들면 경제 제재 강화 등의 처벌이 시행될 것이다.
문서상 협정은 이만하면 됐다고 하자. 실천에서는 어떨까? 협정은 대단히 다양한 경제들에 적용할 탈성장 기준을 규정해야 한다. 각국 정부는 이를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재량권을 원할 것이다. 대부분 국가는 ‘공익에 국한된 성장’이라는 탈성장 원칙이나, 특정한 국가 상황을 들먹이면서 자국에 할당된 탈성장 비율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 틀림없다. 무엇이 공익인지 확실한 기준이 없어, 각국 정부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가별로 경제축소를 얼마나 요구할지도, 생태적 목표 달성에 맞춰 최적화되기보다는 강대국들의 의지가 반영된 자의적인 성격을 띠게 될 가능성이 높다.
[협정의] 집행은 여전히 진행 중인 문제다. 국가들이 국가 거시경제 지표를 왜곡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탈성장 협정하에서는 경제 지표를 왜곡할 인센티브가 더 커질 것이다. 각국 정부 부처는 유망한 하급 관리들을 명문대학에 보내서, 장부 조작 능력을 갈고 닦게 할지도 모른다. 각국 정부는 자국의 수치(數値)를 꾸며내고, 다른 국가들의 수치를 면밀히 조사하기 위해 [경제 지표 조작에 대한] 이 전문지식을 활용할 것이다. 협정은 또한 집단적 조정에서 나타나는 고유한 문제인, 의무 불이행에 직면할 수 있다. 탈성장론자들은 상당한 규모의 국제적 재분배가 일어나길 바란다고 하지만, 이는 불충분하게 일어날 수 있다. 그러면 가난한 나라들은 여전히 실업, 노숙, 질병, 기근을 줄이는 데 쓰일 과세 기반이 작은 상태에 놓일 것이다. 이런 나라들에서 고통 받는 주민들이 혁명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혁명으로 수립된] 새 정부는 대중의 요구에 응하여 ‘구체제’의 탈성장 공약들을 수정하거나, 심지어는 탈성장 협정을 전면적으로 거부할 수도 있다. 협정 회원국 중 큰 나라들은 조그만 나라가 협정을 탈퇴하는 것은 무시할 수도 있지만, 주요 국가의 탈퇴를 용인할 것 같지는 않다. ‘국제 탈성장 공동체’의 대응은 신속하고 맹렬할 것이다. 징벌적 탈성장을 외부에서 강요할 것이다.
기후 먼저
이러한 가설들은 세계적 탈성장 정책을 집행하려면 상당한 자원이 필요할 것이며, 심지어 그런 자원이 있다 하더라도 관료주의적 실정과 국제분쟁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만약 이 전략이 문명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라고 해보자. 그러면 방법론적 문제들은 차치하고, 아무리 국내·국제적 탈성장에 행정적 문제가 있다고 해도, 탈성장 전략은 반드시 실격이라고 할 수 없다. 지금이 정말 그런 경우일까?
[탈성장] 지지자들은 인간의 활동이 지구가 수용할 수 있는 능력, 즉 ‘지구 한계’ 안에서 유지되기 위해서는 탈성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보통 지구 한계란 요한 록스트룀과 마티아스 클룸이 제시한 개념으로, 지구 시스템의 작동 과정을 아홉 가지로 분류할 때, 그 각각에서 나타나는 한계를 뜻한다. 이 한계를 넘어서면 지구가 지난 1만 년간의 안정적인 ‘홀로세 같은’ 상태에서, 더는 현대 인간 사회를 지탱할 수 없는 생물물리학적 상태로 전락할 위험이 높다. [홀로세는 약 1만 년 전부터 지금까지의 지질시대다. 빙하기가 끝나고 간빙기에 들어서서 지구가 따뜻해져 인류와 여러 동식물이 번성할 수 있었다.] 록스트룀과 클룸은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손실(즉, 멸종), 성층권 오존 고갈, 해양 산성화, 질소와 인에 의한 오염, 산림 면적, 담수(민물) 사용, 대기 중 에어로졸 부하, 그리고 아직 규정되지 않은 ‘새로운 물질’ 등 각각의 지구 시스템 과정의 한계와 현재 상태에 대한 구체적인 측정 기준을 가능한 한에서 제시한다.
록스트룀과 클룸에 따르면, 인간의 활동이 아직 아홉 가지 한계 모두를 침범하고 있지는 않다. 멸종과 인/질소 오염이라는 두 가지 과정은 안전한 ‘지구 한계’ 선을 넘어 고위험 상태에 있다. 기후변화와 산림 파괴 현상은 위험 증가 단계에 있으며, 한계선을 침범하고 있다. 나머지 다섯 가지 시스템 가운데 네 가지는 아직 지구 한계를 넘어서지 않았으며, 한 개는 아직 규정되지 않았다. 이 방법론에 대해 타당한 비판들이 있다. ‘세계 평균’ 측정 결과 중 일부는 값이 미심쩍다. 록스트룀과 클룸이 세계적 공유자원으로서 [지구] 시스템을 다루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탈성장 전략이 이러한 지구 시스템의 작동 과정에 대해 타당한가다. 탈성장론자들은 대개 자신들의 처방이 모든 시스템을 보호할 것이라고 암시한다. 그러나 그들이 명시적으로 다루는 유일한 지구 한계는, 온실가스 흡수원 역할을 하는 대기의 수용력이다. 탈성장론자들의 명제는 다른 모든 대안 전략과 비교해 봤을 때, 탈성장을 통해서만 인류 문명이 인간에 의한 재앙적인 기후변화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탈성장의 생태학적 근거에서 핵심은 기후 [변화 대응]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약 기후변화의 긴급성을 가장 시급한 환경 문제로 받아들인다면, 다음 질문들을 물어볼 가치가 있다. 첫째, 우리가 다루어야 할 수단과 이용 가능한 지식을 활용하여 기후변화를 해결하는 가장 빠르고 실용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두 번째는 정치적 질문이다. 이런 최소한의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데 장애물은 무엇인가? 수단에 관한 한, 성장을 [명시적으로] 못 하게 하지는 않되 암암리에 제한하는 법적 제약을 두는 체제는 아마도 너무 익숙해서 주목받지 못할 것이다. 자유주의 체제의 시민권과 정치적 권리는 이미 집합적으로 경제 성장을 일으키는 교환을 포함한 사회 활동에 제한을 두고 있다. 일부 사법영역에서는 권리가 환경 영역으로 확장되는데 헌법보다는 법령에 따라 규정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1970년대 초에 통과된 법들은 개인에게 특정 형태의 물과 대기 오염에 인한 피해를 입지 않을 권리를 부여한다. 심지어 멸종 위기종 ‘포획’으로 인해 겪을 수 있는 피해를 입지 않을 권리도 있다. 사실 현존 공민권 체제는 법이 규율하는 범위와 실제 실현 양 측면에서 심각하게 제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들은 [탄소] 배출량을 통제하도록 생태적 제약을 가하는 법제도가 상상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탈성장 체제의 처리 방식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것과 대조적으로, 이 사례들은 이미 실제로 존재한다는 장점이 있다.
최소한의 기후 행동 프로그램에 대해 말하자면, 많은 환경운동가는 주요 배출국들이 다음 조치를 채택해야 한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1. [탄소] 배출량을 감축하게 만든다. 배출량 가격 책정과 직접 규제를 혼합하여 활용하여, 광범위한 화석연료 사용과 기타 온실가스 오염의 주된 원천을 단계적으로 퇴출해나간다. 배출량 가격 책정의 예로는 탄소세가 있다. 직접 규제는 배출량 및 효율성 기준 엄격화, 공유지에서의 채굴·채광·채취 중단이 있다. 효율성도 고려대상이 되겠지만, 정치-경제적 고려사항은 이러한 정책들의 혼합이 어떻게 나타날지는 궁극적으로 다양한 부문별 탈탄소화법, 즉 산업 정책에 크게 달려있을 것이라고 시사한다.
2. 대기 중에 누적된 배출가스를 제거한다. 예를 들어, 공유지 보존의 대대적 확대, 토양 보존법, 탄소 격리 연구와 혁신을 위한 투자 등이 있다.
3. 배출량 감축 노력 중 생기는 혼란을 적어도 상쇄할 수 있는 재분배 정책.
4. 국제 공조. 현 상황에서 이는 필시 배출량 감축에 무역 정책을 연결하는 조약의 형태를 취하고, 기후 행동에서 규제차익[규제가 약한 국가로 기업이 몰리는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을 없앨 것이다. 그러한 조약하에서 부유한 산업화 사회에서 글로벌 사우스[북반구 선진국들보다 남쪽에 위치한 개발도상국들로의 국제적 재분배는 어떤 불충분한 형태로든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조약은 비록 매우 불완전하지만, 다른 현실적인 대안보다 더 바람직할 것이다. 예를 들어, 국제금융통신망(SWIFT) 시스템 조작, 경제 제재와 군사 개입과 같이 제국의 군홧발로 배출량 감축을 강요하는 것보다 바람직하다.
기초 과학 연구에 대한 공공 투자 증가와 더불어, 위 목록은 최소한의 기후 프로그램의 요소가 될 것이다. 이러한 요구들은 필요하지만, (예를 들어, 이런 목표들이 너무 늦게 추구된다면) 불충분할 수 있다. 이것들은 기후 행동에 있어 가장 쉽게 달성할 수 있는 목표다.
탈성장의 처방은 기후 행동과 필연적 관계가 없다. [탈탄소 사회의 경제에] 새로운 균형이 나타나기 전에, 탈탄소화의 결과로 불황이 일어날 현실적 가능성은 의심할 여지없이 있다. 그러나 탈성장 처방을 덧붙이는 것도 경제 재앙을 자초하는 것이다. 평등주의나 사회적 연대에 대한 고려가 최소한의 기후 행동 프로그램을 막을 필요는 없다. 어쩔 수 없이, ‘탄소세는 사회주의가 아니다.’ 토지 보존과 분배 정의 사이에도 필연적 관계가 없다. 그러나 탈성장이 낳을 불황의 트라우마보다는 최소한의 기후 행동이 사회 변혁 프로그램에 더 적합하다.
‘미국의 그린뉴딜’ 지지자들이 제안하듯이, 기후 행동은 혁신적인 사회 정책에 포함될 수 있다. 사실 그린뉴딜의 제안은 야망이 부족한 동시에, 행정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것일 수 있다. 그린뉴딜은 기후 행동으로 인해 발생할 것으로 예측된 사회적 비용을 상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미국 사회에서는 탄소 배출을 보상(補償)하는 것의 긴요성을 훌쩍 넘어서, 심화된 재분배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재분배를 가장 효율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 정책은 이질적인 법률들에 단편적으로 덧붙이는 것과는 반대로, 가장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형태를 취해야 한다. 이는 탈탄소화하는 사회의 사회 정책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최선의 접근법은 공익을 어떤 일반적 기준(세법 내 세율 구조)을 통해 확대하거나, 사회화된 보건의료와 같은 보편적 혜택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 정책과 환경 보호를 분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이유들이 있다.
그린뉴딜은 입법부, 또는 입법부가 미룬 상세한 정책 결정을 하는 관료들이 탈탄소화의 결과를 예상하고, 그 결과를 통화나 현물의 재분배 조치로 적절히 상쇄할 수 있을 것으로 가정한다. 그러한 종류의 예측이 정확하다고 믿을 근거는 거의 없다. 그리고 예측 실패는 많은 사람들에게 대단히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광범위한 보편적 프로그램과는 대조적으로, 환경보호에 재분배 정책을 덧붙이는 것은 [최소한의 조치들이므로] 생태적 영향이 이미 한계적인 기후 행동을 왜곡할 위험도 있다. 왜냐하면, 재분배를 목적으로 [기후 행동에] 덧붙인 모든 정책에는 [기후 행동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매수하기 위한 ‘표심잡기 지출’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기후 행동이] 생태에 미치는 영향을 확대하는 데 쓸 수도 있던 자원이 낭비될 것이다.
재정치화?
기후 행동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든, 탈성장 기술관료주의의 강화든, 승리적 천주교 인테그럴리즘이든 간에 더 광범위한 잠재적인 사회적 변화에 포함될 수 있지만, ‘기후 행동’으로서 기후 행동은 체제 변화를 총체화할 필요가 없다. 최소한의 기후 행동은 원칙적으로 어느 합리적인 자본주의 체제에서든 가능해야 한다. 더 나아가, 어느 합리적인 자본주의 체제 체제든 이 길을 추구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모든 녹색 전략의 형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실은, 실제로는 현존 자본주의 체제가 이렇게 명백한, 그리고 30년 전에는 비교적 부담이 없었던 기후 행동을 거부해왔다는 것이다. 탈성장론자들은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탈성장 지지자들에 따르면, 탈성장은 명쾌하게 ‘환경보호주의의 재정치화’로 향하는 길을 연다. 그러나 사실 탈성장론자들의 정치 분석은 관념적이다. ‘개발 컨센서스’, ‘상상 속의 성장’과 같은 [자신들의] 집단적 관념에 집착한다. 실은 탈성장론자들은 정치권력이나 그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에 대해 거의 논하지 않는다. 그들이 낸 처방은 ‘우리’에게 더 현명하고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살라고 명령조로 촉구한다. 그러나 이는 현재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누가’ ‘누구에게’ 기후 위기라는 짐을 지우는 것인가?
[기후 위기라는 짐을 지게 될 이들, 즉] ‘누구에게’는 수수께끼일 것이 없다. Z세대와 알파세대 청년은 기후 변화와 이와 관련된 정치적 혼란이 커지는 가운데 성인이 될 것이다. 그 결과, 즉 기근, 질병, 강제 이주, 격변과 정치적 폭력이 빈곤층과 글로벌 사우스 지역에 불균형하게 집중되어 벌어질 것이다. 이 위에 부정적 기회비용이 있다. 기후 위기 완화가 비합리적으로 지연된 일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미래의 인류가 자유롭게 쓸 수 있었을 자원을 이미 빼앗아 갔다. ‘미래의 인류’란 범주 자체가 위기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막대한 생명을 빼앗고 사회의 부를 파괴할 기후 변화는, 적절한 시기에 대응책을 시작한 대체우주에서라면 결실을 맺었을 모든 지식과 경험을 인류로부터 박탈할 것이다.
세상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든 자들, 즉 ‘누구’는 어떠한가? 1982년 3월, 미 항공우주국(NASA) 과학자 제임스 한센은 하원에, ‘만약 인류가 현재 속도로 대기 구성을 계속 바꿔간다면’ ‘상당한 기후 변화’가 향후 수십 년 동안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기후 모델들은 ‘기후에 이산화탄소 및 미량 가스(이산화탄소, 오존, 메탄 등 대기를 구성하는 소량의 기체) 증가가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미 연방 정부는 온실 효과에 대해 더 일찍 알았을지도 모른다. 석유 대기업들은 적어도 1960년대 후반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센의 증언이 워싱턴(미국 정부)이 [처음으로] 기후 문제를 통지받았을 때라고 보수적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최소한의 기후 행동 프로그램은 [이때] 이미 가능했다. 일찍이 1974년, 닉슨 행정부의 관료들은 ‘배출에 부과하는’ 피구세라는 보편적 개념을 제안했고,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공학자 데이비드 윌슨은 특히 이산화탄소 배출을 제한하는 세금을 제안하는 의원들과 접촉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바로 뒤집어버린, 오바마 행정부 말기 몇 가지 정책 변화를 제외하면, 미 연방 정부는 체계적으로 [기후변화 대응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1990년 이후로, 미국은 2,000억 미터톤 이상의 이산화산소에 상당하는 온실가스를 배출해 왔다. 직접적인 [온실가스] 배출원으로서 연방정부의 비중은 상당하다. 미군은 세계 그 어느 기구보다도 많은 석유를 사용한다. 미군은 2001년에서 2017년 사이에 12억 미터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했다. 픽업트럭이나 쇠고기 산업과 같이 자주 비판받는 배출원들과는 달리, 군대의 「온실가스」 배출은 어떻게 보아도 비생산적인 ‘부정적 효용’ 활동에 해당한다. 평범한 미국인들에게 아무 원성도 사지 않은 무수한 민간인의 삶을 황폐화하기 위해(많은 경우, 폭력으로 파멸시키기 위해), 납세자들이 낸 수조 달러를 낭비하는 것이다.
기후 위기를 심화시키는 미국의 행태 뒤에는 이 정책 영역을 통제하는 화석연료기업들, 그리고 이들의 무역 협회인 미국석유협회가 있다. 거대 석유기업(Big Oil, 세계 7대 석유회사인 BP, 쉐브론, 에니, 엑슨모빌, 로열 더치 쉘, 토탈에너지스, 코노코필립스를 가리킨다)은 연방정부에 매년 수십억 달러의 직접보조금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뭔가를 하지 않는 형태, 즉 기후 행동을 뒤로 미루는 것을 통해 주는 숨겨진 보조금 에 비하면, 수십억 달러도 작은 것이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 보고서에 따르면 이로 인해 화석연료기업들은 매년 6,490억 달러 어치의 이득을 본다. 이를 고려하면 중국 다음으로 많은 보조금인 1조 4천억 달러가 지급되고 있다. 석유와 가스 이익집단들은 2020년, 선거운동 및 연방 로비에 2억 달러 이상을 지출했다. 이렇게 [대기업들이] 국가 권력보다 우위에 서서 국가 권력을 뒤집어엎는 것은,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라는 이상의 실현이 아니다. 이것은 국가와 거대 자본의 상호침투라는 의미에서, 코퍼러티즘[대기업의 국가 지배]이다.
많은 강력한 이익집단들은 이미 전례 없는 폭풍, 산불, 홍수의 형태로 미국에 당도한 기후 혼란으로 [문명이] 무너지는 쪽을 고집한다. 왜 미국 경제계는 이렇게 오랫동안 거대 석유기업이 국가의 기후변화 정책을 뒤집어엎는 것을 허용해 왔는가? 맨서 올슨의 이른바 ‘집단행동’ 논리가 작용하는 것이 확실하다. 대중이나, 넓은 의미에서 미국 경제계의 다수는 분산되어 있다. 이에 비교하면 집중된 이해관계, 즉 화석연료기업들은 관련된 국가 기구를 조직하고 끌어들이는 데에 장애물이 적다.
하지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역사화할 필요도 있다. 현대 미국에서 환경보호에 대한 반발의 시작은 197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제 석유 파동이라는 맥락 속에서 카터 행정부가 제시한 환경보호법을 의회가 반대하고, 환경보호주의에 대한 공격이 활자화되기 시작한 시기다. 필립 셰비코프의 기록에 따르면, 레이건 대통령 임기, 특히 첫 임기는 ‘재계 지도자들에게는 공세를 펼칠 기회로 인식되었다’. 레이건은 환경문제를 다루는 관료기구를 기업인들과 친기업 이데올로그들로 채워 넣었다. 예를 들어, 트럼프 대통령이 연방대법관 후보로 지명하여 최근 임명이 확정된 닐 고서치의 어머니 앤 고서치는, 기업가 조셉 쿠어스과 에어로젯(미국의 로켓 엔진 제조기업) 홍보 담당 중역, 그리고 엑슨, 제너럴모터스, 쿠어스(미국의 맥주회사)의 사내변호사들의 추천으로 미 환경보호청에 배치됐다. 레이건이 지명한 이들은 환경보호 기관을 약화하고, 1960년대 후반 만들어져 활발히 돌아가던 연방 환경보호조치에 제동을 거는 데 성공했다.
197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종종 ‘장기침체’ 또는 ‘거대한 침체’로 묘사되는 기간에, 다른 영역에서도 대기업이 정치와 지대 추구로 선회하는 특징이 나타났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경쟁력을 잃고 밀려날지 모르는 미래를 피하기 위해서다. 레이건의 세이지브러시 반란, 거대 석유기업들이 기후변화에 대해 고의적으로 일으킨 혼란, 그리고 환경보호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그 외의 여러 싸움터는 이러한 패턴에 부합한다. 거대 석유회사들은 대기를 [석유 산업으로 인한] 공해의 흡수원으로 영원히 자유롭게 사용하기 위해 정치적 수단에 의존한다. 기후 위기는 이런 회사들이 낳은, 사회의 희생이라고 볼 수 있다. 나머지 거대 자본들은 이 과정을 방조했다. 다른 부문끼리 서로 맞서지 않고, 각자에게 정부가 제공한 이권을 안전하게 지키기로 한 미국 대기업 세계의 암묵적인 합의 때문이다.
이 추정이 맞는다면, 탈성장론자들은 [현실을] 거꾸로 보고 있는 것이다. 환경 위기와 기후변화의 구체적 특징은 통제 불능의 경제 활력이 아니라, 그 반대로 경제 침체 [시대의] 정치에서 비롯된다. 탈성장론자들은 광란적 경제 팽창을 사실로 상정하지만, 경제의 활력을 제어할 수 없다거나 풍요가 넘쳐난다는 증거를 찾으러 자료를 들여다 봤자 헛된 짓이다. 탈성장 이론은 아론 베나나프가 비판한 과장된 자동화 담론과 유사하게, 오진에서 비롯한 과장의 한 사례일 수 있다. 이것이 맞는다면, 생태 재앙, 그리고 인류 문명의 미래에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낳는 것을 피하려는 투쟁은, 교정 정책 패키지에 대한 실질적인 의견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생태 영역을 초월하는 일반화된 정치 위기의 일부로서 일어난다. 물론 다른 대규모 공공정책과 마찬가지로, 기후 행동의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요한] 기후 행동의 큰 틀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거대한 질문은 정치 영역에만 남아 있다. 즉, 인류는 어떻게 문명 파괴로 치닫는 세력들을 대체하여,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주체를 바꿀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