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기계제공업화와 태평양전쟁까지, 노동자 민중에 대한 수탈의 강화
소설과 함께 보는 한국 노동자운동 역사: 식민지 시대 ②
1929년 세계 대불황과 식민지 조선의 경제 상황
세계 대불황이 발생한 1920년대 후반, 일본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경제 불황에 직면한다. 우선 일본 자본 내부의 재편이 일어나는데, 중소자본이 불황을 견디지 못해 몰락하고 이들을 인수·합병한 몇몇 거대자본으로의 독점이 발생한다. 그런데 후발 자본주의 국가였던 일본은 열강들처럼 거대한 기존 식민지를 활용한 경제 블록화로 대불황을 극복하는 방식을 채택하기 어려웠다. 이에 일본은 식민지는 식민지대로 더욱 강하게 착취하는 한편 만주나 동남아로 팽창함으로써 대불황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런 조건에서 1920년대 후반부터는 중공업 자본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진출하면서 대규모 기계제 공장이 건립되고 공업화가 추진된다. 조선에서 이와 같은 공업화가 가능했던 것은 1930년대 초반부터 이뤄진 전력개발, 농촌 공황으로 인한 대규모의 노동력공급이 있었기 때문인데, 일본 자본은 값싼 동력원과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자본-임노동 관계를 급속히 이식했고 기계제 공업을 실현했다.
이는 공업 내 업종별 비중의 변화내용을 봐도 확인할 수 있다. 1925년에는 식료품공업이 70%에 달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비중이 줄어들어 1939년에 이르면 22%까지 감소한다. 반면 4.2%에 불과하던 화학공업은 1939년에 이르러 34%까지 증가한다. 금속공업은 같은 기간 6.8%에서 9%로 증가한다. 기존에는 수공업적 성격이 강했던 제사공장에서도 점차 기계화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조선의 공업화가 이뤄지기는 했으나 이는 자본주의의 이식과정에서 일본 자본의 요구에 따라 이뤄진 것이기에 조선 내부적 수요와 생산력의 토대와는 거리가 있었다. 생산재의 생산은 대체로 일본 본국에서 이뤄지고 설비들을 조선에 이식하는 식이었다. 한편 대불황으로 인해 농민의 몰락도 급속하게 진행되었는데, 조선의 기계제 공업화와 맞물려 몰락한 농민이 노동자로 변모하면서 농가 호수는 정체되고 그나마도 노동자로 취업하지 못한 농민은 화전민이 되거나 머슴이 되었다.
1937년 이후 전시체제로의 재편과 식민지 자본주의
식민지 자본주의는 1937년 중일전쟁의 개시를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파시즘화의 길을 걸으면서 일본 국내경제 전반은 군수 및 군수 관련 산업으로 재편한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로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 기지화 정책을 시행한다.
이 시기 공업생산액이 현저히 늘어나 1938년에는 공업생산액이 농업생산액을 능가하게 되었다. 금속공업, 기계기구공업, 화학공업 등 중화학공업의 비중은 1943년에 이르면 49.5%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 이 시기는 경제의 군사화에 복종하는 한에서만 기업활동을 허용함으로써 전시경제체제를 강화했고 조선 경제에 대한 일본의 지위를 더욱 공고하게 했다. (물론 이는 이미 진행되던 경향이었지만 전시에 더욱 심화했다는 의미다.) 일찍부터 일본 자본이 진출해있던 광업의 경우, 1930년대 전반기에는 주로 금광채굴이 활발했지만, 중일전쟁 이후에는 군수용 광물의 채굴도 활발해졌다. (금, 은, 철, 텅스텐, 흑연, 명반석[알루미늄 제련의 원광으로서 개발됨] 등.)
이처럼 식민지 조선은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일반의 발전이 이뤄졌는데, 1941년 이후에는 축소재생산이 일어나고 부분적으로는 생산력의 감퇴가 나타났다. 이는 태평양전쟁 말기로 가면서 물자 조달과 노동력충원이 어려워짐에 따라 나타난 것이었다. 이런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일본은 전시동원체제를 통해 노동자·농민을 비롯한 민중에 대한 수탈을 강화했다. 그런데도 위기는 극복되지 않았고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함으로써 조선은 해방을 맞이한다.
기계제 공업으로의 이행, 「질소비료공장」, 「풍경」
1920년대 후반부터 식민지 조선에서도 기계제 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대공장의 수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1931년 기준으로 대공장이라 할 수 있는 300인 이상 사업장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27%에 달했다. 질적 구성도 변화했는데, 1930년대 후반에 이르면 대다수의 공장노동자가 중화학공업에 종사했다.
이렇듯 양적으로 성장한 중화학공업을 중심적으로 이끌었던 회사는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일질)였다. 그리고 일질이 조선에 진출해 설립한 회사가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였고 흥남에 조선질소비료공장(조질공장)을 설립해 운영했다. 1931년 당시 화학공장 종사자의 약 30%가 조질공장에서 근무했을 정도로 대규모였다. 「질소비료공장」은 이북명 작가가 실제로 조질공장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쓴 소설인데, 당시 공장의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유안직장은 회전하는 기계의 소음과 벨트의 돌아가는 소리로 웅- 웅- 소리가 났다. (…) 유산탱크로부터 보내는 농유산이 포화기의 중간정도까지 찬다. 암모니아탱크에서 유출하는 액체암모니아가 기화기 속을 통과할 때, 냉수에 의해 냉각되어 기체암모니아로 변화하여 12인치 가스파이프로 나간다. 거기에서 압축기에서 밀어낸 공기와 화합한다. 화합한 기체암모니아는 매우 높은 기압으로, 포화기 옆구리의 파이프에서 들어오는 농유산을 비등(沸騰)시킨다. 그러면 흰 우유빛 걸쭉한 액체가 침전한다. 그 침전물은 진공관에 의해 뽑아 올려진다. 그것이 일단 침적조에 쌓인다. 침적조의 비스듬히 밑에 원심분리기가 회전하고 있다. 침적조의 입구를 열면 모액(母液)은 원심분리기의 바스켓 안으로 유입하는 것 같이 되고 있다. 바스켓은 무수한 모세공이 있다. 1분간 800~1000회의 회전수이다. 7분간 급회전하면 유산수는 모세공에서 방출되어 순백색의 유산암모니아가 남는다. 이것이 유산비료이다. 암모니아를 엔드레스까지 운반하는 것은 수송차부의 일이다. 이것은 대단히 힘드는 노동이었다. 쉴 시간은 조금도 없었다. 유산으로 질척거리는 아스팔트 위를 미끄러지면서 유안비료가 만재된 수송차를 엔드레스까지 밀고 가면, 빈 수송차가 거기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밀고 원심분리기의 밑에 오면 이미 바스켓에 생긴 유안비료가 쏟아지는 것이다. 데크(deck)에서 떨어지는 유산의 물방울은 그들의 작업복을 벌집같이 구멍내었다. 그리고 피부가 거칠어지고 아팠다.
조질공장은 매우 열악한 노동조건을 특징으로 했다. 그 중에서도 탄산계, 유산계, 유안계가 가장 열악했는데, 탄산계의 경우 한참 일하고 나면 서로 알아보지 못할 만큼 먼지투성이가 되었고 유산공장의 경우 20분 동안 교대로 작업했는데, 작업 후에는 독한 냄새에 중독되어 얼굴빛이 변하고 기침을 하는 등의 증상을 보였다. 특히 제3유산계는 가장 열악하여 노동자들은 그곳을 ‘살인공장’이라 불렀다. 1936년에 조질공장에서 과로와 위생시설 미비로 병에 걸린 노동자가 8100명, 1년간 사상자 수가 1300여명에 달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산업합리화로 해고다. 유안직장의 예를 들게. 현재 유안직장의 엔드레쓰에는 한 대에 8명이 일하고 있네. 두 대에 16명이다. 그것을 이번에 콤베어라고 하는 최신식 기계로 바꾼다고 한다. 이 콤베어 한 대에는 2명만 있으면 된다. 2대에 4명, 16명 중 4명이 콤베어를 운전하면 남는 12명은 당연히 쓸모 없어진다. 이 12명은 실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소위 산업합리화에 의한 해고라고 하는 것이다.」
《문학평론》(일본잡지) 1935.5.3.
중화학공업을 위한 대규모 기계가 이미 설치되어있는 것에 더해 세계 대불황 이후 산업합리화라는 명목으로 컨베이어 벨트를 설치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처럼 조선에도 기계제대공장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한편 화학공업뿐만 아니라 기계공업 역시 발전하고 있음을 박승극의 「풍경」에 나타나는 철도공장의 모습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준비하라는 일곱시 이십분 전 ’뛰‘가 침침한 이 신흥공업도시의 아침공기를 뒤흔들고 울려 나오자 벤또를 왼편 겨드랑이에 바짝 낀 직공들은 줄을 지어 공장 문에 들어섰다.
여기저기 놓여있는 기계나 창이 옹기종기 포개 놓은 레일과 쇠무시럭이 페인트칠해 놓은 교량(橋梁), 반쯤 만들어진 기관차 이런 것들이 보기에 몹시도 불쾌한 반면에 이제 겨우 벌겋게 솟아오른 아침 햇발이 동편 유리창에 혼란하게 비치어 아른아른하고 있는 것이 퍽 유쾌해 보인다. (…) 요새는 주문들어온 것이 많아서 불밤을 새가며 일을 하게 되는 관계로 직공들의 몸뚱이가 둘이 못된 것이 한일만치 바쁘다. 일주일 내에 객차(客車) 화차(貨車)를 각각 오십 대씩 합계 일백 대와 기관차 열 대를 만들고 교량 일천팔백을 꾸며 놓아야만 된다고 한다.
《신조선》 1936.1.
「풍경」은 이렇듯 바쁘게 돌아가는 철도공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계공업은 생산재를 생산하는 기반공업이다. 앞서 경제개관에서 언급했듯이 일본은 생산재는 본국에서 생산하고 설비를 조선에 옮기는 식이었다. 그런데 철도의 경우에는 중국에서의 전선이 확대되면서 본국에서 조달하는 것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조선에서도 생산하였다. 공업 전체에 대한 기계공업 비중이 1936년 1.0%에서 1943년 5.6%로 증가하는데 중일전쟁이 개시된 1937년 이후의 급속한 성장을 보여주는 수치라 할 수 있다.
대불황과 빈궁한 노동자의 삶, 「총동원」
세계 대불황의 여파는 조선에도 미쳤다. 공장주들은 경제 불황을 노동자에 전가하여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다. 공장주는 노동자들에게 해고위협을 가하고 임금삭감을 종용했다. 이적효의 「총동원」은 대불황기 공장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총동원」의 작자 이적효 군은 모사건에 관련되었다. 다고하야 지금 서대문 감옥에서 반자의 우울한 일월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필자와 나와는 용산서 유치장에서 자리를 같이 한 때가 있었다. 이 소설을 본지에 실어달라는 이군의 청을 나는 받았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은 그와 나와의 사이에 피차의 계선을 그어 논지가 벌써 한달이 지난 이 때 이군의 작품을 열독(閱讀)하니 군의 전용(全容, 모습)이 안전(眼前)에 의의(依依, 어른거리다)하야 마지 않을뿐더러 알지 못할 감개한 흉자(胸字)를 누를 수가 없다.
= 편자 =
우선 작품의 맨 위에는 이와 같은 편집자의 말이 쓰여 있다. 이 소설은 시사평론지 《비판》의 1931년 8월호에 수록되어있다. 《비판》은 주로 사회주의적인 시각에서 사회문제를 다루는 잡지였다. 이적효가 ‘모사건’(조선국내공작위원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것이 1931년 4월이었으므로 이런 편집자의 말이 실렸다.
그런데 원래 돈 한푼 안쓰는 구두쇠로 소문난 김용언이가 어찌하여 오늘 이렇게 많은 사람을 초대하여 놓고 성대한 뱃놀이를 꾸미었는가? 가지가 여러 날 동안 애를 쓰면서 생각하던 복안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 복안이란 무엇? 미국에서부터 동이터져 온세계를 휩싸고도는 공황은 일본천지를 한입에 삼키고 말라빠진 조선땅에도 침래(侵來)하였다. 날마다 파산을 당하는 회사와 상점은 늘어가기만 하나니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농촌으로 눈을 돌이켜 보아라. 그날그날의 먹이가 없어서 굶주리는 빈농이 얼마나 많으며 남부여대하여 정청처없이 떠나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를! 그리고 또한 도회지로 눈을 돌이켜 공장에서 쫓겨나오는 실업자가 얼마나 많은가를! 돈은 자꾸 없어진다. 만든 물품은 값이 떨어진다. 노동자들의 삯전은 자꾸자꾸 떨어진다. 이러한 불경기는 우리 노동자의 생활을 위협하고 있다.
산업합리화, 이것은 불경기를 미봉하기 위한 연극이었다. 이 연극은 수백만 명의 실업자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보아라! 미국을! 독일을! 일본을! 모두 이백만이라는 끔찍한 실업자를 내지 않았는가!
대불황이 조선에까지 밀어닥쳐 노동자들의 생활이 위협받는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곧이어 자본가들은 이러한 시기가 올수록 좋아한다고, 물론 겉으로는 앓는 소리를 하지만 덜 남는 이익을 수천 명의 직공에서 빼앗자는 ‘복안’을 생각해낸 것이라고 말한다. 고무공장주 김용언은 자신의 복안을 똑같이 행하자고 제안하려 전국의 고무공장주들을 초대해 뱃놀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 중에 일부 반대자들은 자신들의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서 수만의 노동자를 괴롭힐 수 없다고 반대의견을 피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이익 때문에 하는 노릇이니 어쩔 수 없다는 반박에 반대자들은 의견을 굽힌다.
「저, 오늘은 모든 것이 원만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내일 즉시로 내공장의 임금을 이할감하(二割減下)하겠다는 발표를 하겠습니다. 물론 고무공업회 이름으로요. 여러분 우리들도 사람인 이상 그리고 돈이 있는 이상 또 그리고 권세가 뒤에서 보호해주는 이상 그까진 직공들이 발악을 한다고 하드라도 못당할 리가 없습니다. 우리들도 우리들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야 동맹파업 같은 것이 일어난다면 그것을 뿌리째 없애버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결단코 그런 것을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다음날 김용언의 고무공장에서는 난리가 난다. 600명의 직공은 불안에 휩싸인다. 김용언은 불경기로 인해 공장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으나 수백에 달하는 직공의 목숨이 달려있으므로 이를 생각해 공장문을 닫는 대신 임금을 깎자고 말한다. 만약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파업을 하거나 한다면 당장이라도 공장문을 닫겠다고 위협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공장장의 이런 협박에 굴하지 않는다.
진필이는 여러 직공 앞으로 나왔다. 여러 직공은 고요해졌다.
「우리들은 속지 맙시다. 불경기, 이것은 자본가들이 쓰는 핑계입니다. 지금 손해본다는 말은 리익을 그 전보다도 못본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아무 것도 없는 노동자입니다. 저들이 하라는대로 하든 시대는 지나간 지 벌써 오래입니다. 우리들의 임금을 깍아서 저들이 덜 보는 이익을 채우려하는 것을 안 이상에는 우리들은 당당히 반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공장문을 닫는다는 위협에 우리들은 두려워하여서는 아니됩니다. 여러분, 이 공장이 이만큼 굉장하게 된 것도 다 우리들의 힘이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임금감하에 반대할 권리를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모여서 그들의 요구 조건을 만들었다. 1) 임금감화 절대 반대 2) 부정검사 즉시 구축 3) 불량품 배상제도 즉시 철폐 4) 연말 상여금 지급 5) 7시간 노동 즉시 실시 6) 여직공 수유시간 자유 7) 산전산후 이주일 휴가 실시. 직접적인 임금삭감에 반대하는 것을 넘어 요구안들이 상당히 진전되어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간 노동자의 불만이 누적되어왔고 이를 받아서 투쟁할 수 있을 정도로 노동조합이 건실하게 조직되어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해석해볼 수 있겠다.
이런 요구 조건을 들고 진필은 직공을 대표해 공장주와 교섭에 나서지만, 교섭은 결렬된다. 모든 직공은 파업에 들어간다. 파업에는 일반 직공들은 물론 정급직공이라 불리는 숙련노동자들까지도 참가했다. 공장주는 정급직공만이라도 회유하려 상여금을 지급하지만 직공들은 거부하고 파업에 동참한다. 이 파업은 김용언의 공장뿐 아니라 다른 고무공장으로 퍼져나간다. 공장주들은 믿던 정급직공마저 파업에 가담하자 경찰서에 호소하는 한편 수천 명의 직공들에 해고장을 보내고 신직공 모집광고를 붙인다. 직공들은 이 소식을 듣고 더욱 분노하여 투쟁에 나서는데, 출동한 경관과 충돌하게 되고 결국 주동자인 진필이 체포된다.
나흘이 지난 뒤이다. 진필이는 석방되어 나왔다. 이천여 명은 진필의 석방을 기뻐하였다.
「나는 몸이 괴로워서 집으로 가야 하겠네.」
진필이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수민이를 보고 말했다.
「몹시 아프거든 가게.」
「여보, 옥정이도 가구려.」
진필이와 옥정이는 집으로 돌아왔다. (…) 진필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 (…)
「우리들이 암만해도 성공 못할 것 같애. 그러니까 차라리 중지하고 요 다음 기회나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옥정이는 조금 물러앉으며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별안간 무슨 소리르 하오. 몇천 명이 생사를 겨누면서 싸오든 것을 중지하자는 말이 웬말이요?」
진필은 체포되었을 때 큰돈을 받고 회유되었다. 옥정은 그런 남편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뛰쳐나온다. 이 일은 파업단에도 알려지고 결국 진필은 경관의 보호를 받으며 도망가게 된다. 그리고 그날 밤, 진필을 포함한 수 명의 장정이 파업 지도부를 습격하는데, 이 때 진필은 옥정을 살해한다.
옥정이를 파묻은 이천여 명은 분개를 참을 수 없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그래도 그들은 굴하지 아니하고 꾸준히 싸웠다. (…) 「우리들이 제출한 요구조건 전부를 들어주지 않을 것 같으면 일할 수 없다.」 그들은 모두들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래서 자본가 측과 파업단 측이 서로 협의한 결과 요구조건 가운데 ‘칠 시간 노동 즉시 실시의 건’만 빼놓고 전부 들어주기로 되었다. (…) 음산한 공장 속에서 일들을 하는 남녀직공 이천여 명 머릿속에는 용감하게 맞아 죽은 옥정의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비판》 1931.8
파업단의 투쟁은 그들의 조직력을 유지하면서 끝까지 투쟁한 끝에 승리로 끝이 났다. 소설 속 모습은, 평원 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이 최초로 고공농성을 한 것으로 유명한 평양 고무공업체 동맹파업을 연상시킨다. 소설과 실제 사건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근거를 찾지는 못했지만, 파업의 전개 양상, 2000명에 달하는 파업단의 규모 등이 매우 유사하다. 참고로 노동자 강주룡을 다룬 소설 『체공녀 강주룡』이 2018년에 출간되기도 했다.
대불황과 농민의 몰락, 박영준 「모범 경작생」
한편 1929년 대불황의 여파로 농가의 경제상황도 매우 악화했다. 특히 쌀값의 하락이 큰 원인이었는데, 1930~1933년 사이의 쌀값은 1925년에 비교했을 때, 거의 절반으로 하락했다. 이 때문에 농가 부채가 증가했고 이를 견디지 못한 많은 자작농이 몰락했다. 농촌은 갈수록 피폐해졌고 몰락한 농민은 만주나 일본으로 이주하거나 도시로 상경했다. 이도 저도 못한 농민들은 국내에서 유랑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다. 앞서 「총동원」에도 잠시 농촌의 상황이 언급된다. ― “농촌으로 눈을 돌이켜 보아라. 그날그날의 먹이가 없어서 굶주리는 빈농이 얼마나 많으며 남부여대하여 정처 없이 떠나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를!”
조선 총독부는 이런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서 1932년부터 농촌진흥위원회를 설치하여 농촌진흥회라는 단위로 촌락의 농민을 조직해 개별 농가의 갱생을 목표로 하는 농촌진흥정책을 실시했다. 대체로 농촌진흥정책은 대불황과 농작물 가격하락이라는 구조적 문제보다는 농민 개인의 품성을 원인으로 간주해 개인의 근검절약을 강조했다. 한편 농촌진흥정책은 중견인물 양성 내지는 자작농 창설을 꾀했는데, 이렇게 육성된 중견인물 내지는 자작농은 농촌에서 식민정책을 정당화하는 주체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박영준의 「모범경작생」은 식민지 권력에 충성하는 중견인물을 비판하고 가난한 농민의 삶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함께 살펴보자.
길서는 그 마을에서 가장 칭찬을 받는 사람이다. 물론 사촌 형 뻘이 되면서도, 기억이 같은 몇 사람은 길서를 시기하고 속으로는 미워까지 했으나, 동네 전체로 보아 소학교 졸업을 혼자 했고, 군청과 면사무소에 혼자서 출입하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에게도 지지 않을 이만큼 동네 사람들을 가르치며 지도했다. 나이 젊은 사람으로 일을 부지런히 해서 돈도 해마다 벌며, 저축을 하여 마을의 진흥회니, 조기회니, 회마다 회장을 도맡고 있는 관계로 무식하고 착한 농부들은 길서를 잘난 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길서는 농촌진흥정책이 양성하고자 한 중견인물이다. 혼자 소학교를 졸업했고 돈도 잘 버는, 그래서 진흥회 등의 회장을 맡은 길서다. 사람들은 시기하면서도 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길서의 논에는 ‘모범경작’이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길서는 당시 일본의 농촌진흥정책을 시행하면서 만들어놓은 인물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설정되어있다. 이런 자세한 묘사는 당대의 비평가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길서네만 내놓고는 전부가 소작으로 사는 그들이 여름철에는 보리밥도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는 터에 사이쯤은 물론 생각도 못했다. (…) 「그런데 금년엔 나두 길서네처럼 금비를 사다가 한 번 논에 뿌려 보았으면……. 길서는 밭에다 조합 비료래라…… 암모니아를 친대……. 그것을 한 번 해 보았으문 좋겠는데……」 하고 성두가 말할 때, 진도 아비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말 말게, 골메(동네 이름)서는 누가 돈을 빚내다가 그것을 했다는데 본전두 못 빼구 빚만 남었다네.」
길서를 제외한 나머지 농민들은 전부가 소작농이다. 그들은 가난해 비료도 쓰지 못하는 처지다. 1926년~1929년 사이에 자작농은 3.3%가 감소했는데, 1930년~1933년 사이에는 7%가 감소했다. 자소작농의 경우 같은 시기 각각 1.1%와 18.5%로 두 시기 사이에 감소 속도가 큰 폭으로 증가했다. 한편 소작농은 같은 시기를 비교했을 때 각각 7.5%, 17.2%가 증가했는데, 대불황을 계기로 자작농은 급감했지만, 소작농은 급등한 것을 알 수 있다.
「제가 강습회에서도 가장 많이 물은 일입니다마는, 우리가 제일 깨달아야 할 것이 하나 있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가장 어렵고 무서운 시국이라는 것입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죽을 죄를 짓기 쉽고, 일을 아니 하고 놀랴고만 생각하면 농사도 못 짓게 됩니다. 불경기(不景氣) 불경기 하지만 이것이 얼마 오래 갈 것이 아니며 한 고비만 넘기면 호경기(好景氣)가 온다는 것입니다. 들으니까 요사이에 감옥에 가장 많이 갇힌 죄수들은 일하기가 싫어서 남들까지 일을 못하게 한 놈들이래요. 말하자면 공산주의자라나요. 공연히 알지도 못하고 그런 놈들의 말을 들었다가는 부치던 땅까지 못 부치게 될 것이니 결국은 농군들에 손해가 아니겠소.」
듣고 있던 사람들은 길서의 얼굴만 쳐다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또 무슨 전쟁이 일어날 것도 같습니다. 하라는 일을 아니 하면 우리가 어떻게 될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같은 값이면 마음 놓고 하라는 일을 잘 하며 살아야 하겠어요. 에--- 우리는 일을 부지런히 합시다. 그러면 굶어 죽는 법이 없으니깐요. 유명하게 된 사람들은 전부 부지런했던 덕택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지 않습니까!」
길서는 소작쟁의와 같은 것을 공산주의자들이나 하는 것이고 결국 농민들이 손해를 본다면서 어려운 시국일수록 부지런히 일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길서는 흉작이 들어 소작료를 감해줄 것을 지주에게 요청해 달라고 부탁하는 마을 사람들의 청을 거절한다. 자기와 관계도 없고 그런 요구는 소작쟁의와 같다는 이유였다. 그 와중에 길서네 논만은 “평양 가서 북어 기름을 통으로 사다가 쳤기 때문에” 작년보다도 더 잘되었다. 하는 수 없이 농민들은 지주를 직접 찾아가 소작료 인하를 부탁하지만 지주는 그러면 땅을 빼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런데 “세금 못 낸 사람을 잘 치기로 유명한” 면서기가 길서에게 마을의 보통학교 증축이라는 명목으로 집마다 징수되는 지방세인 호세를 인상해야겠다고 말한다. 마을의 대표인 길서만 동의하면 세금을 인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길서는 호세 인상에 반대하면 면서기가 자신의 뽕나무 묘목을 사주지 않을 것이며, 도에서 사람을 뽑아서 보내는 일본 시찰도 어려워질 것으로 생각한다. 결국 길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호세 인상에 동의한다. 이 때문에 농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지게 되는데, 길서로 인해 세금이 올랐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더는 그를 곱게 이야기하지 않게 된다.
길서 때문에 동네를 떠나야겠다는 오빠의 말을 들은 의숙이도 눈물을 흘리며 길서가 그렇지 않기를 속으로 바랐다. 길서는 일본서 돌아올 때 우선 자기 논두렁에서 가슴이 서늘함을 느겼다. 논에 박은 「김 길서」라고 쓴 말패는 간 곳도 없고 「모범경작」이라고 쓴 말뚝은 쪼개져서 흐트러져 있었다. 심술궂은 애들이 장난을 했는가 하고 생각하려 했으나 그 한 짓으로 보아서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동네에 들어섰을 때 동네에는 어른이라고 한 사람도 찾아 볼 수 없었다. (…) 뒤에서 몽둥이를 들고 따라오던 사람의 숨소리를 듣는 듯 가슴이 떨리었다. 불길한 징조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성두가 충혈된 얼굴로 아랫문으로 뛰어 들었을 때 길서는 들고왔던 바나나를 들고 뒷문으로 도망쳤다.
《조선일보》 1934년 신춘문예 당선작
결국 이주를 생각해야 할 정도로 궁핍해진 농민들이 면사무소로 몰려간다. 동네에 어른들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길서에게도 찾아온다. 그렇게 농민들을 배신한 길서에 대항하는 농민과 길서가 도망가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처럼 「모범경작생」은 대불황으로 인한 농촌의 궁핍한 현실을 보여주는 한편 농촌진흥정책의 무용성 내지는 부작용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전시동원체제, 홍구범의 「농민」, 계용묵의 「바람은 그냥 불고」
1941년 태평양전쟁이 개시된 이후 일본은 전시동원체제를 통해 노동자 민중에 대한 수탈을 강화한다. 노동력을 강제동원하는 한편, 농업에서도 공출제, 통제가격을 실시하면서 수탈을 강화한다. 이런 과정에서 특히 농민의 경우 일부 대지주를 제외한 농민 일반의 몰락이 나타났다. 다음에 살펴볼 홍구범의 「농민」은 전시동원체제하 농민의 삶을 잘 보여준다.
「농민」의 주인공은 순만이다. 순만은 돌도 지나기 전에 아버지를 잃었다. 홀로 살기 어렵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재가하지만, 의붓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린다. 순만도 곁에서 함께 학대받는다. 일곱 살이 되던 해 어머니마저 여의고 집에서 내쫓긴 순만은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도는 삶을 산다. 그러던 중에 버들골이라는 마을에서 머슴살이하게 되는데, 그 집 주인의 딸 복순과 야반도주를 하여 충주 근처의 작은 마을에 토막을 지어 살림을 차린다. 이곳은 고장에서 제일가는 부자인 양 씨가 사는 곳과 얼마 떨어지지 않아 땅이라도 얻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있기도 했다.
양씨네 세력은 혀를 딱딱 벌릴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 물자부족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은 죽지 못해 사는 판이건만 오직 양씨만은 이러한 통제기관을 모조리 도맡아 영리를 취하였다. 식량영단의 이 고장 이사장 심지어는 설탕이나 고무신 같은 배급품까지도 이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일반에게 돌아가지 않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확보하게 되어 전쟁이 끝날 임시에는 도평의원에까지 승진하게 되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상전이었다.
양 씨는 전쟁에 비행기를 헌납한 뒤에 그 사업이 날로 번창해 군수, 경찰서장 등과도 교류하면서 그의 사업을 불려갔다. 반면 양 씨네와 그 주변을 제외한 나머지 농민들은 물자부족으로 죽지 못해 사는 열악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던 와중에 전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이에 따라 징용이 점차로 확대된다.
전쟁은 나날이 심해갔다. 징용장이 방방곡곡을 휩쓸어 날았다. 중국에다 겹쳐 미국과도 전쟁이 벌어진 뒤부터는 더욱 이러함이 심했다. 농부들은 열 사람에 다섯 여섯 사람은 대개가 일본 탄광이나 군수공장으로 끌려갔다. 이에 반항하거나 피한다면 징역을 보냈다. 서슬이 시퍼런 그때에, 식민지 조선의 인민은 그저 떨기만 하였다. 죽지 모해 사는 형편이었다. 어디든 가라고 하면 가야 되었다.
양 씨네 집안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처리해주던 박 서방에게도 징용장이 날아온다. 양 씨는 믿고 일을 시킬만한 박 서방이 징용에 끌려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고 읍사무소를 찾아가 박 서방 대신 순만을 징용 보내는 계략을 꾸민다. 결국 박 서방 대신 순만이 징용을 가게 되는데, 징용을 보내면서 양 씨는 순만에게 임신한 복순을 잘 보살펴준다고 약속한다. 며칠 후 순만은 징용을 떠났다.
그는 시키는 대로 꾸벅꾸벅 일을 하였다. 추운 겨울에도 굴속으로 들어가라 하면 벌거벗고 살이야 얼어 터지건 말건 흙탕물 속에서 돌과 흙을 건져내기도 하였으며, 석탄을 실은 궤짝에 매달려 공중을 날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러함을 자기의 생활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나 아내와 어린 것을 하루바삐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곧 그의 생활 전부였을는지도 모른다. (…) 그런 중에 그는 어느 날, 일을 하다 그만 왼편 팔을 석탄 파는 기계에 치이고 말았다. 병원에 실려가서 며칠 치료를 받다가 종당엔 팔을 아주 잘랐다. 영원한 불구자가 되어버린 그는 한 달 동안은 병석에 누툰 채 서러움을 물리치지 못했다. (…) 이런 중, 별안간 뜻하지 않은 해방이 되었다. 일본이 전쟁에 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날 즉시로 석탄 채굴은 중지되었다.
《문예》 창간호, 1949년 8월.
순만은 치료를 받고 남들보다 한 달 정도 늦게 고향에 도착해 자신의 토막을 찾아간다. 그러나 토막은 곳집(상여와 그에 딸린 여러 도구를 넣어 두는 초막)으로 바뀌어있고 순만의 아들은 옆집 택이에게 맡겨져 있었다. 택이는 복순이 순만이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박 서방과 새살림을 차리라는 양 씨에게 반항하다가 맞아 죽고 말았다고 말해준다. 택이는 또 해방 후 양 씨가 공산패에 가입해 완전 딴판이 되었다고도 말한다. “쏘련에게 붙어 나라가 들어서면 농부들이 지금보다 잘 살 수 있다”고 연설하는 한편 자기들에게도 고맙게 군다는 것이다. 순만은 그 말이 뭔지는 몰랐지만 일단 죽은 복순에 대한 도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양 씨를 만나러 간다. 양 씨는 순만을 보고 그에게 먹을 것을 꾸준히 줄 테니 안심하라고 말하는데, 순만은 그 말에 분노하여 재떨이를 양 씨에게 던진다. 양 씨는 놀라 쓰러졌을 뿐이지만 그것에 맞아 죽었다고 착각한 순만은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면서 목을 매어 자살한다.
이 작품은 먹고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던 순만과 기회주의적으로 태세를 전환하며 남들보다 상전으로 살아가는 양 씨를 대비하면서 당대 농민들의 비참한 삶과 사회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농민」은 주인공의 자살로 끝을 맺음으로써 전망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적이지만 당시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성취가 있다고 평가받는다.
홍구범의 「농민」이 태평양 전쟁기 농민의 비참한 삶과 징용을 그리고 있다면 계용묵의 「바람은 그냥 불고」는 징병과 관련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계용묵의 「바람은 그냥 불고」는 잘 짜인 구성과 정확한 묘사에서 일정한 성취를 이룬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소설은 해방 후 시점을 배경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태평양전쟁에 휘말린 민중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어 선택했다. 소설 속에는 태평양전쟁에 징병된 후 전쟁이 끝났으나 돌아오지 않은(못한) 진수, 아들 진수를 제 손으로 징병 보낸 뒤 우여곡절 끝에 화병으로 죽고 마는 선달, 남편인 진수의 생사를 확인조차 할 수 없는 순이, 식민지 시기 친일 행각을 벌였음에도 여전히 잘살고 있는 박영세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祝 金鎭秀君 入營’(축 김진수군 입영)이라는 면장의 글씨로 정성껏 씌어진 붉은 다스끼를 가슴에다 걸고 눈썹 위까지 푹 눌러쓴 사각모를 차창으로 내밀어 플랫폼에 선 어머니와 자기를 말없이 번갈아 바라보던 첫혈된 두 눈, 이윽고 차가 바퀴를 움직이기 시작할 때 와아 하고 아들을, 손자를, 동생을, 남편을 보내는 가족들의 마지막으로 모습이나 한 번 더 다시 보리라는 죄어드는 분비 속에 붉은 다스끼들이 창턱마다에 가슴을 걸고 내미는 손 가운데는 그이의 하이얀 손도 자기의 눈앞에 있었다. 저도 모르게 쭈룩 흘러내리는 눈물이 뺨 가에 뜨거움을 느끼며 저도 말없이 손을 내밀어 그이의 손안에 가만히 넣을 때 따스한 온기가 꽉 부르쥐는 힘과 함께 뼛잠까지 스며드는 듯하던 생각, 차 안의 손과 차 밖의 손이 서로 붙들고 늘어진 무수한 손들, 놓으면 다시는 잡아 볼 수 없는 손 안에 사무친 정이 서로 끄는 손들은 굴러나가는 차바퀴에 따라 저절로 당기어 진다. 그이의 손안에 감기운 자기의 손도 으스러지게 팽팽히 당기웠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손끝에 힘을 주어 그이의 손가락을 자기도 감싸쥐고 쫓아가며 쫓아가며 여유를 주는 것이었으나 속력을 내기 시작한 차체의 힘과는 저항이 되지 않는다. 마침내 뻐드러져 나가던 손, 뻐드러져 나간 손들은 차 안에서나 차 밖에서나 서로들 두르며 두르며 떠나는 정과 보내는 정을 잇(續[속])는다.
《백민》 1947년 7월호.
선달의 외아들 진수는 태평양전쟁에 징병되어 전쟁터로 간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지 2년이 넘도록 진수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무당이 반드시 돌아온다고 했던 해의 마지막 날, 순이는 기차역에 가서 남편인 진수를 기다리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 박영세를 보게 된다. 영세는 권세 있는 가문의 자제로 경도 제대 경제학부까지 졸업한 선망의 대상이다. 그런데 영세는 모두가 하지 않는다고 버티던 창씨개명을 솔선하여 했고, 징병되지 않으려 숨어있던 진수를 끌어내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시국 강연이라는 명목으로 학병지원을 종용한 연사 중에 영세가 끼어 있었고, 그의 설득에 선달은 진수의 징병소집장에 도장을 찍었다. 그러나 숨어있던 학생 중 일부가 적발되어 징용장을 받기도 했으나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고, 설사 징용되어도 그것이 전쟁터보다는 낫다는 걸 깨달았을 때, 선달과 순이는 영세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진수는 집안의 기둥이었다. 집안의 재산을 털어 그를 교육했고 학병으로 가던 해에는 집문서도 금융조합에 끌려 들어갔다. 어느새 남은 돈이 다 떨어지고 선달은 그가 자부심 가지던 집을 팔 수밖에 없었다. 선달은 박구장이라는 중개인을 통해 집을 팔아 사는 이가 누군지 까지는 모르고 매매계약을 체결한다. 그런데 계약 후에야 그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바로 영세였음을 알게 된다. 영세는 법이 서게 되면 닥칠 토지개혁에 대비해 토지를 미리 처분하고 동생들도 분가시키려는 목적으로 집을 구매한 것이다. 이 속셈을 알게 된 선달은 영세를 찾아가 집 계약을 무를 것을 요구하면서 진수가 전쟁터에 나간 원망을 쏟아 낸다. 그러던 중 결국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죽게 된다.
「바람은 그냥 불고」는 학도지원병에 끌려가 소식이 끊긴 진수, 남겨진 선달과 순이를 통해서 전쟁의 비극을 보여준다. 동시에 친일로, 그리고 서울에서 얻은 여러 정보로 기회주의적인 삶을 사는 영세를 대비시켜 현실의 모순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식민지 시대의 여성 노동자, 강경애 「인간문제」
식민지 시대 민중들이 겪을 수밖에 없던 여러 억압에 대해서 살펴봤다. 그런 억압들에 더해 여성은 성적 폭력에도 노출되어 있었다. 강경애의 「인간문제」는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인간문제」는 농촌인 용연마을에서의 이야기와 도시인 인천에서의 이야기 두 부분으로 나뉜다. 장편소설이기에 분량이 상당하지만 그만큼 각 등장인물과 관련한 이야기가 상세하게 그려지고 있어 당대의 시대상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이 글에서 짧게나마 살펴보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일독을 권한다.
「인간문제」는 용연마을의 커다란 연못인 원소(怨沼) 전설로 시작한다.
이 산등에 올라서면 용연 동네는 저렇게 뻔히 들여다볼 수가 있다. 저기 우뚝 솟은 저 양기와집이 바로 이 앞벌 농장 주인인 정덕호 집이며, 그 다음 이편으로 썩 나와서 양철집이 면역소며, 그 다음으로 같은 양철집이 주재소며, 그 주위를 싸고 컴컴히 돌아앉은 것이 모두 농가들이다.
그리고 그 아래 저 푸른 못이 원소(怨沼)라는 못인데, 이 못은 이 동네의 생명선이다. 이 못이 있길래 저 동네가 생겼으며, 저 앞벌이 개간된 것이다. 그리고 이 동네 개 짐승까지라도 이 물을 먹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 못은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 무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동네 농민들은 이러한 전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 전설을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으며, 따라서 그들이 믿는 신조로 한다.
그들에게서 들으면 이러하였다―
옛날 이 원소가 생기기 전에, 이 터에는 장자 첨지가 수없는 종들과 전지와 살진 가축들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첨지는 하도 인색하여서, 연년이 추수하는 곡식을 미처 먹지 못하고 곡간에서 푹푹 썩어나도 근처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할 생각은 고사하고, 어쩌다 걸인이 밥 한술을 구걸하여도 그것이 아까워서는 대문을 닫아 걸고 끼니도 끓여 먹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몇 해를 거듭하여 흉년이 들어서 이 동네 사람들이 모두 굶어 죽게 되었을 때, 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장자 첨지에게 애걸을 하였다. 그러나 첨지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나무라고 문간에도 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몰래 작당을 하여 가지고 밤중에 장자 첨지네 집을 습격하여 쌀과 살진 짐승들을 끌어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며칠 만에 장자 첨지는 관가에 고소장을 들여 이 근처 농민들을 모두 잡아가게 하였다. 그래서 무수한 악형을 하고 혹은 죽이고 그나마는 멀리 쫓아 버렸다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혹은 아들 딸을 잃어버린 이 동네 노인이며 어린것들은 목이 터지도록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며 혹은 아들과 딸을 찾으며 장자 첨지네 마당가를 떠나지 않고 울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울고 울고 또 울어서 그 눈물이 고이고 고이어서 마침내는 장자 첨지네 고래잔등 같은 기와집이 하룻밤 새에 큰 못으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그 못이 즉 내려다보이는 저 푸른 못이다.
원소에 얽힌 전설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이라는 작품 전체의 주제를 예시하고 있다. 이는 제목과도 통하는데, 바로 이 대립이 인간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인간 문제’다. 원소 전설 속 장자 첨지는 우뚝 솟은 양기와집의 정덕호로, 나머지 동네사람들은 컴컴하게 앉은 농가로 현재까지 여전히 그 대립은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은 주인공 선비, 간난이, 첫째, 지주인 정덕호, 그의 딸인 옥점, 옥점이 짝사랑하는 신철 등이다. 선비는 여성으로, 정덕호로 인해 부모를 모두 잃고 그의 시종이 되어 덕호의 집에 얹혀살게 된다. 덕호는 아들을 가져야 한다는 일념으로 여러 첩을 두었는데, 첩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 가차 없이 쫓아냈다. 선비의 친구 간난이도 이런 덕호에게 반강제적으로 정조를 잃게 되고 그 집을 도망쳐 나와 서울로 간다. 덕호의 마수는 선비에게까지 뻗쳐 선비도 결국 겁탈당하게 된다. 이후 덕호는 선비의 방에 들락이게 되고 선비가 임신했다고 착각하여 그녀에게 잘해준다. 이를 보다 못한 덕호의 아내는 선비를 내쫓는다. 쫓겨난 선비는 간난이를 찾아 서울로 간다.
신철은 경성제국대학을 다니는 학생으로 옥점이 짝사랑하는 남자다. 옥점은 그를 한사코 잡아 아버지인 덕호의 집에 함께 두어 달을 머무르게 된다. 신철은 옥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고, 외려 집에 머물면서 선비의 예쁜 외모와 성실함에 반하게 된다. 그렇지만 신철은 선비에게 제대로 말도 붙여보지 못한 채로 서울로 돌아오고 그녀를 그리워한다. 서울로 돌아온 신철은 이미 마음속에 선비를 품게 되어 옥점과의 혼인을 거절한다. 이 혼인을 강요하는 아버지와 크게 싸운 뒤 가출한다. 가출한 뒤 신철은 친구들에게 돈을 받아 사는 생활을 전전하다 그중 한 친구의 소개로 인천에서 노동하게 된다. 신철은 평소 노동하기를 원했고 노동자의 참동무가 되기를 원했다. 드디어 노동을 실제로 하게 되었지만, 경험이 전혀 없던 신철이 감당하기에 노동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그는 하루 나갔다가 좌절하여 며칠을 쉬는 삶을 반복하며 번민한다.
첫째는 선비의 어머니가 아플 때 약초를 가져다주기도 하는 등 용연마을에서 살 때부터 선비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는 배우지 못한 농민이지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대립을 인식하고 덕호에 반항하다가 소작을 떼여 도시로 가 노동하는 인물이다. 도시에서 노동하던 중 신철을 만나 각성하게 된다.
주요 등장인물에 대해서 살펴봤다. 등장인물의 소개는 대체로 선비가 농촌을 떠나는 시점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것인데, 대체로 선비를 제외한 주변의 인물들은 농촌시절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만큼 소설은 농촌에서의 이야기가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선비가 인천으로 간 이후에는 선비의 공장생활을 그리는 데 좀 더 집중된다. 지금부터는 선비가 방적공장에서 겪는 이야기들을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
밤늦게 돌아온 간난이는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선비를 보며 생긋 웃었다.
“빈대 물지 않니?”
“왜 안 물어, 물지…… 어데를 갔었니?”
“나, 저게…… 누가 좀 만나자고 해서.”
간난이는 나들이옷을 훌훌 벗어 벽에 걸고 나서 선비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이애, 지금 인천서는 말이야, 아조 큰 방적공장이 낙성되었는데 그곳에는 지금 내가 다니는 방적공장과 달리 여직공을 많이 쓴다누나…… 근 천여 명의 여직공을 쓴대…….”
선비는 눈졸음이 홀랑 달아났다. 그리고 빛나는 눈에 이상한 광채를 띠었다.
“난 그런 곳에 못 들어갈까?”
“들어갈 수 있지…… 나두 그리로 갈 생각이다! 우리 둘이서 그리로 가자…… 응 선비야.”
간난이는 생긋 웃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매만지며 빠져나오려는 핀을 다시 꽂는다. 멍하니 바라보는 선비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간난이에게서 들었던 방적공장의 온갖 기계들이 얼씬얼씬 나타나 보이었다.
“내가 그런 것을 할지 몰라…… 그러다 잘못하면 내쫓나?”
간난이는 선비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가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무섭고 부끄럽기만 하던 생각을 하였다.
“왜 네가 그런 것을 못 하겠니, 배우면 잘 할 터이지…… 너만 못한 애들도 많이 들어와서 배워나면 곧잘 하더라야. 걱정 마라.”
선비는 한숨을 가볍게 쉬었다. 그리고 웃었다.
“그래서 선비야! 난 오늘 방적공장을 나오기로 했단다…….”
“그럼 언제 가니?”
“곧 가지…… 그런데 볼일이 있어 아무래도 한 이틀은 지체될 듯하다.”
간난이는 아까 태수가 전해 주던 밀령을 다시금 생각하며, 유신철이…… 인천부 사정 오번지 하고 외워 보았다.
“빈대 물지 않니?”
“왜 안 물어, 물지…… 어데를 갔었니?”
“나, 저게…… 누가 좀 만나자고 해서.”
간난이는 나들이옷을 훌훌 벗어 벽에 걸고 나서 선비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이애, 지금 인천서는 말이야, 아조 큰 방적공장이 낙성되었는데 그곳에는 지금 내가 다니는 방적공장과 달리 여직공을 많이 쓴다누나…… 근 천여 명의 여직공을 쓴대…….”
선비는 눈졸음이 홀랑 달아났다. 그리고 빛나는 눈에 이상한 광채를 띠었다.
“난 그런 곳에 못 들어갈까?”
“들어갈 수 있지…… 나두 그리로 갈 생각이다! 우리 둘이서 그리로 가자…… 응 선비야.”
간난이는 생긋 웃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매만지며 빠져나오려는 핀을 다시 꽂는다. 멍하니 바라보는 선비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간난이에게서 들었던 방적공장의 온갖 기계들이 얼씬얼씬 나타나 보이었다.
“내가 그런 것을 할지 몰라…… 그러다 잘못하면 내쫓나?”
간난이는 선비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가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무섭고 부끄럽기만 하던 생각을 하였다.
“왜 네가 그런 것을 못 하겠니, 배우면 잘 할 터이지…… 너만 못한 애들도 많이 들어와서 배워나면 곧잘 하더라야. 걱정 마라.”
선비는 한숨을 가볍게 쉬었다. 그리고 웃었다.
“그래서 선비야! 난 오늘 방적공장을 나오기로 했단다…….”
“그럼 언제 가니?”
“곧 가지…… 그런데 볼일이 있어 아무래도 한 이틀은 지체될 듯하다.”
간난이는 아까 태수가 전해 주던 밀령을 다시금 생각하며, 유신철이…… 인천부 사정 오번지 하고 외워 보았다.
덕호에게서 도망쳐 서울에 도착한 간난이는 방적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간난이는 태수라는 사람을 통해 의식화가 이루어졌는데, 간난이는 인천 방적공장에서도 선비에게 각종 통제와 저금 등으로 임금을 감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이틀 후에 인천으로 내려온 간난이와 선비는 우선 간난이가 공장에서 사귄 어떤 동무 집에서 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동무의 주선으로 대동방적공장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경찰서에서 신원보증까지 헐하게 맡게 되었다. 동시에 대동방적공장에서는 사숙을 허하지 않고 전 여공을 기숙사에 수용한다는 것이 한 철칙이 되어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내일은 세 동무가 일시에 기숙사로 들어가기로 생각을 하고 월미도로, 만국공원으로 해가 질 때까지 돌아다녔다.
대동방적공장은 3년 계약이었으며 그동안은 기숙사에 수용되어 면회도 금지되었다. 경찰서에 신원보증을 하고 들어온 것은 3년 계약기간 안에 도망갈 때 도망간 노동자들을 잡아 오기 쉽게 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 밤을 자고 난 세 동무는 드디어 대동방적공장 안에 있는 기숙사로 들어오게 되었다. (…) 우선 기숙사며 공장은 내놓고라도 그 안에 설비된 온갖 기계가 서울서는 보지도 못하던 것이었다. 대개 발전기라든가 제사기라든가 흡사한 것이 일부일부에 없지는 않으나 서울의 것보다는 아주 대규모적이었다. (…) 서울 공장에서는 이 사기바늘이 한 개 아니면 혹 두 개까지는 있었으나 이렇게 수십 개씩 되지는 않았다. 간난이는 세 개의 사기바늘에 실을 붙였다. 우선 능해지기까지 세 개를 사용하다가 차차로 늘릴 모양이다.
공장 남쪽 벽은 전부가 유리로 되었으며, 천장까지도 유리를 달았다. 그리고 제사기도 두 줄씩 마주 놓고 그 가운데는 길을 내었으며, 그리로는 감독들이 왔다갔다하고 있다. 서울서는 감독이 다섯 사람이었는데 이곳은 감독이 삼십 명은 되는 모양이다. 오백 번호나 나왔건만 여기서도 아직도 수백 번호가 나가리만큼 아득해 보였다.
1930년대에 이르면 제사공업도 기계화가 상당히 진척되었다. 1930년대 다조기의 도입으로 한꺼번에 많은 실을 생산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노동강도도 올라갔다. 온종일 발판을 돌려야 했으므로 기계와 한 몸이 되어 움직여야만 했다. 기계가 도입되는 것과 동시에 규모도 커졌다. 대체로 1920년대까지 제사공장은 라인이 한 줄이었으나 위의 내용에서 제사기도 두 줄씩 마주 놓았다는 표현처럼 소설 속 공장은 라인이 두 줄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인원을 고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감독은 들었던 채찍으로 와꾸를 툭 치어 기계를 돌리었다. 그러니 실끝은 채 이어지지 못한 채 와꾸는 핑글핑글 돌았다. 선비는 울고 싶었다. 오늘 밤새도록 일한 것이 헛수고였던 것이다. 감독이 이렇게 와꾸를 돌리게 되면 으레 이십 전 벌금을 물게 되는 것이다. 선비는 어쩔 줄을 몰라서 돌아가는 와꾸를 바라보며 실끝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
선비도 어느덧 그 노래에 맞추어,
와꾸 와꾸 잘 돌아라
핑핑 잘 돌아라
네가 잘 돌면 상금
네가 못 돌면 벌금
핑핑 잘 돌아라
네가 잘 돌면 상금
네가 못 돌면 벌금
겨우 이렇게 입 속으로 부른 선비는 눈등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괴롬을 잊기 위한 이 노래!
상벌제도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지만 이 제도를 악용해 임금을 전혀 주지 않는 일도 종종 있었다. “임금은 겨우 하로 평균 십이삼전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매일 작업에도 성적을 보게 되야 조곰만 잘못이 잇으면 그 공녀에게는 당일 임금보다 이상되는 벌금을 밧게 됨으로 십전 내외의 임금도 완전히 밧지 못한다 하며…”라는 신문 보도가 있기도 할 정도였다. 대부분 11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고 식사는 형편없었으며 안 그래도 낮은 임금을 저축이라는 명목으로 공제하기도 했다.
선비의 초조해하는 양을 바라보는 감독은 다소 위엄을 띠었다.
“누가 뭐라는가, 어서 거게 좀 앉았어. 뭐 물을 말이 많아. 응 거기…….”
의자를 가리켰다. 선비는 당황하였다. 그리고 그의 신변에 위기가 박두한 것을 느끼며 어떡해서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숨이 가빠 오며 방 안의 공기가 자기 하나를 둘러싸고 육박하는 듯하였다. 그때 선비는 덕호에게 유린받던 경험을 미루어 감독이 어떻게 어떻게 할 것이 선뜻 떠오른다.
“저 난 일하던 것을 놓고 들어, 들어……왔에요.”
“응 무슨 일?”
선비의 불그레한 얼굴을 곁눈질해 보는 감독은 귀여운 듯이 빙긋이 웃었다.
“저 저고리를…….”
“저고리를?…… 돈 잘 벌어서 삯 주지, 허허허허. 그런데 말이어, 이런 종이에 혹해 가지고 만에 일이라도 그릇 생각을 하면 안 되어. 이 공장은 여러 여공들을 위하야 온갖 이익과 편리를 도모하는데, 그러한 은혜를 모르고 이따위 말이나 곧이들으면 되는가. 후일 선비에게도 이런 종이가 가거던 내게로 가져와…… 응, 그러겠나?”
선비는 화제를 돌린 것만 다행으로 생각하고 얼른 대답하였다.
“네.”
“그런 것을 써서 돌리는 것은 벌이 없는 놈들이 남 벌어먹는 것이 심술이 나서 그러는 게야. 선비는 그런 데 떨어지지 말고 나 하라는 대로만 잘 순종하면 매일 상금을 줄 테야. 또는 이 기숙사에 있는 여공들을 맘대로 부리는 감독을 하게 할 테야. 이를테면 내 대리 격이지. 알아들었어?”
“누가 뭐라는가, 어서 거게 좀 앉았어. 뭐 물을 말이 많아. 응 거기…….”
의자를 가리켰다. 선비는 당황하였다. 그리고 그의 신변에 위기가 박두한 것을 느끼며 어떡해서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숨이 가빠 오며 방 안의 공기가 자기 하나를 둘러싸고 육박하는 듯하였다. 그때 선비는 덕호에게 유린받던 경험을 미루어 감독이 어떻게 어떻게 할 것이 선뜻 떠오른다.
“저 난 일하던 것을 놓고 들어, 들어……왔에요.”
“응 무슨 일?”
선비의 불그레한 얼굴을 곁눈질해 보는 감독은 귀여운 듯이 빙긋이 웃었다.
“저 저고리를…….”
“저고리를?…… 돈 잘 벌어서 삯 주지, 허허허허. 그런데 말이어, 이런 종이에 혹해 가지고 만에 일이라도 그릇 생각을 하면 안 되어. 이 공장은 여러 여공들을 위하야 온갖 이익과 편리를 도모하는데, 그러한 은혜를 모르고 이따위 말이나 곧이들으면 되는가. 후일 선비에게도 이런 종이가 가거던 내게로 가져와…… 응, 그러겠나?”
선비는 화제를 돌린 것만 다행으로 생각하고 얼른 대답하였다.
“네.”
“그런 것을 써서 돌리는 것은 벌이 없는 놈들이 남 벌어먹는 것이 심술이 나서 그러는 게야. 선비는 그런 데 떨어지지 말고 나 하라는 대로만 잘 순종하면 매일 상금을 줄 테야. 또는 이 기숙사에 있는 여공들을 맘대로 부리는 감독을 하게 할 테야. 이를테면 내 대리 격이지. 알아들었어?”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내해야 하는 것에 더해서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감독들에 의한 성적 폭력의 위협에도 노출되어 있었다. 게다가 감독들은 이를 여성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는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소설 속에서도 드러나는데, 우선 일전에 동맹파업을 하려 했으나 “그 중에 몇 계집애가 싹 돌아서서 글쎄 감독에게 고해 바쳤”던 걸 경험했다는 이야기가 언급된다. 또 여성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불려간 사람이 감독의 제안을 거절했는지, 아니면 감독과 한패가 되었는지에 대해 첨예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런 논쟁이 노동자들의 단결보다는 분열을 조장하는 데 일조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
비명을 내며 얼핏 손을 챘다. 그때 손은 이미 뜨거운 물에 담기었었으니 아픈지 어떤지 분명하지 않았으나 이윽고 손과 팔이 저리고 쓰리어서 죽을 지경이었다.
“어데 몹시 다았수?”
선비는 머리를 들고 바라보았다. 그 순간에 자기에게 말을 던진 것이 고치통을 들고 온 남직공이라는 것을 알자 첫째의 그 얼굴이 휙 떠오른다. 선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머리를 돌렸다. 남직공은 멍하니 섰다가 돌아간다. 전 같으면 부끄럼이 앞을 가리었을 터이나 오늘은 온몸이 아프고 팔목까지 데었으니 그런지 부끄럼도 아무것도 모르겠고 그저 남직공에게 무엇인가 호소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끼었다. 그리고 그가 첫째라면 선비는 서슴지 않고 그의 몸에 피로해진 자신의 몸뚱이를 맡기고 싶었다. 선비는 못 견디게 쓰린 팔목을 혀끝으로 핥으며, 돌아가는 남직공을 흘금 바라보았다. 눈물이 앞을 가리어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인다. 선비는 아무래도 이 밤을 새워 일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시계를 바라보면서 감독이 이리로 오면 말하겠다 하고 생각하였다.
멀리 서 있는 감독이 그림자같이 눈앞에 희미하게 어른거리므로 그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때 감독이 그의 앞을 지나치는 듯하여 그는 입을 떼려 하였다. 그 순간 기침이 칵 나오며 가슴에서 가래가 끓어 올라오므로 그는 얼핏 입에 손을 대었다. 기침이 뒤를 이어 자꾸 나오려 하는 것을 참으려고 애를 쓸 때 마침내 그의 입에 댄 다섯 손가락 새로 붉은 피가 주르르 흐르며 선비는 그만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병자의 몸은 벌써 싸늘하게 식었으며 얼굴이 파랗게 되었다. 철수는 후 하고 한숨을 쉬고 첫째를 돌아보았다. 가슴을 졸이고 섰던 첫째가 한 걸음 다가서며 들여다보는 순간,
“선비!”
그도 모르게 그는 소리를 지르고 나서 우뚝 섰다. 그의 앞은 아득해지며 어떤 암흑한 낭 아래로 채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어려서부터 그리워하던 이 선비! 한번 만나 보려니…… 하던 이 선비, 이 선비가 이젠 저렇게 죽지 않았는가!
《동아일보》 1934.8.1~1934.12.22.
선비는 결국 공장에서 일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당시 주요 제사 공장에 재직 중이던 여공의 약 81%는 작업과 관련한 병을 앓고 있었다. 그중 가장 빈번한 질병은 소화기 질병이었는데, 이유는 짧은 식사시간과 질 낮은 음식 때문이었다. 조사(繰絲)여공의 경우는 물에 손을 담그고 장시간 노동을 해야 했기에 피부병도 흔하게 앓았다. 그 결과 제사 여공들은 일반적인 당대의 여성들과 비교해 제대로 발육하지 못했고 수명도 단축되었다.
강경애의 『인간문제』를 통해 식민지 시대 여성의 삶을 짧게나마 살펴봤다. 이 작품에는 여성의 삶도 자세히 다루고 있지만 이와 함께 의식화되어 가는 노동자의 모습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이 부분은 추후 관련한 내용을 다룰 기회가 된다면 그때 살펴보려 한다.
지난 호에 연재된 글에 이어 이번 글까지 식민지 시대 노동자 민중의 삶을 소설을 통해서 돌아봤다. 다음 호에서는 식민지 시대의 억압적 현실에 저항했던 운동에 대해서 소설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