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위기의 딜레마: 탈탄소, 탈핵, 성장
기후 위기 쟁점들에 관한 해설
1. 취지
지구의 기후가 인간 생활에 불리한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인류적 합의에 가깝다. 하지만 인류가 얼마나 어떻게 노력해야 적당한지를 두고는 여전히 갑론을박이 이어진다. 간단하게 말해, 기후 위기 대응의 비용과 편익 계산이 제각각이어서 그렇다.
기후 위기가 인간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인간 활동이 실제 기후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되는지, 탈탄소 에너지로 전환하는 이행기는 얼마나 짧아야 하는지, 핵에너지 없이도 화석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지, 환경 제약을 고려할 때 세계의 생산과 소비를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기후 위기 대응이 다른 지구 환경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는 건 아닌지 등, 비용과 편익 계산에 고려되어야 할 변수들이 죄다 쟁점이다.
본 글은 이러한 쟁점을 간단하게 설명한다. 쟁점은 결국에는 탈탄소, 탈핵, 경제성장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지로 집약된다.
2. 기후 변화는 자연적 필연인가, 사회적 인재인가?
기후 위기 쟁점의 첫 번째 관문은 기후 위기 그 자체의 성격을 두고 벌어진다. 기온 상승은 자연적 필연인가, 인간이 만든 사회적 재앙인가? MIT의 케리 엠마누엘(Kerry Emanuel)의 『기후변화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들』를 참고하여 지구과학적 설명을 해보도록 하겠다.
장기간의 기후 변화
지구과학자들의 대략적 합의는 지구의 온도는 원래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태양의 변화, 지구의 세차 운동(팽이처럼 지구 자전축이 회전하는 현상), 화산 활동 등이 지구 온도의 장기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 수억 년 전부터 따뜻한 시기와 추운 시기가 번갈아 나타났으며, 현재 인류는 4천만 년 전부터 시작된 추운 시기(빙하기)에 살고 있다.
단, 추운 시기에도 항상 추운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온도가 올라가는 간빙기가 주기적으로 나타난다. 과거 3백만 년 동안 현재와 비슷한 간빙기와 8만 년 동안 이어지는 빙하기를 왔다 갔다 했다. 심지어 가끔은 수백 년간 폭염과 혹한을 오가는 느닷없는 기후 변화도 있었다. 5천만 년 전에는 북극 평균 온도가 15℃에 달했다. 현재 –1℃보다 한참 높았다. 5억 년 전에는 아예 지구 전체가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는 증거도 있다.
인류는 지구 역사상 기후가 가장 안정적인 시기에 농사를 지으며 번성했다. 홀로세로 불리는 1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시기다. 마지막 빙하기 때보다 6℃정도 온도가 높아졌고, 기온 변화도 1℃ 내외로 작았다. 구석기 시대의 우리 조상은 지금 기준에서 보면 엄청나게 춥고, 더군다나 갑자기 온도가 올랐다 다시 내려가는 극한의 조건에서 살았다.
우리가 기후 위기를 이야기할 때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인류는 홀로세라는 지극히 예외적인 지구 조건에서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는 지구과학적 사실이다. 2020년 현재 지구 온도는 14.9℃로 산업화 이전(1850~1900년의 지표면, 해수면 온도 평균)보다 1.2℃ 정도 높다. 현 상태로 가면 2030~50년 사이에 2℃ 이상 온도가 상승할 것으로 예측되는데, 이는 인류의 조상 격인 아프리카 유인원이 등장한 5백만 년 전보다 높은 온도다.
기후 변화의 원인
그린란드와 남극대륙의 빙하 코어, 심해의 침전물 등을 이용해 조사해보면, 지난 3백만 년 동안의 빙하기 주기는 지구의 세차 운동 주기와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세차 운동은 지구에 도달하는 빛의 양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다만 위도에 따른 빛의 분배를 변화시키는데, 즉 빙하기의 원인은 북극의 여름이 짧아져 얼음이 녹지 않는 것이다. 빙하기와 간빙기는 위도에 따른 빛의 분배에 약간의 변화가 생겨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온실효과는 복사와 관련된다. 복사는 전자기선, 가시광선, 라디오파, 적외선 등에 실려 오는 에너지를 지칭한다. 복사를 발산하면 온도가 내려가고 흡수하면 온도가 상승한다. 그런데 공기는 두 개의 원자로 분자가 구성되어 복사 작용을 하지 못하는 산소와 질소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둘만 대기에 있었다면 지구 온도는 평균 -18℃가 균형이다.
하지만 지구에는 운이 좋게 물이 있다. 물은 효과적으로 복사를 흡수하고 방출한다. 복사하는 또 다른 기체는 이산화탄소와 메탄이다. 이들은 태양 복사는 그대로 투과하고, 지구 표면에서 방출하는 적외선 복사는 흡수한다. 만약 공기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복사가 집중되는 곳에서는 온도가 29℃까지 상승할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공기가 대류를 하기 때문에 표면 온도가 15.5℃까지 낮춰진다. 온실가스가 온도를 높이고, 대류가 온도를 낮추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온실가스는 대기 중 0.3% 정도 된다. 0.25%는 수증기이고, 0.05%가 이산화탄소와 메탄이다. 수증기는 때와 장소마다 변하지만, 몇 주 내로 균형을 찾아간다. 반면 이산화탄소는 균형을 찾아가는 데 수천 년이 걸린다. 장기간 살아남는 이산화탄소는 온실효과에서 영향력이 크다. 오랫동안 살아남는 온실가스는 대기 중 0.04%밖에 안 되지만 핵심적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지구가 더워지면 바위의 풍화작용이 가속하면서 공기 중 이산화탄소를 흡수한다. 그리고 지구 온도를 균형으로 가져간다. 추워지면 풍화가 느려지면서 반대 효과가 나타난다.
기후 변화 예측이 어려운 이유
기본적인 기후 물리학 자체는 전문가 사이에 이견이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 예측은 간단하지 않은데, 한 요소가 변하면 다른 요소들이 피드백하는 작용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온실가스 효과는 수증기와 구름이다. 구름의 경우 적외선을 흡수하는 것만이 아니라 태양 빛을 반사하는 역할도 한다. 수증기의 경우 온도를 높이는 피드백 효과가 있다. 온도가 높아지면 습도가 높아지고, 습도가 높아지면 복사를 더 많이 하기 때문이다. 이 수증기 피드백 때문에 예상치보다 온도가 훨씬 더 상승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수증기의 분포는 구름의 분포와 연관된다. 구름은 22%의 태양 복사를 반사한다. 구름이 증가하면 반사도 증가한다. 이 복잡한 관계를 어떻게 모델로 만드느냐에 따라 기후 예측이 완전히 달라진다. 또 다른 어려움의 예로 에어로졸이 있다. 산업화 이후 인간은 이산화탄소와 함께 황산염 에어로졸을 배출했는데, 이것이 빛을 반사하는 역할을 해 온도를 낮춘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면 황산염 에어로졸도 감소하는데, 둘 사이 피드백에 따라 온도 예측이 달라진다.
온도 예측의 최상위 변수는 계절의 변화(공전), 기울어진 자전축, 태양 빛의 출력 변화, 화산 폭발 등이다. 이런 최상위 강제력은 장기적 기후 변화를 예측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한편 기후 시스템의 변수는 최상위 강제력과 구분해 이해해야 한다. 기후 시스템에 영향을 미치는 구름과 공기를 타고 이동하는 여러 입자의 불확실성은 과거와 미래의 기후 변화 분석에 많은 불확실성을 만든다. 몇 주 뒤 날씨 예측도 어려운 것을 생각해보면, 장기 기후 예측이 가지는 어려움이 이해될 것이다.
온난화의 효과를 둘러싼 논쟁
지구과학자 대부분은 인류가 체감하는 시간 속에서 지구 기온이 상승하고 있다는 점을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인다. 또한, 인류가 수억 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탄소(석탄과 석유)를 인위적으로 꺼내어 단기간에 엄청나게 대기 중에 방출해 지구 온도를 자연적 상태보다 더 높여 놓았던 점에 대해서도 이견이 많지 않다. 다만, 그 높아진 온도 수준이 인류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인지, 자연이 자신의 피드백 효과로 수습할 정도인지를 두고는 논쟁이 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nter-government Panel on Climate Change, IPCC)로 대표되는 다수 의견은 인위적 온도 상승이 인류의 복지에 큰 손해를 끼친다는 것이다.
2021년에 나온 IPCC 보고서(6번째 보고서, AR6)는 자연스러운 홀로세의 온도 변화(태양복사열의 변화 등 최상위 강제력에 의한 변화) 폭을 –0.2~+0.9℃ 정도로 추정한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 인류가 묻혀 있던 온실가스를 인위적으로 끄집어내어 공기 중에 배출한 탓에, 2020년에 이미 그 변화 폭을 넘어섰다. 현재 추이가 이어지면 2030년 즈음 1.5℃를 넘어서고, 2050년에는 2℃를 돌파한다.
IPCC가 온도 상승의 기준을 1.5℃~2℃로 삼는 것은,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으나, 지구과학에서 추정하는 원시 인류 출현 이후 최고 온도가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지금보다 온도가 15~20℃ 높았던 중생대에는 포유류가 생물학적으로 번식하기 어려웠고, 온도가 한참 내려간 신생대에 이르러 빠르게 진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어쨌든, IPCC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10년에 한 번 정도 발생할 폭염이 평균 온도가 1.5℃ 상승하면 2.5년에 한 번씩, 4℃가 상승하면 매년 발생한다. 10년에 한 번 발생할 정도의 홍수 역시 온도가 1.5℃ 상승하면 6~7년에 한 번, 4℃ 상승하면 4년에 한 번 발생한다. 1.5℃ 상승 시에 위험한 단계로 돌입하는 환경 조건은 경산호와 북극 생태계 파괴, 폭염, 홍수, 가뭄 같은 극단적 기후 변화, 해안 지역 침수 등이다.
IPCC 보고서는 특히 탄소 축적과 온도 상승의 관계에 주목했다. 앞서 봤듯 인류의 시간대에서 탄소는 한 번 공기 중으로 배출되면 인위적으로 흡수하지 않는 이상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대기 중 축적되는 탄소의 양을 통제하려면 탄소 예산(carbon budget)을 수립하는 게 정책적으로 중요하다. 다만, 보고서는 탄소를 당장 배출하지 않더라도 이미 대기 중에 축적된 탄소로 인해 기온 상승이 계속될 수 있다고 예측한다. 즉, 배출 제로 수준이 아니라 대기 중 탄소를 없애는 일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IPCC 보고서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온난화가 가져오는 효과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대기 물리학자 프레드 싱거와 데니스 에이버리가 쓴 『지구온난화에 속지 마라』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로마 중흥기였던 중세 이전 기온이 지금보다 더 높았고, 지구 온도는 홀로세에서 인류의 활동이 아니라 태양의 활동과 지구 세차 운동으로 인해 1500년 주기로 변화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들은 IPCC가 근거로 삼는 1850~1900년 기준의 온도 변화 측정은 지적 사기에 가깝다고 주장하는데, 왜냐면 1850~1900년은 홀로세에서도 추웠던 시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기저 효과에 의한 상승을 마치 엄청나게 비정상적인 상승으로 과장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인간의 탄소 배출에 의한 기온 상승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는 지구의 복잡계가 스스로 균형을 찾아가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으며, 북극 빙하가 녹는 현상, 산호초가 사라지는 현상 등도 이전에도 있었던 것이라 비판한다.
덴마크 통계학자 비외른 롬보르는 그의 대표작 『쿨잇』에서 편익/비용으로 볼 때 탄소 제로를 위해 쓰는 비용이 터무니없이 많다고 비판한다. 같은 비용을 빈곤 퇴치, 저개발 국가 발전, 다양한 환경 기술 개발 등에 사용하는 것이 현실적이며 순이득도 크다고 주장한다. 그는 환경운동단체들이 탈탄소에 필요한 순비용(비용–편익)을 분식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기후 종말론(탈탄소의 편익이 거의 무한이다.)을 유포했다고 분석한다. 기후 위기는 진행 중이지만, 다른 중요한 인류의 문제들과 균형을 맞춰 대응해야 한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마이클 샐런버그는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에서 기후 종말론은 만들어진 신흥 종교에 가깝다고 비판하며, 탈탄소로 잃는 것이 얻는 것보다 크다고 주장한다. 예로, 탈탄소로 인해 저개발 국가는 나무를 연료로 쓰게 될 것이고, 생존권 위기에 처한 주민들에 의해 아마존은 더 오염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IPCC 보고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비판한다. 엄청나게 과학적인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연구진을 구성하는 과정부터 정치적이고, 무엇보다 실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책결정자를 위한 요약 보고서」(Summery for Policymakers, SPM)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본문의 결론을 과장한다고 주장한다.
소결
기후 변화와 관련한 논의는 다소 극단적으로 흐르는 경우가 있다. 청소년을 앞세우는 캠페인들은 “우리는 멸종위기종입니다”라는 식의 기후 종말론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고, 또 반대로 아예 “그게 당장 먹고사는 문제와 무슨 상관이야”라는 식으로 무관심한 경우도 많다.
사실, 기후 종말론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 예로, ‘불타는 지구’ 가설은 가장 효과적인 온실가스인 수증기가 공기 중에 누적되고, 온실효과로 수증기가 계속 축적되는 피드백 효과를 주장한다. 이런 효과는 바다가 모두 증발할 때까지 지속한다. 금성이 이런 식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지구가 얼어버린 적은 있었어도 불타버린 적은 없었다. 지금껏 지구에서 있었던 종의 멸종도 홀로세 정도의 짧은 시간에서 발생하지는 않았다.
물론 지구 종말론이 과장됐다고 기후 만사태평론이 옳은 건 아니다. 인위적 탄소 배출이 기온을 상승시키는 건 과학적으로 분명하고, 기온이 올라갈수록 인류가 직면하는 문제들이 많아지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폭염과 한파로 인한 피해가 날이 갈수록 커지는 것 역시 정치적 과장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겪고 있는 일이다. 종말론을 비판하기 위해 기후 위기를 역으로 과소평가하는 것은 사회가 노력해서 준비해야 할 방책들을 무력화한다. 현세대가 환경을 파괴하면 후세대가 그 비용을 부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현세대가 특히나 주의해야 할 점인데, 이런 세대 정의의 관점에서도 기후 위기는 가볍지 않은 문제이다.
요컨대, 우리는 지구 종말론과 기후 만사태평론 양자를 모두 지양하면서, 지구 과학이 밝혀낸 바에 따라 적절한 방법으로 기온 상승을 늦출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할 필요가 있다. 기후 위기에 관해서는 그야말로 중도적 해법이 필요하다 하겠다.
3. 누가 얼마나 탄소를 배출하고 있는가?
탄소 배출을 줄일 필요가 있다는 전제에 합의한다면, 그다음 문제는 누가 얼마나 탄소를 배출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나라별, 산업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히는 문제다. 더불어 에너지 전환을 과연 얼마나 실제로 할 수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옥스퍼드 대학교 마틴 스쿨의 데이터베이스(Our World in Data)를 기본 자료로 온실가스 배출의 현황을 살펴보겠다.
국가별 배출
온난화를 가속하는 탄소 배출에 누가 얼마나 책임이 있는지를 가려내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각국의 2021년 현재 배출량과 산업화 이후 현재까지의 누적 배출량 차이, 국가 총배출량과 인구 당 배출량 차이, 소득 수준에 따른 탄소 소비 차이 등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로 현재 배출량은 중국이 1위(27%), 미국 2위(15%), 서유럽 3위(10%)지만, 지구 대기에 누적된 지난 2백 년의 탄소를 따져보면 1위는 미국(25%), 2위는 서유럽(22%), 3위 중국(12%)이다. 그런데 현재 시점에서 2050년까지 탄소 제로를 실시하면, 감축 비용은 서유럽과 미국보다는 중국이 더 짊어지게 된다. 기온 상승과 비례 관계에 있는 것은 누적된 탄소의 양인데도 말이다. 따져보면 불공정한 일이다.
기후 위기가 ‘국가 단위’ 문제가 아니라 80억 인류의 문제라면, 탄소 배출과 관련해 중요한 건 국가별 배출이 아니라 인구당 배출이라고 할 수도 있다. 미국의 1인당 탄소 배출은 중국보다 2.3배, 인도보다 8배 많다. 소득 수준에 따른 탄소 소비 역시 세계적으로 보면, 상위 소득 16%가 탄소 소비의 38%를, 하위 소득 49%가 탄소 소비의 14%를 차지한다. 탄소 규제로 세계 경제 성장이 하락할 경우, 역설적으로 탄소 소비가 적은 하위 계층이 도리어 큰 피해를 볼 가능성이 크다. 탄소 규제에 불평등과 불공평이란 주제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산업별 배출량
온실가스 배출의 절대적 부분(73%)은 에너지 소비 과정에서 발생한다. 에너지 소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나눠보면, 산업 24%, 건물(온난방, 요리 등) 18%, 운송수단 16%, 에너지 생산에 소모되는 에너지 8%, 에너지 생산 중에 유출되는 에너지 6% 등이다. 제조업 생산 과정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는 5%인데, 시멘트와 석유화학제품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쓰레기에서 3%, 그리고 농업과 토지 이용 과정에서 18%가 배출된다.
에너지 구성
에너지 소비와 구성을 보여주는 위 그래프에는 두 가지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첫째, 1950년대를 기점으로 에너지 생산 자체가 J자로 급증한다는 점이다. 둘째, 화석연료가 차지하는 비중(2019년 85%)이 압도적이란 점이다. 1960년대에 비해 화석연료 비중은 단지 5% 남짓 감소했을 뿐인데, 4%는 핵발전이었다.
에너지원에 따른 생산비는 추정기관마다 차이가 있다. 유명한 에너지 투자금융사인 라자르(Lazard)에 따르면, 2010년대 중반에 태양열과 풍력 발전이 가장 저렴한 에너지원이 되었고, 핵은 2020년대 가장 비싼 에너지원이 되었다. 그런데 최근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던 빌 게이츠의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은 와트당 생산비용이 문제가 아니라 토지 제약을 고려한 생산 능력, 즉 에너지 밀도가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제곱미터당 에너지 생산은 화석연료와 원자력이 압도적으로 높고, 재생에너지는 둘의 백 분의 일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낮다. 한국에서 핵발전소를 태양광으로 대체하려면 서울시 면적의 4~5배가 필요하다.
한국의 상황
한국은 2019년 기준으로 세계 탄소 배출량의 2%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다만, 1인당 탄소 배출량으로 보면 한국은 자원 수출국을 제외하면 세계 1위에 올라있다. OECD 국가 중 한국 위에 있는 나라는 호주, 미국, 캐나다인데, 세 나라는 석탄, 석유, 가스 생산 탓에 탄소 배출량이 많다. 대만이 한국과 비슷하고, 일본과 독일은 한국의 70% 수준이다. 서유럽 전체의 평균은 한국의 60% 수준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차이는 단순히 경제성장에 따른 탄소 배출량의 증가 탓만이 아니란 점에 심각성이 있다. 대부분 선진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불(2011년 달러 기준) 즈음에 도달했을 때, 탄소 절약적 기술혁신에 나섰다. 하지만, 한국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참고로 이런 현상은 대만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산업별 배출량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에너지 87%, 산업공정 8%, 농업 3%, 폐기물 2%이다. 에너지 내부를 보면, 산업이 54%, 수송 16%, 건물 17%다. 세계 전체의 구성과 가장 크게 차이가 나는 건 산업이다. 한국에서는 온실가스 배출의 54%가 산업에서 발생한다. 세계보다 두 배 이상 많다. 반면 농업을 비롯한 토지 이용의 경우 세계보다 매우 적다.
에너지원 구성의 경우 화석연료가 87%, 핵발전소가 11%, 재생에너지가 2%이다. 1인당 에너지 소비를 에너지원 별로 비교하면, 한국의 경우 1인당 화석연료 사용량은 스웨덴의 1인당 전체 에너지 사용량와 비슷하다.
핵발전 쟁점
탈탄소 정책의 핵심은 화석연료를 연소해 얻는 에너지를 전기로 바꾸고, 그 전기 생산에서 화석연료 발전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이다. 무조건 전기 사용은 증가하고, 전기 생산도 증가해야 하는데, 전기 생산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화석연료를 또한 줄여야 한다.
다음의 그림을 통해 제조업 기반이 어느 정도 있고, 탄소 배출을 줄이고 있는 유럽의 다섯 나라, 스웨덴,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를 비교해보자. 화석연료 에너지 소비가 가장 많은 나라는 네덜란드와 독일이다. 그리고 그 반대로 화석연료를 가장 적게 쓰는 나라는 스웨덴과 프랑스이다. 그리고 양쪽의 결정적 차이는 다름 아니라 핵발전 비중이다.
스웨덴은 핵발전 비중도 크고, 동시에 재생에너지 비중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인데, 재생에너지의 70%는 지리적 특성에서 나오는 수력발전이다. 최근 몇 년간 풍력을 개발해 20% 이상으로 높였다. 독일의 경우 2천 년대부터 풍력과 태양광 발전에 엄청난 투자를 벌였다. 하지만 20년 동안 화석연료 비중을 고작 85%에서 77%로 8%포인트 줄였을 뿐이다. 그만큼 어렵다.
참고로 핵발전소를 극적으로 줄인 대표적 국가는 일본이다. 후쿠시마 사태로 핵발전 비중이 14%에서 3%대로 감소했는데, 이 기간 화석연료 비중은 81%에서 88%로 도리어 늘었다. 일본은 2050 탄소 제로 계획을 수립하며 핵발전을 20~30%대로 확대할 계획을 밝히는 상황이다.
핵발전과 관련해서는 세계적으로 크게 세 가지 입장이 첨예하게 부딪히고 있다. 첫째, 핵발전 불가피론이다. 탈탄소를 할 수단은 현실적으로 핵 발전소뿐이라는 주장이다. 빌 게이츠를 비롯한 일군의 사업가들은 소형원전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해 공사 기간과 방사능 유출 위험, 핵폐기물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기도 하다. 둘째, 신재생에너지 낙관론이다. 태양광과 풍력 발전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어, 화석연료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란 주장이다. 실제로 2010년대 이후 태양광과 내륙 풍력 발전의 경우 생산비가 급감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셋째, 탈성장론이다. 탈탄소와 탈핵은 반드시 해야 하는 당위인데, 기술적으로 쉽지 않으니, 에너지 사용 자체를 비약적으로 줄일 수밖에 없고, 이는 결국 기존의 성장 자체를 어느 정도 포기해야만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녹색당이나 환경단체들이 암묵적으로 가지고 있는 입장이다.
탈탄소 전환을 강조하면서도 기존 경제의 부하를 걱정하는 주류 경제학적 입장은 대체로 핵발전 관리 강화론으로 기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 경제 주간지이자, 탈탄소 운동에도 꽤 적극적인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핵에너지는 탈탄소의 핵심(essential)이라고 주장하며, 문제는 핵발전 여부가 아니라 정부의 관리능력이라고 주장한다. 에너지 발전으로 인한 사망은 우리가 체감하는 바와 달리 도리어 재생에너지가 더 많다. 핵은 관리만 잘 되면 오히려 가장 안전하다고 볼 수도 있으며, 정부의 투명성, 핵 관리 기구의 독립성 등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이에 반해 탈핵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금의 핵발전 통계는 핵발전소가 소수 국가에서 제한적으로만 사용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며, 만약 핵발전의 고삐가 풀리면 기하급수적으로, 또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고 회복도 불가능한 수준으로 피해가 커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핵폐기물이 영구히 남기 때문에 그로 인한 피해 역시 무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핵발전소는 재생에너지 개발이 가능한 선진국에서나 관리 가능한데, 정작 문제가 되는 개발도상국에서는 운영과 관리조차 어렵기 때문에 대안이 절대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소결
인간이 만든 기온 상승은 탄소 축적량에 비례한다. 탄소 축적량만큼 탄소 감축 책임이 있다면 미국과 서유럽이 절반의 책임을 져야 한다. 다만, 앞으로 20~30년까지 내다보면 중국 역시 나머지의 절반을 책임져야 할 것이다.
탄소 감축은 세계적으로 1/N로 책임을 나눌 수 없는데, 이 때문에 책임의 분담을 두고 세계적 협력에 여러 갈등이 현재도 불거지고 있다. UN기후변화협약당사국총회(COP)에서도 이 문제를 두고 계속 갈등이 커지고 있다. 쟁점은 크게 보면 두 가지이다.
첫째, 미국과 중국의 실질적 탄소 제로 이행 여부이다. 두 국가의 탄소 배출량이 세계 40%를 차지한다. 1인당 배출량은 산유국을 제외하면 미국이 1위이고, 나라별 배출량은 중국이 압도적 1위이다. 그런데 미국의 공화당은 기후 위기 부정론에 가까워 언제든 탄소 배출 제로 계획을 뒤집을 가능성이 크고, 고도성장을 포기할 수 없는 중국은 탄소 배출을 쉽게 감축할 수 없다. 두 나라가 신뢰를 보여주지 못하면, 기후 협상 자체가 껍데기만 남을 가능성이 크다.
둘째, 선진국과 개도국/저개발 국가 간의 갈등이다. 2009년 실패한 코펜하겐 COP에서 부유한 국가들은 2020년까지 연간 1,000억 달러의 기후 금융을 약속했고, 2025년부터 연간 총액을 증대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러한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다. 부유한 나라들이 협상 내용을 지키도록 하려면 수정이 필요하다. 참고로 이 기금은 저소득 국가들이 기후 변화에 적응하고 대처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개발도상국들은 지구 온난화의 영향에 가장 취약한 국가들이 적응할 수 있도록 기후 금융의 최소 50%를 사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편,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건 상당히 복잡한 문제다. 산업, 건물, 운송 등에서 에너지 효율적 기술이 개발되고는 있지만, 에너지 소비 자체를 줄이는 단계까지 나아가고 있지는 못하다. 현재로서 에너지 소비를 줄인다는 건 곧바로 생산의 감소와 소비자 후생의 감소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에너지 생산 구성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20세기 중반부터 세계는 화석연료 소비를 급격하게 늘렸던 덕분에 경제적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 지수적으로 증가한 화석연료 소비를 줄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런 이유로 핵발전과 탈성장이 최근 세계적 논란이 되고 있다. 경제를 유지하며 탈탄소를 달성할 방법은 핵발전밖에 없다는 주장, 핵발전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경제성장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 곳에서 나온다.
4. 탈탄소를 위해 자본주의를 지양해야 하는가?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급진적 운동들은 기후 위기가 자본주의의 필연적 결과며, 이윤 동기에 의해 무한 축적을 지속하는 자본주의는 결코 기후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대안으로 생태사회주의부터 인간 중심의 문명을 개조하자는 생태근본주의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마르크스적 생태위기론의 논리
자연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에너지 흐름, 물질의 순환, 자연선택 등은 인간의 인식과 독립적으로 발생해왔고, 또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중심주의를 버리고 자연중심주의로 가자는 식의 관념을 가져야 한다는 건 아니다. 인간은 오직 인간적인 방식으로만 자연과 교통할 수 있다. 우리가 주제로 삼아야 하는 건 자연에 대한 낭만적, 영성적 관념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 생태체계에 미치는 교란과 격변, 그리고 인간에 대한 자연의 수용 능력(carrying capacity)이다.
인류는 빙하기의 수렵 채집 시절부터 몇몇 동식물의 멸종에 영향을 미쳤다. 홀로세에 들어서 농업혁명을 이룬 후에는 인공적으로 동식물 서식지를 조성했고, 자본주의 등장 이후에는 세계 생태사에 결정적 단절을 가져올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해졌다.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자연 생태계에 대한 교란은 경제 원리를 통해 내부화되었다. 세계 경제의 창출로 인해 그 규모 역시 지구적 차원으로 확장되었다.
온실가스의 원인인 현대의 산업화는 그 토대가 자본주의였다. 산업‘화’는 간단하게 말해 가공된 에너지를 사용해 기계를 구동하는 생산을 의미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기계(설비, 공구, 건물, 구축물 등)라는 사회적 생산물을 축적해야 한다. 기계의 소유자는 자연을 가공해 얻은 에너지와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능력(노동력)을 구매해 생산을 조직하며, 그 결과물(노동생산물)을 배타적으로 영유한다. 기계 소유자는 기계, 에너지, 인간 능력을 복구하고도 남은 잉여(잉여노동 또는 그 화폐적 표현인 이윤)를 소유(착취)하게 되는데, 축적의 기본적 동기는 바로 이 이윤이다. 생산물을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자본가와 노동력을 자유롭게 판매하는 노동자로 구성된 생산 관계, 즉 자본주의는 이런 형태의 착취를 재생산하는 데 최적화된 생산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자연 파괴와 노동 착취는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이후 항상 존재했던 것이긴 하다. 다만 산업 사회에서는 그 양상이 이전과 완전히 질적으로 달라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농업 사회의 지주-소작농 관계에서는 제한된 자연(토지)을 점유(제로섬이다)하는 게 중요했고, 주어진 자연의 조건(기후, 비옥도 등)에 따라 생산량에도 차이가 발생했다. 그리하여 쥐어짤 수 있는 소작농의 생산물에도 상한선이 분명했다. 그러나 산업 사회에서는 노동생산물의 축적(자본)에 제한이 없고, 자연의 조건을 이겨내려는 기술(비료, 냉장, 석유화학, 전기, 제약 등)도 끊임없이 개발된다. 그 결과 노동생산성이 지속해서 향상되며, (생산물이 아닌) 가치 형태(상품화폐경제)를 통해 지리적 제약을 넘어 세계적 규모로 노동 착취와 자연 파괴를 자행할 수 있다.
제이슨 무어는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문제가 되는 건, 위와 같이 노동 착취와 자연 파괴가 함께 이뤄지는 방식, 즉 노동을 통한 자연의 파괴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존 벨라미 포스터는 마르크스가 ‘신진대사(metabolic) 균열’로 설명했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인간의 정신적·육체적 에너지(노력)가 자연과 관계하며 순환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말하자면, 인간과 자연 사이의 에너지 신진대사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인간을 노동에서 소외시키고, 또한 자연에서 분리한다. 상품화폐경제의 물신숭배 속에서 재생산되는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과 자연의 동시적 소외(즉 신진대사의 균열)가 자본에 의해 발생한다. 자본은 노동을 포섭해 자연을 수탈하여 잉여가치를 극대화한다.
마르크스적 생태위기론의 시사점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이런 분석은 현재의 기후 위기에 어떤 통찰을 제공하는가? 크게 보면 두 가지다.
첫째, 노동을 포섭해 자연을 파괴하는 신진대사의 균열 과정이 자본축적에 필연적이란 점이다. 자본축적이 고도화된 선진국은 자연 절약적 기술혁신에 나설 수도 있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본축적에 매진해야 하는 개발도상국과 저소득국은 자연 파괴를 피할 길이 없다. 그런데 기후 위기에서 드러나듯 탄소 규제는 국제적 수준에서 이뤄져야 효과가 나타난다. 기후 위기에 대한 세계 자본주의의 대처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예로 다음의 그림과 같이 각국의 1인당 탄소 배출과 1인당 국내총생산의 관계를 보면, 1인당 국내총생산이 2만 달러(2011년 달러 기준) 이상이 되어야 탄소 배출 감축에 어느 정도 성공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독일, 스웨덴처럼 탄소 감축에 크게 성공한 나라들도 2만 달러 선을 넘어선 후(독일 70년대 후반, 스웨덴은 70년대 초반)에야 탄소 절약적 기술을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탄소 감축에 나선 선진국 대부분이 비슷하다. (이를 환경적 쿠즈네츠 곡선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분명한 상관관계는 역으로 2만 달러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탄소 배출 감축에 성공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된다. 자본축적의 일정 수준을 달성하지 못하면, 탄소 절약적 경제는 언감생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계 최대 탄소 배출 국가이자, 세계 인구의 15%를 차지하는 중국은 1인당 국내총생산이 1만 달러 수준이다. 최근 탄소 배출이 급증하고 있으며 중국과 인구가 비슷한 인도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1만 달러에도 한참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이들 나라가 2만 달러 선까지 도달할 때가 되면 지구 온도는 1.5℃가 아니라 4℃ 이상 올라갈 것이다.
심지어 2만 달러를 넘어서도 사정에 따라서 탄소 절약적 기술혁신에 나서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과 대만이 대표적이다. 인류 역사에서 단 한 번 존재했던 20세기 중반의 최대성장(One Big Wave) 기간을 경험하지 못한 20세기 후반의 추격성장 국가들은 자본생산성이 크게 하락하는 국면에서 2만 달러를 넘어섰다. 경쟁력이나 기술혁신 역량이 북미, 서유럽 국가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윤 동기에 따라 무한한 자본축적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기후 위기를 해결하는 게 이렇게나 모순적이다.
둘째, 신진대사의 균열이 자본축적의 위기를 가속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생태 위기에 대처하려면 지금까지 무상으로 얻던 자연 자원의 복구에 노동생산물을 사용해야 한다. 생산 복구에 필요한 노동이 증가할수록 이윤으로 취득할 수 있는 잉여노동은 감소한다. 이는 축적의 둔화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이윤율 하락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윤율 하락은 축적 둔화를 가속한다. 생태적 복구에 더 많은 가치가 필요할수록 이윤율은 더 빠르게 하락하게 된다.
우선 탄소 배출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화석연료 에너지를 재생에너지로 바꿀 경우, 선진국에서는 에너지 재생산에 사용되는 비용이 15~30%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것도 굉장히 낙관적인 예상이다. 기술이 부족한 개발도상국이나, 지리적으로 태양광, 풍력 등에 불리한 지역은 훨씬 더 상승한다. IPCC 보고서가 탈탄소 경로에서 강조하는 탄소포집저장 시설의 경우 현재 기술 개발도 미진한 상태인데, 그 기술이 개발된다고 하더라도 천문학적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한다. 2~5조 달러를 예상한다. 세계 GDP의 3~6%, 한국 GDP의 1~2.5배에 달하는 액수다. 재생에너지나 탄소포집저장 산업이 부가적으로 육성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총자본 입장에서는 결과적으로 생산 복구에 필요한 비용이 증가하는 것이다. 총자본의 이윤율은 감소할 수밖에 없다. 2008~09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장기 저성장을 겪고 있는 자본주의에 위기가 가중되는 셈이다.
사회주의적 해법의 한계
주류 경제학의 기후 위기 해법은 간단하게 말해, 기후를 부분적으로 시장화해서 이른바 ‘공공재의 비극’을 막는 것이다. 반면 사회주의적 해법은 시장을 철폐하여 생산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후자가 전자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덩컨 폴리가 『부정한 삼위일체: 새로운 경제에서의 노동, 자본, 토지』(An Unholy Trinity: labor, capital and land in the new economy)에서 분석한 바를 토대로 이를 잠시 살펴보겠다.
대기에 탄소를 배출하는 행위에는 지금까지 비용이 부과되지 않았다. 하지만 탄소는 공기에서 얻는 대중의 효용을 감소시킨다. 공기는 점유될 수 없고, 평가절하된 가격을 가지는 전형적인 공공재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파레토 개선을 위해서는 지역적, 세대적으로 탄소 배출이라는 외부성에 비용을 부과해야 한다. 그런데 편익/비용으로 문제 해결에 접근하는 후생경제학은 결함이 있다. 편익/비용을 계산하기도 어렵고, 더군다나 그 시작과 끝도 없기 때문이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은 대기 오염 문제를 제한된 토지 하에서의 생산 문제 방식으로 풀고 있다. 예로, 토지에 소유권이 있고 임대료가 상승할 경우 기술은 토지 절약적(자본 소모적)으로 발전한다. 반대로 토지에 소유권이 없으면, 기술은 토지 소모적(자본 절약적)으로 발전한다. 이런 점에서, 고전파 정치경제학 관점에서 보면 탄소 배출 감축 정책은 대기에 소유권을 주는 것이다. 소유와 임대료가 없으면 탄소 소모적 기술이 발전할 수밖에 없다.
대기의 임대료가 비싸질수록 탄소 절약적 기술은 가속해 발전한다. 물론 대기를 사적으로 소유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정부가 대기를 공적으로 소유한 후에 탄소 배출자에 임대료를 부과해야 한다. 지구과학적 분석으로 온실가스 배출의 적절한 상한선을 정하고, 그 쿼터만큼 탄소 배출권을 경매장에서 판매할 수 있다. 배출권이 시장에서 거래되면 적절한 대기 임대료 시장이 형성될 것이다. 정부 쿼터라는 희소성 조건이 탄소 배출량을 총량 차원에서 통제하고, 배출권 시장 가격이 기업 간의 효용(이익)/비용의 균형을 찾아준다.
마르크스주의 경제이론가인 폴리는 당연히 이런 시장을 통한 해결책이 궁극적 대안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시장에서 가격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를 대체할 사회주의적 대안이 현재 존재하는지에 대해 그는 다소 부정적이다. 예로, 세금이나 국유화를 통한 탄소 배출 감축은 어디서 얼마나 탄소를 실제로 줄일 수 있는지, 어떤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정보를 기민하게 갱신할 수 없다. 탄소 배출의 페널티를 공평하게 받는 것이므로 기술혁신의 유인이 커지지도 않는다. 완전고용을 목표로 한 소련의 국영기업이 생산량 확대, 노동 소모적 기술을 발전시키며, 위로부터의 평가에 아래로부터의 분식 회계로 대응했던 사례를 탄소 감축 경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탈성장론의 함정
환경 전략과 관련해서 양극화된 두 전략이 존재한다. 하나는 그린뉴딜이고 다른 하나는 탈성장론이다. 탈성장 찬성론자들은 세계 경제활동의 규모가 이미 지구의 한도를 초과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경제생활의 축소를 요구하는 변혁을 요구한다. 한국에서도 이런 주장이 점차 늘고 있는 것 같다.
탈성장론은 소비를 줄이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소비가 감소하면 투자도 감소한다. 환경, 질병, 다양한 사회적 인프라 등에 투자하는 부분도 감소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거시경제적 소비 감소는 평균 소득의 감소를 의미하는데, 과연 현실의 불균등한 소득 분포에서 누가 더 손해를 보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모호하다.
탈성장론은 지구로부터 뽑아내는 물질적 자원이 한계에 부닥쳤다고 주장한다. 탈성장론자들은 친환경 에너지나 고효율 에너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이른바 ‘제번스 반동’ 효과가 근거다. 즉 친환경에너지로 석유 수요가 감소해 가격이 하락하면, 다시 석유를 더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제는 대체 효과를 고려하지 않은 오류다. 예로, 석유로 인해 석탄 수요가 감소했을 때, 석탄 가격 하락으로 석탄 소비가 증가하지는 않았다. 탈성장론자는 기술변화에 따른 자원의 신진대사에 관해 고려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들은 탈성장이 가져오는 투입 요소의 증폭 효과, 즉 경제가 나빠지면 석유보다 석탄, 석탄보다 장작을 사용하게 된다는 것도 고려하지 않는다.
더욱이 탈성장론은 가치가 아니라 물질 수준의 투입/산출만 주장하니, 무엇을 얼마나 줄여야 하는지에 대해 계산할 수도 없다. 즉 지구의 물질 순환은 어떨지 몰라도 가치의 순환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정 수준 이상의 성장은 미래를 위한 투자, 여전히 저개발 상태인 나라들의 발전 등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탈성장론은 이런 것들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이 실현될 경우 환경 위기 이상의 경제적 고통이 발생할 가능성 크다.
탈성장론자들은 관리된 경제 수축을 주장한다. 관리의 핵심은 환경에 도움이 되는 기업은 성장시키고, 그렇지 않은 기업에는 페널티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환경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어떻게 정량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환경 평가를 바탕으로 일종의 ‘성장 면허’와 ‘폐업 세금’을 배분하는 것일 텐데, 환경 평가를 정부가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지도 문제고, 기업의 환경 분식을 통제하는 것도 문제다. 환경에 도움이 된다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도 매우 모호한데, 예를 들면 필수재 생산에서 환경 오염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면, 필수재의 편익과 환경 오염의 비용을, 시장 가치가 아니라 정부 측정에 의해서 계산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불어 그 필수재가 무엇인지부터 정의할 수 있을까. 만약 시민 모두에게 필수재 목록을 적어내라면 어떨까. 아마도 필수재 목록을 절대로 정리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국제적 분업 관계로 가면, 탈성장론은 이 모든 문제를 엄청난 규모에서 맞닥뜨려야 한다. 요컨대 탈성장론은 거시경제의 대혼란, 국제적 무역마찰, 정부의 관료화와 독재화 등을 피할 수 없다.
탄소세인가, 탄소 거래제인가?
현재 탄소 감축에 관련하여 핵심이 되는 또 다른 쟁점은 탄소 가격화 정책이다. 정책은 탄소 배출에 대한 세금과 탄소 배출권 거래제(Emission Trade System, ETS)가 대표적이다. ETS는 ‘배출총량거래’(cap-and-trade) 원칙에 기초해 운영된다. 정부가 배출허용총량(캡)을 설정하면, 기업체는 배출 톤당 한 개의 배출권을 부여받는다. 기업체는 배출권을 할당받거나 구매 또는 거래할 수 있으며, 배출권의 가치는 탄소 가격을 나타낸다. 탄소세는 정부가 세율을 정하고, 이러한 세율이 적용되는 기업체는 배출량에 따라 톤당 해당 세율을 적용하여 금액을 지급하는 제도다. UN에 따르면 현재 탄소 배출량의 22% 정도가 탄소세 또는 배출권 거래제의 영향 아래 있다. 46개국에서 시행 중이며, 31개의 ETS와 30개의 탄소세가 존재한다. 둘을 함께 시행하는 곳도 20여 곳에 달한다.
각국은 사정이나 산업별 성격에 따라 탄소세와 ETS를 혼합하는 경우가 많다. 독일은 유럽연합(EU) ETS만 가지고 있고, 프랑스와 스웨덴은 EU ETS가 커버하지 않는 부분에 자국에서 탄소세를 부과한다.
기업 측이 부담하는 탄소 배출 비용은 전반적으로 탄소세가 더 높다. 탄소세는 대부분 목적세로, 정부는 이를 환경 관련 지출에만 사용할 수 있다. ETS는 두 가지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기업별로 무료로 할당을 해주는 배출권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가 경매로 기업에 판매하는 배출권이다. 한국은 현재 배출권의 3%만 경매에 부치고 있다. 이마저도 대부분은 국영 발전소들이 ‘세금’으로 구매하는 형태다. 아직은 유명무실하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ETS가 아직은 이 정도 수준이다.
탄소세와 ETS는 장단을 가지고 있다. 탄소세의 장점은 무엇보다 제도의 수월성이다. 생산자에게 부가가치세를 매기듯, 품목과 생산량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면 된다. 하지만 단점은 그 경직성과 범위의 제한성이다. 경직성은 기업이 기술혁신을 해서 탄소배출량을 감소시켰을 경우에도 세율이 곧바로 조정되기 어렵다는 의미다. 생산 자체에 페널티가 주어지는 방식이라 품목을 바꾸지 않는 한 기술혁신의 동기도 발휘되기 어렵다. 석탄 발전같이 생산 자체를 감소시켜야 하는 업종이 아니라면 효율성이 떨어진다.
ETS의 장점은 제도의 효율성과 확장성이다. 정부의 경매 대상이 많아질수록, 그리고 기업들이 거래하는 배출권 총량이 많아질수록, 탄소 배출의 효용과 비용 사이 적절한 균형이 형성될 수 있다. 배출권의 희소성을 높이면 곧바로 기술혁신의 유인이 될 수 있다. 시장에서 누구나 거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확장성이 크다. 세계 시장이 형성될 수 있으면, 세계적 규모로도 유인이 발생한다. 하지만 단점은 시장 실패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정권의 포퓰리즘 정책에 따라 공짜 배출권이 남용되면, 제도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 세계 시장이 형성되려면, 세계적 기준에 따라 배출권 할당이 먼저 이뤄질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런 합의에 이르는 것이 정치적으로 쉽지 않다.
한편, 배출권 거래제에 대해서는 좌파적 비판도 존재한다. 시장화된 방식으로 해결하는 게 맞냐는 것이다. 특히 거래제는 금융기관의 신사업 영역으로도 주목을 받고 있는데, 희소하다는 점에서 부동산 파생상품과 비슷한 ETS 파생상품과, 배출권 가격에 대한 헤지 성격의 금융상품들이 여럿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결
자본주의적 생산이 탄소 배출을 감축하는 데 자기 모순적 상황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윤 동기에 따라 무한한 자본축적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 어렵다. 기후의 재생산 비용이 추가되면 이윤율 하락은 더 빨라질 수밖에 없는데, 이윤율이 하락할 때 자본주의는 극도의 혼란에 빠진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다고 사회주의적 해법이 대안이 되기도, 현재로서는 어렵다는 점이다. 국유화와 계획경제를 핵심으로 하는 20세기 사회주의 모델은 자원 배분이나 기술혁신에 성공적이지 못했다. 양자 모두를 거부하는 탈성장론 역시 대안이 될 수 없다. 계획적 탈성장은 실현되기도 어렵고, 실현되더라도 기후 위기를 해결하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당분간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 내부에서 작동 가능한 기후 위기 해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에너지 전환을 위한 정부와 민간의 투자를 활성화하고, 탄소 예산을 실행하기 위한 수단들을 개발해야 한다. 에너지 투자의 경우 이미 선진국에서 여러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이다. 탄소 감축 수단으로는 탄소세와 탄소 배출권 거래제가 확대되고 있지만, 그 속도가 매우 더딘 상황이다.
5. 나아가며
기후 위기는 장기전이다.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기후 위기라는 계기로 좀 더 극단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에서 사회운동은 기후 위기가 가진 자본주의적 특성에 대해 좀 더 과감하게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그렇다고 기후 위기가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란 뜻은 아니다. 생태적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주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생태사회주의와 같은 담론은 현실사회주의의 모순은 내버려 둔 채 생태 강령만 강조하는 한계가 있다.
탄소 배출과 관련하여 당장 한국에서 문제가 되는 건 탈핵 쟁점이다. 2022년 대선에서도 쟁점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분석에 따르면, 탈탄소와 탈핵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시민의 생활에서나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 객관적 상황을 두고 시민 사이에 합의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탄소 배출 감축을 위해서는 탄소 배출권 거래제와 탄소세를 적절하게 조합하는 것도 필요하다. 탄소 거래제는 목적에 맞게 제대로 시행될 수 있도록 제도를 시급히 정비할 필요가 있고, 탄소세 역시 기본소득 재원 식으로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지 않도록 잘 설계할 필요가 있다. UN의 기후 위기 대응과 관련한 세계적 흐름에도 한국이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한국의 1인당 탄소 배출량이 세계 최상위라는 점을 시민들도 성찰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