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풀지 못한 문제들: 사랑, 여성, 가족
메리 게이브리얼, 『사랑과 자본』 서평
**이 글은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1 겨울호에 실린 서평 ‘마르크스 가족의 혁명에 대한 사랑, 그리고 남은 질문’에 답장 형식으로 작성한 또 하나의 서평입니다.
메리 게이브리얼의 『사랑과 자본』은 저도 감명 깊게 읽은 책입니다. 마르크스 가족의 삶을 다루는 평전이라는 주제만으로 충분히 관심을 끌 만한데, 저자가 너무나 생생하게 그들의 삶을 복원해내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장을 넘기던 기억이 납니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에는 마르크스 가족과의 내적 친밀감이 하늘을 찌를 듯해 누구와도 이들에 관한 수다를 떨고 싶었습니다. 주변에 열심히 추천했는데 책의 두께 때문인지 실제로 도전한 사람은 거의 없더군요. 그래서 지난 호에 실린 이혜인 동지의 서평을 반갑게 읽어 내렸습니다.
사실 저는 이 책의 제목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서평에서 ‘사랑과 자본’이라는 제목, 그중에서도 사랑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얘기하는 부분이 특히 좋았습니다. 서평은 책이 다루는 사랑을 세 가지 차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와 예니 부부의 사랑, 아버지 마르크스에 대한 세 딸의 사랑, 그리고 이 가족 모두가 공유하고 있던 혁명에 대한 사랑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서평의 문제의식에 동의하며 그것을 보충하는 차원에서,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세 가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 동지로서의 사랑
첫 번째 주제는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관계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마르크스 가족의 사랑 못지않게 중요한 한 축이 바로 엥겔스와 마르크스 사이의 ‘동지애’라고 생각합니다. 유복했던 엥겔스가, 자본에 대해 글이나 쓸 줄 알았지 돈을 벌 줄은 몰랐던 마르크스에게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둘의 사연일 텐데요. 이 책을 읽으며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둘의 관계가 얼마나 특별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1844년 8월 스물세 살의 엥겔스와 스물여섯 살의 마르크스는 처음 만나자마자 열흘 밤낮 동안 열띤 대화를 나눕니다. 이때 두 사람은 이론적 영역에서 완벽히 같은 의견을 확인합니다. 이후 둘의 교제와 공동 작업은 평생에 걸쳐 지속됐으나 주로 서신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1849년 마르크스가 당대 정치적 망명자들의 집결지인 런던에 자리 잡은 뒤에도 엥겔스는 사업(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방직공장) 때문에 맨체스터를 떠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870년 엥겔스가 사업을 정리하고 런던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런던과 맨체스터 사이에 매일같이(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편지는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뿐 아니라 가족 문제에 관한 사적인 내용도 상당 부분 포함했습니다. 마르크스뿐 아니라 예니, 마르크스의 딸들이 엥겔스와 주고받은 허물없는 편지를 보면 그들이 서로 정말로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에게 엥겔스는 가족의 일원이자, 어쩌면 가족 그 이상의 존재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마르크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이 엥겔스였다는 점을 이러한 ‘가족적’ 관계의 한 요인이라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엥겔스는 안정적인 수입이 없는 마르크스와 그의 가족에게 지속적으로 거액의 생활비를 보내줍니다. 세간의 상식으로 납득하기 힘들 엥겔스의 행동에는 혁명에 관한 공산주의적 이념과 마르크스의 천재성에 대한 확신이 배경으로 존재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간절하고 의미 있는 일에 가진 돈을 아낌없이 투자했던 것입니다.
“그가 십이 년간이나 엥겔스에게 돈을 요청한 것을 두고 냉소적인 사람들은 거지 근성이라고 비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엥겔스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자신이 번 돈에 대해 공산주의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즉 그 돈은 자신의 것이듯, 마르크스의 것도 될 수 있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당원’ 누구의 것도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엥겔스의 입장에서 마르크스는 당의 목표 성취를 위해 경제학 책을 쓰고 있으므로 그 돈에 대한 자격이 있었다.”
사소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가장 재미있던 대목은 1867년 『자본』 1권이 출간되었을 때 엥겔스가 유럽과 미국의 신문들에 익명으로 “최소한 일곱 편의 서평”을 기고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각기 다른 관점과 태도, 말투와 인격을 가장해서 말입니다. 이것은 엥겔스가 단지 마르크스의 물질적 후원자가 아니라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하는 열성적 지지자이자 마르크스 가족과의 ‘원팀’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물론 이러한 행동은 친구의 책이 지나치게 난해하다는 엥겔스의 걱정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마르크스의 가족과 엥겔스는 이 책의 출간을 오래도록 기다려 왔습니다. 그들은 『자본』이 부르주아의 머리에 던져진 미사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니는 이 책의 성공으로 경제적 곤궁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 역시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본』 1권은 당시에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지식인들에게조차 너무 어렵고 두꺼웠기 때문입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 사후에도 마르크스의 남은 가족을 헌신적으로 돌보았으며 『자본』 2, 3권을 비롯해 마르크스가 완성하지 못한 원고들을 정리하고 출판했습니다. 마르크스가 남긴 글을 정리하는 작업을 엥겔스는 ‘사랑의 노동’이라 불렀습니다. 오랜 동지와 다시 한 번 공동 작업을 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사회에서 사랑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성애적인 사랑, 또는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 간의 사랑을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같은 뜻을 지니고 그것을 향해 헌신하는 관계에서 서로에게 느끼는 신뢰와 애정, 상호의존, 기쁨 등에는 통속적인 사랑의 의미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관계를 보며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라는 신영복 씨의 문장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1844년의 운명적인 만남 이래 두 사람은 진심을 다해 서로의 존재에 감사하고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종종 엥겔스를 ‘자신의 또 다른 자아’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나의 뜻을 나만큼 잘 이해하고, 일생을 다 바쳐 그것을 함께할 수 있는 동지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삶은 성공한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비극으로 끝난 세 딸의 사랑
두 번째 주제는 비극적인 실패로 끝난 마르크스의 딸들의 사랑입니다. 마르크스의 세 딸 예니헨, 라우라, 엘레아노르는 각각 혁명운동과 관련된 남성들과 사랑에 빠져 결혼(엘레아노르의 경우 법적 결혼은 아니고 사실혼)을 하지만 결국 그 관계에서 크나큰 절망을 겪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이 마르크스의 개인적 삶에 관심이 생긴 계기가 “성년까지 살아남은 카를 마르크스의 세 딸 중 둘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읽었던 순간이라고 회상합니다. 그리하여 이 책은 마르크스의 일대기가 아니라 그의 딸들을 포함한 가족의 일대기로 쓰였습니다. 책의 중반 이후로는 딸들의 이야기가 대부분 비중을 차지하며, 셋 중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라우라의 장례식 장면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그만큼 마르크스의 딸들의 인생에 대한 이해는 이 책에서 무척 중요한 부분입니다.
세 딸의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마르크스의 아내, 예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가 자신이 꾸린 가족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의심하긴 어렵습니다. 그는 애정과 관심을 표현할 줄 아는 친근한 남편이자 아버지였고, 집 안에서 혁명운동이나 예술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것도 즐거워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가족에게 곤궁한 삶을 안겨주었으며, 집안일을 돌보아주던 헬레나 데무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프레디 데무트가 상징하듯 예니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기도 했습니다. (‘그 일’은 1850년 임신한 예니가 네덜란드의 친척에게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러 집을 떠난 사이에 벌어집니다.)
이 책의 독자들은 예니가 마르크스라는 개인뿐 아니라 혁명에 관한 그의 이념을 사랑한 동지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녀는 마르크스가 쓰는 글의 첫 독자이자 운동의 조언자 역할에 열정적이었으며, 남편이 글쓰기에 몰두할 수 있도록 집안의 복잡한 일거리들을 조율하고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집으로 몰려든 다양한 국적의 혁명가들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많은 혁명가가 예니의 아름다움과 친절함, 현명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합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눈에는 여성인 예니가 수행하는 역할이 마르크스의 또 다른 동지인 엥겔스의 역할과는 다른 종류의 것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상을 상당 부분 받아들이고 있던 예니는 자신의 ‘여성적’ 역할이 특별히 잘못되었다고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니에게 마르크스에 대한 헌신은 혁명에 대한 헌신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삶 속에서 예니는 가난과 질병, 몇몇 아이들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그것마저도 혁명운동의 일부라 여기며 감내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872년의 예니는 리프크네히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 모든 투쟁에서 우리 여성들은 더욱 힘든 일을 견뎌야 하는 것 같다”며, “남자들은 바깥세상과의 투쟁에서 힘을 끌어내고, 대규모의 적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더욱 힘을 냅니다. 우리는 집 안에 앉아 양말을 깁지요. 그런 일은 인생에 맞설 용기를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갉아먹는 걱정과 일상의 작은 불행을 없애주지 못합니다.”라고 적었습니다. 예니가 겪었던 문제는 딸들의 삶에서도 이어집니다.
마르크스의 세 딸 중 가장 먼저 로맨스에 뛰어든 사람은 둘째 라우라입니다. 1868년 스물세 살의 라우라는 폴 라파르그라는 쿠바 태생 프랑스인과 결혼합니다. 그는 파리의 학생운동을 통해 인터내셔널에 참여한 20대 청년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결혼을 승낙하기 전에 라파르그의 경제 상태를 명확히 알아야겠다며 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자네는 내가 혁명운동을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희생했다는 것을 알 걸세. 나는 후회하지 않아. 오히려 그 반대지. 만약 삶을 다시 살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똑같은 일을 하게 될 걸세. 그렇지만 결혼만은 하지 않을 거야. 내 능력만 닿는다면, 내 딸들만은 그 아이들의 어머니가 좌초했던 풍랑에서 구해주고 싶네.”
마르크스와 예니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가정에서 자란 라파르그가 마음에 들었고 그가 안정적 직업을 가지리라는 기대로 결혼을 허락합니다. 그러나 라우라의 결혼은 마르크스가 언급한 ‘풍랑’ 속으로 돌진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라우라와 함께 프랑스로 돌아간 라파르그가 의학 공부를 포기하고 직업 혁명가로서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현모양처가 되기를 원했던 라우라는 남자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혁명운동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프랑스 여자들 사이에서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자유로운 사랑을 옹호하는 프랑스 문화에 따라 프랑스 남편들은 자기 아내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일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이런 문화가 가족에 대한 무책임함으로 이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습니다. 라우라가 시부모와의 갈등, 임신과 출산, 그 과정에서 얻은 질병들로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낼 때 라파르그는 그녀 곁에 없었습니다.
라우라는 결혼 후 4년 사이에 세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들은 모두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셋째 아이의 임신과 출산, 사망은 1871년 파리 코뮌과 시기가 겹쳤습니다. 라우라의 남편은 코뮌이 한창일 때는 혁명운동에 헌신하느라 집을 비웠고 코뮌이 진압당한 후에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일생 다시는 임신을 하지 않았으며, 이 시기에 잃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슬픔, 인생에 대한 회한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하게도 이런 경험은 라우라가 이전처럼 혁명운동의 대의에 몰입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메리 게이브리얼은 “마르크스 가의 여인들 중 라우라가 유일하게 아버지가 약속한 미래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문을 품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가족들이 지불해야 할 대가가 너무 컸다.”고 쓰고 있습니다.
첫째 예니헨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봅시다. 예니헨은 가난한 가정의 장녀답게 조용하고 어른스러운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책에 따르면 “열여섯 살인 그녀는 성실하고 총명했으며 로맨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예니헨은 둘째 라우라가 결혼한 후 집에서 독립해 가정교사 생활과 혁명운동을 병행했습니다. 아일랜드 수감자를 방어하는 그녀의 기사는 상당한 반향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독립생활은 3년여 만에 짧게 마무리되고 말았습니다. 혁명운동(특히 1871년 파리 코뮌)과의 연관성을 들켜 가정교사 자리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다시 부모님의 집에 들어온 예니헨은 마르크스와 교류하던 청년인 샤를 롱게를 만나 그의 구애를 받아들입니다. 샤를 롱게는 파리 코뮌 이후 런던으로 망명한 프랑스 사회주의자였습니다. 예니헨은 스물여덟 살이던 1872년에 결혼식을 올립니다.
라우라와 달리 예니헨은 결혼 후 남편과 함께 영국에 살았기 때문에(마르크스의 집에 얹혀살 때도 있었습니다) 가족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롱게가 안정적인 직업을 찾지 못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들은 롱게의 어머니가 보내주는 약간의 돈과 예니헨이 가정교사와 강사 일로 벌어오는 돈으로 근근이 생활했습니다.
1880년 망명자들에 대한 사면이 단행되자 롱게는 파리로 돌아갑니다. 공화국 프랑스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니헨은 이 결정에 크게 절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곧 예니헨도 세 아이를 데리고 남편이 있는 파리로 향합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의 삶은 열악했습니다. 춥고 엉망인 집 안에서 아이들은 돌아가면서 아팠지만, 남편은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네 번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시기에 셋째 엘레아노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예니헨은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삶에 지쳤다”, “불쌍한 아이들만 아니었다면 이런 삶을 벌써 때려치웠을 것이다”라며 좌절감을 내비칩니다. 1882년 예니헨은 자신이 또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합니다. 9월에 막내딸이 태어났고 예니헨은 아기의 이름을 예니라고 지었습니다. 하지만 출산 후 예니헨의 건강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어 그녀는 다음 해 1월 사망합니다.
(1881년 예니의 죽음 이후 마르크스는 육체적·정신적인 건강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다음 해에 들려온 딸의 사망 소식은 그의 삶의 의지를 꺾어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예니헨의 사망 약 두 달 뒤인 3월 14일에 마르크스는 세상을 떠납니다.)
마르크스의 막내딸 엘레아노르는 본명보다 ‘투시’라는 별명으로 많이 불렸습니다. 별명은 프랑스어의 ‘tousser’(기침하다)에서 온 것으로 그녀가 아기이던 시절 잔기침을 계속해서 붙여진 것입니다. 여기서도 그녀를 투시라고 지칭하겠습니다.
투시의 인생은 언니들보다 많이 알려진 편입니다. 국내에도 『엘리노어 마르크스』라는 제목으로 스즈키 주시치가 쓴 평전이 번역되어 있으며, 2020년에는 그녀를 주제로 『미스 마르크스』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사회진보연대도 2009년 기관지 《사회운동》에서 ‘혁명운동과 여성’ 기획연재 첫 번째 기사로 그녀를 다루었습니다. 그만큼 투시는 혁명과 예술, 사랑을 추구하며 극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10대의 투시는 아일랜드 해방운동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셰익스피어를 사랑했고 연극을 하고 싶다는 열망도 강했습니다. 열일곱 살에는 서른 네 살의 프랑스 사회주의자 리사가레와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마르크스와 예니는 이 교제에 반대했고 둘의 연애는 9년간 지속되다 1882년에 끝이 납니다.) 성인이 된 그녀는 영국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며, 런던 빈민가의 노동자와 유대인 이민자의 현실에 관심을 뒀습니다. 1889년 부두노동자 파업이 벌어졌을 때는 열정적인 연설로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투시는 언니들과 달리 평생 아이를 갖지 않았고 독립적 개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갔습니다. 첫째 예니헨은 “적어도 우리들 중 한 명은 부엌데기로 인생을 보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기쁘구나”라며 투시의 성취를 응원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투시가 에드워드 에이블링이라는 전형적인 ‘나쁜 남자’에게 빠져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입니다. 에이블링은 마르크스를 우상으로 여기며 런던에서 정치 활동과 강의,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던 남성이었습니다. 1883년 투시는 그와 동거를 시작합니다. 에이블링은 아내의 재산 상속을 목적으로 이혼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에게 상습적으로 돈을 빌리고 갚지 않았으며 거짓말, 사치, 여성편력으로 평판이 나빴지만, 그것은 투시의 사랑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투시는 ‘결함 많은 성격’으로부터 그를 구하는 것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투시와 에이블링의 관계가 10년 넘게 지속되는 동안 에이블링 때문에 많은 친구와 동료가 투시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 급기야 1897년에 에이블링은 투시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채로 스물두 살의 여배우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리고 투시와 여배우 사이를 오가며 생활합니다. (2년 전에 그의 원래 아내가 사망해 에이블링은 아내의 재산을 상속받았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이 흐른 어느 아침, 투시는 동료 사회주의자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은 뒤 독약을 주문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편지는 남아있지 않지만 아마도 투시에게 에이블링의 비밀 결혼 소식을 알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투시는 에이블링과의 관계 문제뿐만 아니라 혁명운동에서도 좌절을 겪고 지쳐있었습니다. 메리 게이브리얼은 투시의 죽음을 “격류 속에서 익사한 것과 같았다”고 쓰고 있습니다.
투시 같이 주체적이고 능력 있는 여성 활동가가 왜 에이블링 같은 남성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지어 비극적인 죽음을 선택했을까요? 미스테리를 풀기 위해, 저는 그녀가 ‘독립적 개인으로서의 삶’과 ‘여성으로서의 역할·욕망’을 조화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투시가 태어난 1855년은 마르크스와 예니의 여덟 살 난 아들 에드가가 장결핵으로 사망한 해입니다. 에드가를 대신하듯 투시는 집에서 아들 같은 역할을 하며 대범하고 활달한 성격으로 성장했습니다. 어린 투시는 자신이 여성이라는 조건을 무시 또는 극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어머니보다 아버지에 대한 애착과 존경심을 훨씬 크게 느꼈다는 사실은 상징적입니다.
그녀는 종종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요구받기도 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문화에서 노부모를 봉양하는 일은 막내딸의 의무였다고 합니다. 공교롭게도 투시는 결혼하지 않은 막내딸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런 역할이 기대되었습니다. 노년의 예니와 마르크스가 아플 때 투시는 가족을 돌보는 일로 자기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다며 강한 거부감을 표합니다. 마르크스의 건강 회복을 위한 여행에 억지로 동행하게 된 스물일곱 살의 투시는 심각한 거식증과 불면증 증세에 시달리다 예니헨의 도움으로 그 역할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부모의 마지막 순간에 가족을 돌보기보다 자기를 앞세웠다는 죄책감을 떠안고 오래도록 괴로워했습니다.
투시와 에이블링의 관계가 시작된 것은 예니와 예니헨, 마르크스가 연달아 세상을 떠난 직후였습니다. 가장 의지하던 사람들을 잃고 사랑을 갈구하던 투시는 에이블링의 강렬하고 지적인 에너지에 매료되었습니다. 투시는 에이블링을 만나고서야 자신의 여성성(성적 욕망과 이끌림)을 자각했다고 회고합니다. 하지만 에이블링을 향한 사랑은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와 같았습니다. 가슴 아픈 일은 투시가 관계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려 애썼다는 점입니다. 우울증에 빠진 투시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혐오를 내비칩니다. 가장 친한 친구인 올리버 슈라이너에게 “나에겐 (…)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요소라곤 거의 없어. 네가 날 돌보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미스테리들 중 하나야”라고 말했으며, 다른 친구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가슴 깊이 혐오하는 인간인 바로 나 자신”이라 고백했습니다.
에이블링과의 관계에서 실망을 반복하던 1880년대 중후반 투시는 런던의 친구들과 함께 헨릭 입센의 연극 〈인형의 집〉을 보고 흥분한 상태에서 작품의 의미에 대해 토론했다고 합니다. 투시의 제안으로 투시가 노라, 에이블링이 남편 역을 맡아 『인형의 집』 낭독회를 가졌다는 것, 투시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을 읽고는 그것을 영어로 번역했다는 사실은 인상적입니다. 두 작품은 자신에 대한 남편의 사랑이 인간적 존중이라기보다 ‘인형’에 대한 사랑과 같다는 여성의 자각, 낭만적 사랑과 결혼 이후에 여성이 겪는 공허함 등을 다룹니다.
19세기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역할은 가족 또는 남성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었습니다. 결혼과 임신·출산으로부터 거리를 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투시는 이런 역할을 거부하고 혁명가, 예술가로서의 주체적인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투시에게도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삶의 다른 모든 면에서처럼 에이블링에 대한 사랑에도 치열했습니다. 에이블링의 자기중심적인 행동이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더 큰 사랑으로 그를 이해하고 포용하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인형의 집』에서 노라의 남편이 그랬듯이 에이블링은 여성을 인격체로 존중하고 사랑할 줄 모르는 남성이었습니다. 절망은 오롯이 투시의 몫으로 남습니다.
메리 게이브리얼은 마르크스의 세 딸의 사랑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마르크스의 딸들은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났다. 부모는 서로를 - 거의 광적으로 - 사랑했다. 그리고 카를에 대한 예니의 헌신은 고귀한 자기희생의 전범이었다. 딸들은 각자의 결혼에서 그런 관계를 모델로 삼았지만 깊은 사랑도, 서로 고통을 나누는 것도 얻지 못했다. 예니헨, 라우라, 투시 세 사람 모두 혁명의 깃발을 흔드는 남자들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지만, 남자들은 붉은 혜성처럼 궤도를 따라 멀리 사라져버렸고, 그들은 뒤에 남겨진 채 혼자 인생과 씨름해야 했다.”
예니헨, 라우라, 투시는 모두 마르크스와 예니의 관계라는 모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마르크스의 가족 안에는 강렬한 사랑(혁명에 대한 사랑, 마르크스와 예니의 사랑, 마르크스에 대한 딸들의 사랑)이 존재했습니다. 사랑은 경제적 어려움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은 딸들이 자기 인생의 실패에서 빠져나오는 데 도움보다는 걸림돌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딸들이 선택한 남성들이 마르크스보다 훨씬 혁명과 사랑에 서툴고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을 때, 그녀들은 예니가 그랬던 것처럼, 남편의 모든 결점을 견디며 변함없이 헌신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를 몰랐습니다.
마르크스 가족의 사랑은 그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19세기 가족 형태의 전형적 틀을 넘어서지 못했으며, 그것은 딸들의 인생에 치명적이었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의 형성과 동시에 발전한 빅토리아적 가족형태는 낭만적 사랑과 모성의 가치를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남성 가장의 욕망을 중심으로 하여 여성의 주체적인 인생을 희생하면서 굴러갑니다. 마르크스는 딸들에게 엄청난 지적 세례와 혁명에 대한 열정을 물려주었으면서도 이러한 가족의 모습, 여성의 역할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마르크스의 딸들이 젊은 시절 지니고 있던 총명함과 혁명운동에의 열의가 결혼 생활을 겪으며 속절없이 사그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마르크스와 예니가 당대 자본주의를 변혁이 가능한 체제로 사고했던 것처럼 가족 제도 역시 변화 가능한 구조로 통찰했다면, 그래서 딸들에게 남편 없이도 자신의 인생을 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떤 사랑의 경우에는 단호한 헤어짐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가정을 해보게 됩니다.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관계
세 번째 주제는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관계입니다.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마르크스는 프레디 데무트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평생토록 정당한 대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집안일을 돌보기보다 어지럽히는 가족 구성원이었고, 그렇다고 가장으로서 경제적 역할을 하지도 못했습니다. 아내와 딸을 사랑했지만 그들이 ‘남성과 동일한 방식으로’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마르크스는 딸들을 문학, 정치, 역사, 과학 등의 모든 세계로 인도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는 딸들이 집 안의 자기 옆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는 것으로 만족하기를 바랐다. 남편감이 와서 별반 다를 것도 없는 또 다른 그런 세상으로 그녀들을 데려가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놀랍게도 그는 딸들이 스스로 무엇인가 이룩해보고 싶다는 갈망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도 역사적으로 돌아볼 가치가 없는 ‘한심한 가부장’이었다고 치부하면 되는 것일까요? 그런 식으로 오늘의 잣대를 통해 역사 속의 인물들을 재단하고 비난하는 일은 자기만족 외에는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영웅을 추앙하기 위해 그의 개인적 치부를 숨기거나(소련에서 마르크스의 혼외자에 관한 언급이 금기시되었듯이)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 역시 경계해야 하겠지만요.
우리는 마르크스 역시 그가 살던 시대의 한계 속에 있던 인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르크스라는 개인의 이러한 한계는 마르크스 이론의 한계와도 연결됩니다. 마르크스 자신의 페미니즘적 결함이, 마르크스주의라는 사상이 그 자체로 여성의 권리라는 문제를 모두 설명하고 해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 우리는 다시 엥겔스를 소환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엥겔스의 성취와 한계는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을 다루기 위한 중요한 관문입니다.
우선 엥겔스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는 아일랜드 노동자인 메리 번스와, 메리가 1863년에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녀의 동생인 리지 번스와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계급적 차이가 극명했으므로 엥겔스의 가족과 친척들은 이들을 정식 아내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엥겔스가 결혼하지 않은 것은 부모의 반대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결혼 제도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르주아적 결혼이 갖는 위선적인 측면을 간파했으며, 두 사람이 사랑으로 결합되어 있는 한 교회나 국가의 승인은 무용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1878년 리지 번스가 임종 직전에 결혼을 원하자 엥겔스는 목사와 증인을 대동하여 리지의 침대맡에서 결혼식을 거행합니다.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에서는 결혼식 없이 결혼 생활을 한 사람은 연옥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죽음을 목전에 둔 그녀는 마음이 약해져 그 이야기를 믿었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메리와 리지는 문맹이었기 때문에 그녀들의 생각이나 일생을 자세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가족(특히 투시)에게 하층 노동자계급의 현실과 아일랜드 해방운동의 정신을 알려주는 데에 작지 않은 역할을 했습니다. (엥겔스의 결혼 생활에 관해서는 1989년 국내에 번역·출간된 다마이 시게루의 『엥겔스의 아내』를 참고해볼 수 있습니다.)
엥겔스는 결혼 제도에 비판적인 입장을 지니고 그러한 입장을 실천했을 뿐 아니라, 여성 억압에 대한 연구에도 기여했습니다. 1884년 출간한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여성 억압에 대한 이론적 작업의 출발점입니다. 이 책에서 엥겔스는 19세기의 인류학적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가족 형태의 역사를 분석합니다. 그에 따르면 원시 공산주의 사회는 생산의 중심이 가족에 있었고 모권 사회로서 여성의 지위가 높았는데, 가족 밖에서의 생산이 중요해지면서 성별 분업을 통해 여성의 지위가 전복되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라고 표현했습니다. 엥겔스의 분석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여성억압의 소멸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철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엥겔스는 가족 제도의 역사적 변화를 분석했으며, 부르주아적 가족 제도는 사랑이 아니라 경제적 필요에 의한 것으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소유를 전제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이것은 무척 중요한 진전이었습니다. 그는 여성 억압을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관심사인 사회적 생산과 연결하고, 여성 해방이 노동자계급의 해방과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자가 여성 문제를 고민하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엥겔스의 분석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여성 억압을 ‘경제적 조건’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여성억압에 대한 엥겔스의 정식화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에는 다양한 편향이 발생합니다. 여성 문제의 해결을 ‘혁명 이후’의 과제로 미뤄둔다든지, 페미니즘 운동의 여러 의제를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치부하며 노동자계급 여성의 투쟁만을 강조한다든지 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영국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실라 로보섬은 「마르크스 가족의 가려진 사생활」이라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번역본이 권현정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현재성』이라는 책에 실려 있는데 이 글은 마르크스의 딸들의 인생에 대해 앞서 제가 서술한 것보다 풍부한 해석을 덧붙이고 있으니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이 글에서 로보섬은 “만약 엥겔스가 자신이 알던 중간계급 여성들의 사적인 경험을 이해하는 데 좀 더 흥미가 있었더라면, 마르크스 딸들의 삶이 그의 이론에 결점이 있다는 경고로 기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엘러너(인용자 주: 엘레아노르)는 경제적으로 독립적이었지만 성적으로는 여전히 에드워드에게 의존적이었다. 그리고 제니(인용자 주: 예니헨)의 세 아이들이 한밤에 깨서 그녀를 미칠 지경으로 만들었던 수면 부족을 사회화하기는 곤란했을 것이다.”라고 지적합니다. 마르크스의 딸들의 삶이야말로 경제적 조건으로 환원되지 않는 여성 문제의 실존을 고통스럽게 증언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르크스는 당대의 수많은 지적 성취를 탐독하고 자신의 이론에 통합하려 했지만 가족이나 여성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에도 여성의 권리에 대한 논쟁과 실험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되새긴다면 이 분야에 대한 마르크스의 맹목은 의아한 일입니다. 마르크스에 비하면 엥겔스는 자신의 삶에서도, 이론적 작업에서도 결혼, 가족, 여성을 둘러싼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해결해보고자 노력했습니다. 자본주의적 생산과 여성 억압의 연결은 엥겔스의 기여지만, 그 역시 경제적 조건으로 환원되지 않는 여성 문제를 인식하는 데에는 한계를 보였습니다.
『사랑과 자본』은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운동 궤적을, 그 길에 함께했던 여성들의 존재와 ‘함께’ 보여줍니다. 혁명의 역사 속에 그 존재와 역할이 지워지기 일쑤였던 여성의 모습을 복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작업입니다. 하지만 이 책에는 더욱 특별한 의의가 있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미처 풀지 못한, 즉 사랑, 여성, 가족이라는 문제를 그 가족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르크스 가족의 삶은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운동이 왜 여성의 해방과 결합해야 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합니다.
마르크스의 딸들과 우리는 닮아 있다
오늘 우리의 이야기를 하면서 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마르크스의 세 딸이 겪은 실패는 지나간 시대의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19세기의 높은 유아사망률과 갖가지 질병, 빅토리아 시대가 여성에게 부과한 의무와 편견으로부터 우리는 상당 부분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세 사람이 겪었던 문제가 오늘날 여성 활동가가 겪는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로 그렇습니다.
첫째, 여성의 결혼, 특히 임신출산이 여성 활동가 자신의 성취와 양립 가능하냐는 문제입니다. 21세기의 여성에게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으로 여겨집니다. 안전하고 간편한 피임법의 발명으로 임신에 대한 통제는 훨씬 쉬워졌으며 어린이집 같은 보육시스템도 일정 정도는 갖춰져 있습니다. 예니헨처럼 원치 않은 임신을 반복하며 몸과 마음이 망가지거나 라우라처럼 종일 집에 홀로 남아 아픈 아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으로부터는 여성의 현실이 나아졌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 활동가는 활동가로서의 삶과 육아 중 한쪽을 포기하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만약 커리어와 육아 둘 다 붙잡기를 원한다면 방법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 방법이란 많은 경우 본인을 ‘갈아 넣는’ 일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 아닌 선택의 과정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구체적인 고민을 맞닥뜨립니다. 물론 자기 일을 사랑하는 수많은 전문직 여성도 이러한 선택지들을 놓고 저울질을 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 여성의 직업 활동에는 혁명운동과는 다른 경제적 보상과 사회적 지위가 보장된다는 점일 것입니다.
둘째, 성적 자유가 저절로 여성의 권력을 보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여성에게 위협적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투시는 가족과 친구에게 에이블링과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사랑이 있다면 법적 결혼은 중요치 않다고 강변했습니다. 투시의 생각은 그녀가 믿고 따랐던 엥겔스의 신념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면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혼 관계의 여성을 사랑하고 존중했던 엥겔스와 달리, 현실에서 많은 남성이 이러한 ‘의무 없는 관계’를 악용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 여성에게는 과거에 비해 자유로운 연애와 성적 경험이 허용되는 편이지만, 여성은 언제라도 그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성적 폭력, 물리적 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는 위험을 염두에 두곤 합니다. 직접적인 폭력이 발생하는 관계를 제외하더라도 이성애 관계에서 많은 여성이 기대와 실망, 집착과 체념을 오가며 자신을 갉아먹습니다. 지금의 사회에서 이성애 연애란 상대의 감정과 생각을 존중하는 관계맺음을 할 줄 모르는 남성, 내 욕망보다 상대방의 욕망을 먼저 배려하는 여성의 결합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계의 비대칭성은 남성이 나이·직급·경제력에서 더 큰 권력을 지니고 있거나 유부남인 연애에서 극대화되곤 합니다. 투시가 그랬던 것처럼 여성 활동가는 결혼 제도나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랑을 지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적당한 사람을 만나 결혼 제도에 안착하는’ 일반적인 선택을 하는 여성보다 더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놓이기도 합니다.
셋째, 여성 활동가가 자신을 저평가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앞선 문제들보다 미묘하지만 못지않게 강력한 것입니다. 예니헨과 라우라에게도 정치적 활동에 대한 욕구가 있었지만, 그녀들은 특유의 ‘나서지 않는’ 성격으로 남편에게 그 역할을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반면 투시는 남들이 보기에 충분히 유능하고 매력적인 활동가였음에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기혐오에 시달렸습니다. 여성들이 자신의 능력과 자질을 비관하여 열등감에 시달리거나 인생에서의 성취를 타인(연애관계 또는 자녀)에게서 찾으려는 일은 오늘날에도 드물지 않게 존재합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여성에게 적합한 사회적 표상, 즉 정치적·경제적·문화적 힘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성은 여성도 지적 능력, 직업적 성취, 성적 욕망, 개인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받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겸손, 자제, 친절, 아름다움 등의 ‘여성적’인 태도를 요구받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과 자아 정체성을 다루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지만 원인이 사회적 조건에 있다고 해결을 사회 변혁 이후로 미뤄둘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여성 활동가가 매 순간 직면해야 하는 현실이고, 활동가로서의 성장 또는 생존과도 직결되는 문제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지닌 가능성과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발전시키는 것은 여전히 여성에게 중요한 과제입니다. 여성 활동가 자신의 노력과 여성간의 연대가 둘 다 필요할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딸들과 우리의 모습은 분명 닮았습니다. 하지만 절망적이지 않은 것은,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을 어쩔 수 없는 개인의 고통이 아니라 바꿔야 할 현실로 이해하고, 공동의 운동 과제로 삼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풀지 못했던 사랑, 여성, 가족이라는 문제를 운동의 과제로 삼는 일이 쉬울 리는 없습니다.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것만큼 또는 그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자본주의의 변혁과 여성의 해방을 동시에 추구한 혁명가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이 적지 않습니다.
19세기 초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은 공동체 속 시민의 권리를 구성할 때 여성의 성욕과 모성에 관한 권리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여성의 권리를 둘러싼 다양한 토론을 진행하고 사회주의 공동체에서 성적 자유와 공동 육아,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실험했습니다. 20세기 초 러시아혁명기 여성 혁명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혁명이 여성에게 정치적·경제적 평등을 보장하고 가사노동을 사회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여성 문제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여성들의 정신적 독립,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사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콜론타이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과 남성 노동자를 대상으로 글을 쓰고 강연을 했습니다.
19~20세기와는 사회적 조건이 엄청나게 바뀌어버린 202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이나 콜론타이 같은 여성 혁명가들의 시도를 이어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과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한계를 넘어서면서, 동시에 예니와 그 딸들의 좌절도 극복해낼 수 있을까요? 이것은 자본주의의 변혁과 페미니즘 운동이 둘 다 절실한 문제라고 여기는 오늘의 활동가가 답해야 할 몫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