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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과 레닌의 민족자결론

민족문제에 관한 레닌과 스탈린의 논쟁에 담긴 함의

  • 김성균
쟁점분석
우크라이나 전쟁과 레닌의 민족자결론
민족문제에 관한 레닌과 스탈린의 논쟁에 담긴 함의

김성균(정책교육국장)

1. 서론
20세기 초도 아닌 2022년 시점에 민족자결권을 논하는 글이 필요한가에 의아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이 글이 작성된 이유는 민족자결권과 관련하여 《노동자연대》가 레닌을 원용하여 제시하는 입장이 적절한가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동자연대》는 2022년 6월 7일에 발표한 기사, “우크라이나의 ‘자결권’을 지지해야 하는가”에서 “레닌은 (…) 분리·독립의 권리를 포함한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을 줄기차게 옹호했다. 그러나 (…) 자결권 옹호는 기본적으로 국제 노동계급의 단결을 위한 것이었다. (…) 레닌은 피억압 민족의 반란이 제국주의를 약화시킬 수 있고, 그래서 국제 노동계급이 그들의 자결권을 지지하며 그런 반란들을 자국 지배계급과 싸우는 데에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면서 “상대국의 제국주의만을 반대한다면 그것은 자국 제국주의(또는 친제국주의)에 힘을 실어 주는 꼴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크라이나 사회주의자들의 출발점은 서방과 러시아 모두의 제국주의와, (서방 제국주의에 협력하는) 젤렌스키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쓰고 있다. 즉 상대 제국주의에 힘을 싣는다면 그 자결권을 지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8월 16일에 작성된 기사, “레닌과 민족자결권 ―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살펴본다”에서는 레닌의 자결권에 관해 좀 더 자세히 다룬다. 기사에 따르면, “레닌이 지지한 민족자결권은 (…) 모든 분리·독립 요구를 지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이 구체적 현실에서 투쟁에 미치는 효과를 따져봐야 한다. 그 기준은 노동계급의 국제적 단결과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쟁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노동자연대》의 주장을 요약하면, 노동계급의 국제적 단결과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쟁에 이바지하지 않는 자결권은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레닌의 민족자결권을 《노동자연대》의 방식대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 옳은가. 
우리는 민족자결권에 대한 《노동자연대》식의 이해는 다름아닌 레닌이 당내에서 투쟁했던 ‘노동자의 자결’ 개념에 더 가깝다고 본다. 스탈린이 대표적으로 주장한 노동자의 자결은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에 복무하는 경우에만 자결권이 인정될 수 있다는, 혹은 프롤레타리아만이 자결권을 갖는다는 의미다. 즉 자결권에 대한 선택적 지지의 입장이다. 이는 어떤 수사를 붙이더라도 레닌의 개념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레닌은 민족의 자발적 결정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민족자결권 개념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레닌은 1차 세계대전 당시 “한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한 민족해방 투쟁이 어떤 조건하에서는 다른 열강의 제국주의적 목표를 위해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유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민족자결권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제국주의 전쟁이 벌어지는 정세 속에서도 피억압민족의 의사를 존중해 민족해방투쟁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레닌의 자결권을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항쟁하는 우크라이나 민중의 의사를 존중하며 그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그들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문에서는 마르크스의 민족자결권 개념, 민족자결권을 둘러싼 20세기 초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논쟁과 레닌의 자결권, 노동자의 자결과 폴란드 침공, 소련과 소연방 헌법의 성립 과정을 검토하며 이를 논증한다.
2. 마르크스와 민족자결권
프랑스 혁명 이후부터 1848년 혁명 이전까지, 민족/국민은 부르주아에 한정될 따름이었다. 프롤레타리아는 이에 속하지 못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고 말한 배경이었다. 이 경구는 프롤레타리아가 완전한 국민의 일원이 되는 것에서 배제되는 상황에 대한 항의의 의미였는데, 이는 바꿔 말하면 “프롤레타리아는 우선 무엇보다도 정치 주권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카의 『볼셰비키 혁명사』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1848년 이전까지는 민족자결 문제에 대해 고찰할 기회를 갖기 어려웠으며 그 이후에야 비로소 이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1848년 즈음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민족자결 문제에 대해 입장을 요구받았을 때, 그들의 입장은 자유주의자나 민족주의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첫째, 대규모의 강력한 단위의 구성에 이르게 될 요구는 받아들이지만, 역으로 대규모의 국가를 분할해 소국을 창설하게 될 요구는 거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르크스는 「독일에서의 공산주의당의 요구들」에서 “독일 전체는 단일한 불가분의 공화국으로 선언된다”고 쓰고 있다. 이는 당시 자유주의의 견해와 일치함과 동시에 현대의 경제발전은 대규모의 단위가 필요하다는 『공산당 선언』의 견해와도 일치했다. 둘째, 부르주아의 발전이 충분히 이뤄져 궁극적인 프롤레타리아의 활동에 대해 유망한 영역이 될 수 있는 국가들의 요구에 대해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셋째,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비롯해 19세기 당시 진보적 사상가들은 러시아가 유럽의 가장 강력한 반동세력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는 러시아가 범슬라브주의 정책을 통해 유럽을 지배하려 한다는 우려로 인한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를 받았던 야만적 동양의 문화를 대표하는 국가로, 서방은 문명화된 민족으로 인식되었다. 넷째, 민족에 관해서는 일관된 이론보다는 당시의 상황에 따르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그 후에 일어난 폴란드 봉기는 영국 노동자와 프랑스 노동자가 최초로 만나는 기회가 되었고, 이는 제1인터내셔널이 창립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마르크스는 폴란드 봉기에 대해 러시아에 타격을 준다는 차원에서 지지했다.) 그리고 폴란드 봉기를 계기로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민족자결에 관한 논의가 시작된다. 인터내셔널은 1865년 9월에 브뤼셀에서 첫 총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으나, 여러 조건으로 인해 개최되지 못하고 그 대신 런던에서 예비회담을 소집한다. 1865년 9월 25일부터 9월 29일까지 개최된 이 회담에서는 다음 대회에서 다룰 의제를 논의했는데, 그 의제 중에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유럽 침공과 통합적이고 독립적인 폴란드의 재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폴란드 문제가 대회 의제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프루동주의자들의 주장이 있었지만, 예비회담에서는 폴란드 독립의 회복에 관한 항목을 유지했다. 그리고 1866년 제네바에서 1차 총회가 개최되었을 때, 마르크스는 예비회담에서 결정된 의제에 관한 입장을 담은 「임시 총평의회 대의원들을 위한 지침들」을 제출한다. 지침 9번은 폴란드 문제에 관한 것이었는데, 프랑스어 부제는 “민족자결권을 실행하고 폴란드의 민주적, 사회적 기반을 회복시킴으로써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소멸시킬 필요성”이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민족자결이 폴란드에 한정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기존 입장을 정정한다. “이전에 나는 아일랜드가 영국에서 분리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현재로서는 비록 분리 이후에 연방제도로 나아가게 된다 하더라도 분리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이후 1866년 프러시아-오스트리아 전쟁(독일의 통일과정에 개입하려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쟁)이 발발했을 때, 라파르그는 민족은 미신일 뿐이라고 규정하며 평화를 설교했다. 이에 마르크스는 “민족성을 부정함으로써 무의식중에 이들 민족이 프랑스 민족이라는 하나의 모범적인 민족 속에 동화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지적하며 반박했다.
이후에는 민족자결과 관련한 문제가 불거질 뚜렷한 계기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1896년 제2인터내셔널 런던대회의 한 결의에서는 다시 한번 민족자결에 관한 결의가 이뤄졌다. 이 대회에서는 “모든 민족의 완전한 자결에 대해서 지지를 선언”했다. 
3. 20세기 초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민족문제 논쟁
: 레닌, 오스트리아파, 로자
지금까지 마르크스의 민족자결권을 살펴봤다. 민족문제 자체가 1848년 혁명 이후에야 서서히 쟁점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체계적인 저작으로 민족문제를 정리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점차 소수민족의 자결권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민족문제에 대한 견해를 계승해 발전시킨 사람이 바로 레닌이었다.
레닌의 민족자결에 관한 입장은 논쟁 속에서 형성되었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당 강령은 “모든 민족이 국가를 구성할 수 있는 자결권”을 인정했다. 이 언급은 러시아에 속하는 민족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플레하노프는 이 말이 오직 차르 정권에만 적용될 수 있도록 ‘국가’가 아니라 ‘제국’으로 규정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레닌은 이렇게 제한을 두는 데 반대했다.
민족자결에 대한 레닌의 견해가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가 두 번 있었다. 첫 번째 계기는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과의 논쟁이다. 이들은 민족자결권이 아니라 비영토적인 문화적 자치를 제안했는데, 국경을 변경하지는 않되 나라 안에서 각 민족이 일정한 자치권을 확보케 하라는 제안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당내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레닌과 소수 고참 볼셰비키만이 문화적 자치 제안에 반대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는 민족자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며 단지 두 가지, 즉 “정치적 또는 시민적 자유와 권리의 완전한 평등”, “그리고 어떤 민족에게나 부여되는 자결권”만이 관심사라 주장했다. 특히 후자는 분리의 권리를 의미했다. 레닌에게 자기결정의 자유는 분리독립의 선택과 정치적 독립을 의미했다. 그리고 분리 독립이라는 선택지가 없다면 민중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여겼다. 만약 어떤 민족이 분리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다면 개개의 성원들은 동등한 시민의 권리를 누릴 수는 있으나 민족이라는 차원에서는 어떤 권리도 갖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 번째 계기는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논박이다. 로자는 민족독립은 부르주아의 관심사이므로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는 이에 관심 갖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자결권 개념은 계급이나 계급투쟁과 같은 더 중요한 문제로부터 관심을 분산시키는 공허하고 파괴적인 것으로 보았다. 로자는 이런 근거로 민족자결권을 부정하고 폴란드의 독립에 반대했다. 폴란드에서 독립은 부르주아의 관심사이기에 반동적이며 노동자 계급은 사회주의를 향한 계급투쟁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첫째, 독립 민족국가의 형성은 모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주요 경향이므로 자본주의 발달은 민족자결권과 불가분의 관계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민족자결권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한 것이며, 민족문제를 특정한 시기·조건과 연관지어 고려하지 못한 것이라 비판한다. 즉 민족자결권이 곧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동의어라는 로자의 견해는, 민족운동이 진보성과 혁명적 잠재력을 가질 수 있음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둘째, 지배민족이 다른 민족의 자결권을 부정하는 것은 민족 간의 평등원칙을 우롱하는 일이다. 폴란드의 사회민주주의자가 분리를 거부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억압민족인 대(大)러시아인은 강력히 폴란드의 분리권을 주장해야 한다. 레닌은 로자가 분리권 인정 없이 상이한 민족의 노동자계급 간 연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셋째, (분리권을 포함하는) 무조건적인 자결권을 지지하는 것과, 그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요구를 지지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 주장했다. 즉 자결권을 옹호하는 것과, 분리하겠다는 주장을 반대하는 것이 모순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 조건과 계급투쟁 등을 고려해 해당 민족은 민주적 선거방식을 통해 분리를 결정할 수 있다. 물론 사회민주주의자도 이 과정에서 평가를 제시할 수는 있으나, 레닌은 “정치적으로 분리하고자 하는 국가를 존중하며 어떤 형태의 무력사용에 반대하고, 해당 지역 주민의 보통·직접·평등 선거의 기초 위에서 비밀투표에 의해서만 분리문제의 해결을 요구한다”는 것을 언급한다. 
이 두 계기에 대한 볼셰비키의 입장을 종합하여 1913년 가을, 레닌이 거주하던 갈리시아의 포로닌에서 열린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결의가 채택된다.
⑴ 자본주의적 조건에서 바람직한 주요한 사항은 모든 민족과 언어에 대한 권리의 평등, 강제적인 국어를 만들지 않을 것, 지역 언어를 통한 학교 교육, 또한 광범한 주자치 및 지방자치 등이다.
⑵ 문화적 민족자치의 원칙이나 또는 일정한 나라 안의 개별 민족의 학교 행정이라는 원칙은 일반으로는 민주주의에, 특수하게는 계급투쟁의 이익에 유해한 것으로서 배척한다. 
⑶ 노동자 계급의 이익은 그 나라의 모든 노동자가 민족적 경계선으로 나뉘지 않은 프롤레타리아 조직으로 통일될 것을 요구한다. 
⑷ 당은 ‘차르 군주제하에 있는 피억압민족의 자결권, 즉 분리권 및 독립, 국가를 형성할 권리’를 지지한다. 
⑸ 어떤 개별적인 경우에 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의 여부는 당이 ‘전반적인 사회발전이라는 측면과 사회주의를 향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이라는 관점에서’ 판단할 것이다.
20세기 초의 논쟁은 1913년 당 결의로 정리되었다. 문화적 민족자치는 배척하고 자결권, 즉 분리, 독립된 국가를 형성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권리를 볼셰비키의 공식 입장으로 채택했다.
3. 1차 세계전쟁기 레닌의 민족자결론
1913년 레닌은 민족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의 태도 두 단계를 구별했다.
발전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민족문제에 대한 두 가지 역사적 경향을 알고 있다. 하나의 경향은 민족 생활 및 민족운동의 태동, 모든 민족적 억압에 항거하는 투쟁, 민족국가의 창립이다. 두 번째 경향은 민족 간의 모든 관계가 발달하고 그 빈도수가 증대되는 것, 민족적 장벽의 파괴, 자본 및 경제생활 일반, 그리고 정치과학 등의 국제적 통일성 창조이다.
두 가지 경향은 자본주의의 보편적 법칙이다. 첫 번째 경향은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에 지배적이고, 두 번째 경향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 사회로의 전환점에 근접하게 되는 성숙한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마르크스주의자의 민족강령은 두 가지 경향을 고려하여 전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민족 및 언어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고 이점에 있어서 어떠한 특권도 인정하지 않고 민족자결권을 옹호하며, 후자의 경우에는 국제주의의 원칙을 옹호한다.
이 결의가 채택되고 1년 뒤, 1차 세계전쟁이 발발한다. 세계전쟁이라는 긴급한 정세에 발맞춰 민족자결권에 대한 레닌의 이해도 한층 넓어진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민족자결권을 무조건 승인하는 것은 기본 전제로 두되, 전쟁이 발발한 현 상황에서 노동자 국제주의의 원칙을 어떻게 달성하느냐는 쟁점을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레닌은 1916년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자결권」이라는 테제에서 이를 반영하여 민족문제에 대한 견해를 정리하고 있다. 
1. 제국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피억압 제(諸)민족의 해방
승리한 사회주의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반드시 수립해야 하며 따라서 제민족의 완전 평등뿐만 아니라 민족자결권, 즉 자유로운 정치적 독립권을 실현해야 한다.
2. 사회주의 혁명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사회주의 혁명은 단순히 일회적 행위가 아니다. 단순히 하나의 전선에서의 한 번의 전투가 아닌 것이다. (…) 장기간에 걸친 연속된 전투로 이루어진다. (…)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사회주의 혁명으로부터 이탈하도록 하거나 사회주의 혁명을 은폐하거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반대로 완전한 민주주의의 실현 없이는 승리한 사회주의가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위한 전면적이고 지속적이며 혁명적인 투쟁 없이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조아지에 대한 승리를 준비할 수 없다.
3, 민족자결권의 의의 및 연방과의 관계
민족자결권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배타적인 독립권, 즉 억압민족으로부터 자유롭게 분리할 정치적 권리를 뜻한다. (…) 그것은 단지 모든 민족적 억압에 반대하는 투쟁을 지속적으로 표명하는 것이다. 민족적 국가체계가 분리의 자유를 완벽하게 하는 데에 근접하면 할수록 분리에의 열망은 실제로는 점차 줄어들고 희미해질 것이다. (…) 인류는 피억압계급의 독재라는 과도기를 거쳐야만 계급 폐절에 도달할 수 있듯이 모든 피압박민족의 완전한 해방 즉 분리의 자유라는 과도기를 거쳐야만 필연적인 민족들의 통합에 도달할 수 있다.
4. 민족자결 문제에 대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제기하는 것
한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한 민족해방 투쟁이 어떤 조건하에서는 다른 열강의 제국주의적 목표를 위해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유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민족자결권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공화제적 구호를 부르조아지가 정치적 기만과 금융적 수탈을 위해 수없이 이용한다고 해서 사회민주주의가 공화제를 요구하는 구호를 포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위 테제들에서 레닌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때의 민족자결 투쟁에 대한 분석도 시도하고 있다. 즉, 사회주의란 한 번의 승리를 통해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긴 연속이며 완전한 민주주의를 수행해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테제 1번에서 밝히고 있듯 민족자결권은 완전한 민주주의를 위한 강령으로서 채택되어야만 한다. 
이뿐만 아니라 레닌은 인류는 모든 피억압민족의 완전한 해방, 즉 분리의 자유라는 과도기를 거쳐야만 여러 민족의 통합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레닌은 민족자결이라는 부르주아 이론을 러시아에 거리낌없이 적용함으로써 이를 받아들이고 또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인 동의에 의한 민족들의 통합을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또 실제로 유일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겼다.
특히 민족자결이 다른 열강의 제국주의적 목표를 위해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유로 민족자결권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레닌은 여기에 ‘조국 방위’를 뜻한다고 해서, 민족자결권을 거부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짓이며 강령적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황을 분석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의 희화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에서 “전쟁의 본질이 외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전쟁은 피억압국가 또는 피억압민족의 관점에서 진보적이며, 반대로 전쟁의 본질이 식민지의 재분할이거나, 전리품의 분할, 외국영토의 약탈이라면, 조국방위 운운의 모든 주장은 인민에 대한 완전한 속임수”라고 말한다. 결국 전쟁의 궁극적인 쟁점이 무엇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외국의 압박에 저항하는 ‘조국 방위’는 속임수가 아니며 민족자결은 완전한 민족해방이기에, 사회주의자는 그런 투쟁에 반대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3. 1917년 2월 혁명 직후 민족자결권의 적용
이렇게 정리된 민족자결권에 대한 레닌과 볼셰비키의 입장은 1917년 2월 혁명 이후 민족문제를 다루는 여러 활동에서 실천적으로 드러난다. 
먼저 2월 혁명 직후 폴란드와 핀란드에서 독립 요구가 분출하기 시작했다. 임시정부는 폴란드에 대해서는 독립을 인정하는 포고령을 발표했으나, 핀란드에 대해서는 미온적이었다. 볼셰비키는 이러한 임시정부에 대해 수차례 비판했다. 레닌은 1917년 4월 29일(러시아력. 신력으로는 5월 12일) 민족문제에 관한 연설에서 “핀란드의 자유를 부정하는 러시아 사회주의자는 쇼비니스트”라고 언급했다. 
그런데 핀란드의 상황은 복잡했다. 부르주아 정부가 확고하게 권력을 쥐고 있는 한편, 사회민주주의자들도 강력한 당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핀란드에는 러시아 군대가 여전히 주둔하고 있어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도울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민족자결에 대한 볼셰비키의 약속은 명백한 것이었기에, 10월 혁명 이후 소비에트 정부는 핀란드 부르주아 정부의 독립을 인정했다.
우크라이나도 유사한 사례였다. 1917년 2월 혁명이 발생하자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이 고무되어 우크라이나 자치공화국이 성립된다. 레닌은 1917년에 작성한 논문에서 임시정부가 “우크라이나의 자치 및 탈퇴 결정의 완전한 자유”를 선언하여 자신의 “기본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의무를 수행해야 함에도 이를 실행하지 않았다”라고 비난했다. 결국, 러시아 임시정부는 마지못해 자치공화국을 인정했다. 10월 혁명 이후 1920년 6월까지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지원을 받는 라다 정권과 소비에트 정권이 상대방을 번갈아 전복시키는 혼란한 상황이 이어졌다. 이런 와중이던 1919년,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는 러시아로부터 독립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단위가 결성되는 것을 승인하기로 한다. 이런 결정은 레닌의 민족자결론이 강하게 반영되었기에 가능했다.
우크라이나와 핀란드 외에도 벨라루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도 민족자결권이 적용되었다. 벨라루스에서는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었고, 나머지에서는 부르주아 정권이 수립되었는데,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는 이들과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독립을 인정했다. 이처럼 민족자결권에 관한 볼셰비키의 결의는 러시아 주변의 다양한 국가에서 부르주아 정권이든 소비에트 정권이든 상관없이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다. 
4. 스탈린 인민위원의 민족이론
지금까지 레닌의 민족자결권과 그 적용을 살펴봤다.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레닌의 자결권이 관철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레닌의 민족자결권에 대해 볼셰비키 내부에서 어떤 반론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레닌의 민족자결론에 반론을 제기하는 대표적 인물은 스탈린이었다. 그런데 스탈린은 민족 인민위원부를 이끄는 민족문제에 관한 인민위원 중 한 명이었다. 그만큼 스탈린의 견해는 러시아 사회주의연방 공화국의 민족문제에 관한 입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민족자결 문제에 관해 로자의 입장에 동조했던 페스트코프스키에 의하면, 혁명 초기 인민위원부 내에서 스탈린은 레닌 정책의 유일한 지지자였다. 한편 몇몇 민족의 입장에서는 민족 인민위원부가 그다지 자신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다. 이렇듯 그 기능에 대해 의심을 받았지만, 민족 인민위원부의 기능과 기구는 내전을 거치며 야기되는 민족문제를 해결해야 했기에 더욱 확장되었다. 그 와중에 레닌에 가깝다는 평가가 무색하게 민족 인민위원부는 민족의 대변자인가 아니면 그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관리하려는 중앙권력의 도구일 뿐인가라는 논쟁이 계속 제기됐다. 초기 의도가 어찌 되었든 민족 인민위원부는 점점 더 후자의 경향을 띠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경향성이 생겼는가. 민족 인민위원부의 성격은 이 기관을 장악하고 대표했던 스탈린의 개성과 의견에 따랐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스탈린은 레닌의 견해에 상당히 가까울 때도 있었으나, 대체로 민족자결권에 맞서 ‘노동자의 자결’을 주장했다. 스탈린은 이미 1913년에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트랜스코카서스[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의 타타르인[아제르바이잔의 터키인]은 (…) 낡은 제도를 부활시켜 국가로부터 분리할 것을 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른다면 그들은 이러한 것을 행할 완전한 권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타타르 민족의 노동인민들에게 이익이 될 것인가? (…) 사회민주주의자는 이것에 개입하여 일정한 방법으로 민족의 의사에 영향을 미쳐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주장은 앞으로 경우에 따라 간섭을 시도하는 당의 압력이 심해질 수도 있음을 의미했다. 이는 1917년 2월 혁명 직후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던 핀란드에 대한 스탈린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앞서 볼셰비키는 핀란드의 독립을 인정했다고 언급했는데, 스탈린은 그 결정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사실상 인민위원부 회의는 핀란드 인민들에게 자유를 준 것이 아니라, 그 의사와는 반대로 핀란드 부르조아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핀란드는 묘한 조건의 일치로 인해 사회주의 러시아의 손아귀로부터 자신의 독립을 받아내었다.
스탈린은 이런 상황을 ‘핀란드 프롤레타리아의 비극’이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이 상황을 핀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우유부단함과 비겁함의 탓으로 돌렸다. 
스탈린식 노동자 자결은 민족자결권에 대한 인정을 선택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현실적으로 친소련 정부만을 승인한다는 의미였고, 무조건적인 민족자결권의 승인이라는 레닌의 주장과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또한 노동자의 자결이라는 명분으로 혁명을 자발적으로 수행할 역량이 없는 타국에 개입하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개입은 차르 시절 러시아 제국의 팽창주의로 변질될 위험마저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유든 개입을 당하는 피억압국의 입장에서 이는 침략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5. 레닌 민족자결론과 스탈린 노동자 자결 간 대립의 첨예화
레닌의 민족자결론과 스탈린의 노동자 자결은 명백한 차이가 있음을 확인했다. 이 차이는 현실에서 점점 더 첨예한 대립으로 드러난다. 먼저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관련해서 문제가 발생했다. 10월 혁명 즈음 우크라이나에는 소비에트에 적대적인 부르주아 정부가 존재했는데, 이들은 소비에트 정부에 적대적인 세력에 지지를 보내고 프랑스와 군사사절을 교환했다. 스탈린은 이들에게 자결의 원리를 호소하는 것은 자결과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우롱하는 일이라고 언급했다. 또 러시아 혁명이 사회주의로 이행하고 있는 국면을 반영해, 자결권은 부르주아적 권리가 아니라 노동자 대중의 권리로 해석해야 하며 사회주의적 원리에 종속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레닌은 1917년 12월 우크라이나 새 정부가 모호한 부르주아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긴 전문을 보내지만, 그 전문의 맨 앞에는 “자결권이 억압받는 모든 국가에 속하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탈퇴하거나 러시아 공화국과 조약을 체결할 권리를 인정한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던 중 제헌의회 해산으로 혁명이 이미 사회주의적 단계로 이행했음이 공식화되면서, 스탈린은 민족문제와 관련한 볼셰비키의 이론을 조정하려 시도한다. 스탈린은 변경지역의 충돌은 민족적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를 둘러싼 것이고 부르주아 정부는 노동자 대중의 권력에 대항하여 벌이는 투쟁을 민족적인 것으로 위장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총괄하여 이것은 자결의 원리를 해당 민족의 부르조아의 권리가 아니라 노동자 대중의 권리로서 해석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자결의 원리는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있어서 하나의 수단이지 않으면 안 되고, 사회주의의 원리에 종속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레닌은 여전히 민족자결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1918년 제3차 전(全)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레닌은 거의 홀로 민족자결권을 방어했다. 노동자 자결은 산업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 사회에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으나, 그렇지 못했던 동유럽이나 아시아의 경우 이를 적용하기 쉽지 않았다. 레닌은 그러한 후진 사회의 민족에도 적용될 수 있는 자결원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만 러시아 프롤레타리아가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가면을 쓴 대러시아의 쇼비니즘”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있다고 여겼다. 결국 레닌의 자결권이 1919년 당 강령 중 민족문제에 관한 항목에 관철되었다.
1. 지주 및 부르주아를 타도할 혁명적 투쟁을 연합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러 민족의 프롤레타리아 및 반(半) 프롤레타리아를 결집하는 정책이 초석이 되어야 한다. 
2. 피억압 국가들의 노동인민이 이들 피억압 국가를 억압하고 있는 국가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해 불신을 갖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족적 그룹이 누리고 있는 모든 특권을 폐지할 것, 모든 민족이 완전히 평등한 권리를 가질 것, 식민지와 비주권국의 분리권을 승인할 것 등이 필요하다.
(번호가 붙지 않은 한 절)
어떠한 경우에도 민족들을 억압하고 있는 민족의 프롤레타리아는 피억압민족 또는 비주권 민족의 노동인민 사이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민족적 감정에 특히 신경을 써야 하며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정책을 추구해 감으로써만, 소비에트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다수의 민족 소비에트 공화국의 결합이라는 경험이 보여주고 있듯이, 민족적으로 서로 다른 여러 요소들 속에서 참으로 항구적이며 자발적인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통일을 위한 조건을 형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완전한 해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부르주아 체제가 성립하는 경우, 노동자의 궁극적 이익을 위해 스탈린의 표현처럼 “어떤 명확한 계획을 세우라”는 당내의 유혹이 뚜렷해졌다. 그러나 타국에 대한 간섭은 그 이유가 어떤 것이든 민족자결에 관한 당의 원칙을 왜곡하는 것이었다. 
특히 1922년 조지아 문제를 둘러싸고 레닌과 스탈린 사이의 논쟁이 벌어졌다. 스탈린은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을 트랜스코카서스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합병하고자 했다. 조지아의 볼셰비키는 코카서스 연방이 아닌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서 소련에 참여하기를 원했기에 이런 제안에 반대했다. 갈등이 해결되지 못하고 점차 심각한 수준으로 고조되자 레닌이 개입한다. 레닌은 조지아의 볼셰비키들에게 진심으로 당신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으며 오르조니키제의 무례함과 스탈린과 제르진스키의 묵인에 분개하고 당신들을 위한 연설을 준비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곧 레닌의 건강이 악화하면서 조지아의 볼셰비키는 레닌이라는 강력한 우군을 상실했고, 결국 1922년,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은 트랜스코카서스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강제 병합되어 소련에 편입된다. 이 사건은 레닌이 훗날 ‘레닌의 유언장’으로 알려진 글에서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해임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는 단순히 의견이 달라서라기보다는, 스탈린의 방식이 차르시대 러시아의 팽창주의와 유사하며 레닌이 그토록 경계하던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가면을 쓴 대러시아의 쇼비니즘”이라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노동자 자결’이 러시아 내에서 점차 강화되어갔다. 그렇지만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헌법은 연방에 참여한 민족의 탈퇴권을 보장했고, 이 조항은 모든 공화국의 동의 없이는 폐지될 수 없다고 규정했다. 이 조항의 존재는 소련이 점차 중앙집권화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의 자유의지에 맡겨야 한다는 레닌의 민족자결권 견해가 공화국 헌법에 최후의 유산으로서 남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6. 혁명 러시아의 폴란드 침공
그런데 레닌의 민족자결론을 검토하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 있다. 바로 1920년 혁명 러시아의 폴란드 침공이다. 폴란드 침공은 민족자결권을 일관되게 주장해온 레닌으로서는 참담한 실패였다. 먼저 전쟁의 과정을 짧게 살펴보자.
내전이 어느 정도 종식된 1919년 말~1920년 초에 소비에트 정부는 폴란드와의 강화협정을 원했다. 그런데 폴란드는 과거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다는 열망과 소비에트 정부의 강화협정 제안에 대한 불신을 이유로 협정 제의를 회피했고, 결국 우크라이나 서부에 위치한 소비에트 군을 폴란드 군이 기습한 것을 시작으로 전쟁이 본격화된다. 
전쟁 개시 얼마 뒤, 소비에트 군은 우크라이나 수복에 성공한다. 이때 내부 논쟁이 벌어진다. 여기서 멈출 것인가, 아니면 폴란드 영토로 들어갈 것인가. 일반적으로는 퇴각하는 적을 따라 공세를 취하는 건 당연했으나, 볼셰비키는 마르크스주의자였고 군사력으로 혁명을 타국에 수출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름 아닌 레닌이 군대를 진격시키자고 주장했다. 이는 혁명전쟁에 반대하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당시 레닌은 혁명전쟁으로 유럽에서 계급투쟁이 일어날 것이고, 폴란드의 패배는 유럽 베르사유 체제를 전복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며, 유럽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전반적으로 퇴조하면서 무력에 의한 혁명의 이식만이 대안이라는 이유를 제시했다. 볼셰비키 다수는 의구심을 가졌으나 결국 레닌은 이들을 설득해 붉은 군대를 폴란드로 진격시킨다.
진격 초기 붉은 군대는 연전연승을 거두고 이에 고무된 볼셰비키는 무력을 통한 세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탄생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폴란드의 노동자, 농민은 붉은 군대의 진군을 반기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벌어진 바르샤바 인근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붉은 군대는 패배한다. 결국 레닌은 무력으로 외부로부터 폴란드에 혁명을 발생시키는 것은 실패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퇴각을 결정했다. 이후 레닌은 이 결정을 두고두고 반성하고 후회했다.
기존 레닌의 입장과 전쟁 패배 후의 반성을 고려하면 폴란드 침공 결정은 레닌의 거대한 일탈이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해당 민족의 노동자, 농민을 위한다는 노동자의 자결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사례다. 즉, 민족의 자발적 결정 없는 외부의 간섭이 그 명분의 옳고 그름과 관계없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낳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볼셰비키는 붉은 군대의 전진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진이며, 이번 전쟁은 부르주아에 대한 노동자, 농민의 계급전쟁이므로 노동자, 농민의 열렬한 지지가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그런 지지는 존재하지 않았고, 폴란드 인민의 애국심을 부추겨 오히려 전쟁에서 패배했다. 레닌은 “우리는 바르샤바와 폴란드를 구한 것이 연합군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애국심이었습니다. 이러한 교훈을 절대 잊지 맙시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이 발언은 표면적으로는 서방의 지원으로 인한 군사적 패배였지만, 실은 폴란드 인민이 원하지 않는 무리한 개입이었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나아가 조금 더 해석해보자면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이런 개입은 정당화되기 어렵고, 설사 군사적으로 승리했을지라도 인민의 열망을 저버리고 그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종국에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함의를 지닌다.
7. 소비에트 연방과 헌법: 레닌 민족자결론으로부터 이탈인가
레닌은 당내에서 노동자 자결에 맞서 끝까지 민족자결권을 방어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형성과정 초기에도 이 원칙이 어느 정도 유지된다. 그러나 1922년을 즈음하여 공화국들의 연방이 아니라 단일 연방공화국이라는 지령이 모스크바 당본부로부터 내려지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라는 형태가 만들어진다. 이 시기는 스탈린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던 때였다. 레닌은 1918년 암살 시도로 인해 중상을 입은 뒤, 1921년부터는 후유증과 누적된 과로로 정상적인 생활이 점점 어려워졌다. 그러던 중 1922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정상적인 업무를 보기 힘들어지고, 1924년 초 사망하기 1년 전부터는 거의 병상에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 따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형성과정은 레닌의 민족자결권에서 점차 스탈린의 노동자 자결로 이동하는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이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내란 종결 이후인 1923년, 당 결의에서는 군사동맹의 형태를 취한 협동으로부터 제민족의 군사, 경제적 및 정치적 연합으로의 이행을 분명히 한다. 이는 이미 진전되고 있던 결합의 움직임을 반영한 것인데,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벨라루스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아르메니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조지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극동공화국, 2개의 중앙아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등 8개의 국가와 이뤄졌다. 결합의 형태는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충분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모델, 즉 독립성을 거의 온전히 보장하는 공동 통제의 방식, ② 힘이 가장 약했던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와 같은 종속적 모델, ③ 독립성과 종속성 중간에 있는 모델.
첫 번째로 독립성이 강했던 우크라이나 모델을 살펴보자. 
1920년 내전이 종료되고 난 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국은 일단 분리된 외형을 띠고 있었으나 재결합의 움직임이 진전되고 있었다. 재결합은 1919년의 포고에서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다. 1919년 1월 우크라이나 임시 소비에트 정부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공화국과의 결속을 선언했고, 6월 모스크바의 전 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포고에서는, ‘우크라이나,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백러시아 및 크리미아의 노동대중의 독립과 자유 그리고 자결을 인정’하고 이 지역들의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들과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과의 ‘군사적 연합’(Soyuz)의 필요를 선언했다. 비록 내전이 격화되면서 포고가 구체적으로 현실화되지는 못했으나, 정신은 이어졌다. 그것은 과거 구 러시아 제국을 구성했던 나라들 사이의 ‘동맹’ 또는 ‘연합’이라는 사고방식을 포함하고 있었다. 
실제로 양국 간 조약 체결은 매우 조심스럽게 이뤄졌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주변국 중에서 가장 강했고, 가장 강하게 독립과 평등의 권리를 주장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독자적 외교정책을 고려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공화국이었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와의 조약은 레닌이 직접 서명한 유일한 조약이었다. 조약 전문은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선언된 민족자결의 권리”에 경의를 표했고, “조약 체결로 각자의 독립과 주권”을 인정했다. 종속이라는 의미의 어떠한 직접적 함축도 피했다.
레닌은 이미 1918년에 우크라이나에 민족자결 원칙을 적용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자본가―자국의 자본가와 다른 나라의 자본가 양쪽 다―에 반대하는 만국 노동자의 가장 밀접한 단결을 지지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 단결이 자발적인 것이기 위해서는 (…) 러시아의 노동자가 우크라이나인에게 그의 우정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 과정의 동등자, 동맹자, 형제로서 그들을 대함으로써 우정을 쟁취하면서 우크라이나인의 자결권에 찬성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레닌은 우크라이나의 자발적 의지에 따라 함께 한다는 점을 계속해서 유지하려 했고, 조약 체결에 대한 조심스러운 태도는 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만큼 우크라이나는 독립적인 공화국이었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우크라이나는 볼셰비키가 만들어준 나라이며, 독립국 지위를 인정한 레닌은 거대한 실수를 했다는 푸틴의 주장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양국의 관계를 푸틴의 주장처럼 내정의 문제로 단순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 아제르바이잔은 8개의 조약 체결국 중 가장 약한 국가였다. 두 국가 간의 조약은 군사조직과 군사지휘권의 통일, 국민 경제 및 외국무역을 통제하는 기관의 통일, 공급기관의 통일, 철도, 수운 및 우편 전신 관리의 통일, 재정의 통일을 최단 시일 내에 실현하도록 했다. 그 외에 부속조약에서는 재정, 외국무역, 국민경제에서 러시아 사회주의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에 결정적 표결권을 부여했다. 이 조약은 형식적으로는 각 나라 외교 인민위원에 의해 조인된 국제법으로 인정되는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실질적으로는 러시아 사회주의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아제르바이잔의 종속이었다.
끝으로, 아르메니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과의 조약은 대부분 재정문제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는 우크라이나 방식과 아제르바이잔 방식의 중간 정도였는데, 이는 단순히 형식상 차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통일조직의 활동에 효과적으로 공헌할 수 있는 범위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사실은 스탈린이 위와 같은 독립공화국과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내의 자치공화국 사이에 정도의 차이만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스탈린은 변경 지역의 지역적 자치를 주장했다. 두 번째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과의 조약을 자치의 최고 형태로서 골라냈다는 점이다. 이는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을 대표로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종속성이 강화되는 경향을 예고한 것이었다. 
조약을 맺은 공화국들을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의 자치단위로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러시아 공화국을 확대할 것인가, 아니면 러시아를 포함하여 각 자치공화국이 서로 동등한 지위를 누리는 상태에서 국가연합을 꾸릴 것인가가 쟁점이었다. 이 두 선택지의 타협책으로, 러시아를 포함하여 각 공화국이 함께 새로운, 더 광범위한 연방 국가를 결성하는 안이 제안되었다.
제안된 타협책에 따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결론이 지어졌으나,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련 내에서도 러시아가 높은 위신과 광범위한 권력을 부여받아, 러시아와 다른 공화국의 격차가 한층 심화된 것이 아니냐는 인식이 널리 퍼져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대국 쇼비니즘적 조짐을 경계하는 차원에서 좀 더 타협적으로 여러 민족의 요구를 만족시키려 애썼고 대표위원의 수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실질적으로 반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에 따르면, 엄밀히 말해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은 단일국가였다. 소비에트 연방 헌법 및 공문서에는 ‘연방의’(federal)라는 말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1923년의 헌법은 중앙집권화로의 일보전진이었다. 형식상 평등한 주권국가 간의 합의로 만들어졌고 연방의 각 단위에 주권이 헌법상 보장되어 있으며 자유로운 탈퇴권도 인정했다는 의의가 있었지만, (이는 앞서 언급했듯 레닌 최후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헌법에 명시된 공화국의 이러한 권한 보장은 중앙집권화와 균형을 이룰 정도로 강력하지는 못했다. 이런 경향은 이후에도 국가위기(예를 들어, 전쟁 위기)를 이유로 점차 강화되어 간다.
7. 결론
지금까지 마르크스와 레닌의 민족자결론과 스탈린의 노동자 자결에 대해서 살펴봤다. 마르크스는 민족자결권이 소수민족에게도 보장될 필요가 있다는 데까지 나아갔고, 레닌은 마르크스를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즉 분리의 자유로서 민족자결권을 무조건적으로 인정했다. 또 특정 민족이 사회주의 공화국과 함께하든, 혹여 부르주아 국가를 건설하든 이는 그 민족이 자발적으로 결정할 일이며 어떤 강제적 수단에 의해 그 결정이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동시에 홀로 국가를 건설할 수 없는 소수민족의 경우에 대해서도 레닌은 그 민족이 어느 국가와 함께할 것인가를 결정할 권리를 인정하여 자결권을 인정했다. 
한편 스탈린이 대표적으로 주장한 노동자의 자결은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에 복무하는 경우에만 자결권이 인정될 수 있다는 의미다. 즉, 노동자의 자결은 민족자결권에 대한 선택적 지지다. 이는 레닌의 주장과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외부에 대한 간섭을 실행해온 소련 역사는 이런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개입은 피개입국의 입장에서는 팽창주의와 다름없었다. 이것이 폴란드 침공 실패의 교훈이었는데, 레닌은 즉각 반성하고 민족자결권으로 돌아갔으나 스탈린은 그렇지 않았음을 이후 역사가 말하고 있다. 혁명 러시아가 주변 국가에서 혁명적 노동자 운동을 지지한다는 것이 곧 혁명적 노동자 운동이 집권하지 못했다고 그 민족의 자결권, 즉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고 유지할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이런 관점을 우크라이나에 적용하면 어떨 것인가. 레닌은 “한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한 민족해방 투쟁이 어떤 조건하에서는 다른 열강의 제국주의적 목표를 위해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유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민족자결권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라고 언급했다. 앞서 검토한 레닌의 민족자결권을 적용한다면, 마르크스주의자는 우크라이나 민중이 원하는 방향성을 인정하고 러시아의 침공에 맞선 우크라이나의 저항을 지지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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