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붕와해의 위험 속 경장을 주장하다
『율곡 이이 평전』
1. 서론
지금 백성은 흩어지고 군사는 쇠약하며 창고의 양곡마저 고갈되었는데, 은혜가 백성에게 미치지 않고 신의도 여지없이 사라졌습니다. 혹시라도 외적이 변방을 침범하거나 도적이 국내에서 반란을 일으킨다면 방어할 만한 병력도 없고, 먹을 만한 곡식도 없고, 신의로 유지할 수도 없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이 점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려 하십니까?
- 『율곡 이이 평전』, 136쪽.
- 『율곡 이이 평전』, 136쪽.
위 글은 조선시대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율곡은 호다. 이 글에서는 그를 율곡이라고 칭한다.)가 1582년 당시 임금이던 선조에게 올린 글이다. 딱 10년 후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마치 그 전란을 예측이라도 한 것 같은 그의 경고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임진왜란과 약 한 세대 후인 1636년 일어난 병자호란은 조선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그럼에도 조선은 망하지 않았다. 조선왕조는 총 518년간 존속했다. 14세기 역사가 이븐 할둔은 왕조의 수명이 120년을 넘지 못한다는 가설을 제시한 바 있다. 조선보다 오래 장수한 왕조 국가는 동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 오스만 투르크 정도라고 한다. 조선시대라고 하면 문약한 선비들이 공리공담과 당파싸움이나 일삼다가 망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이것이 식민사관의 유교망국론, 당쟁망국론이다). 하지만 조선왕조는 1444년 공법, 1608~1708년 대동법, 1669년과 1731년 노비종모법, 1750년 균역법, 1801년 공노비 폐지, 1871년 호포법 등 인민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조세 제도를 개혁했다. 전근대 봉건제 국가 중 이런 나라는 흔하지 않다.
그렇다면 봉건제 국가인 조선왕조가 이렇게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며, 그 저력은 어떤 요인 덕분인가? 그럼에도 조선이 19세기 말 망국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현대의 역사인식에도 영향을 줄뿐더러, ‘이행’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지속적으로 탐구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율곡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한영우의 『율곡 이이 평전』을 소개하면서, 특히 ‘경세가로서의 율곡’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율곡은 매우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그가 평생에 걸쳐 조선의 누적된 폐단을 개혁하는 ‘경장’(更張)을 주장한 경세가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경장의 본래 의미는 거문고의 줄이 느슨해졌을 때 줄을 다시 팽팽하게 당겨 제대로 된 소리를 내게 한다는 뜻으로, 일반적으로는 국가의 여러 제도가 해이해졌을 때 기존 체제의 틀 속에서 다시 새롭게 개혁하는 것을 의미한다. 율곡은 당시 조선이 창업의 기백도, 수성(守成)의 활기도 잃고, 폐단이 누적된 중쇠기(中衰期)에 달했다고 보았다. 이러다 자칫 토붕와해(土崩瓦解, 흙벽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짐)의 지경에 처해 처참한 국난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 위기를 벗어나는 길은 각종 폐단을 개혁하는 경장뿐이라는 게 그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율곡은 평생 동안 이 주장을 끊임없이 반복하였다. 그러나 당대에 율곡의 주장은 거의 수용되지 않았다. 임금인 선조는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고, 정적들은 그가 굳이 일을 만들려 한다고 반대했다. 율곡은 임금이 개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주저 없이 벼슬을 버리고 물러났다. 선조는 그의 주장을 수용하진 않았지만 곧 다시 벼슬을 주곤 했다. 율곡은 벼슬길에 나오면 개혁을 주장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물러나서 은거하며 학문을 토론하고 발전시켰다. 그는 일평생 외로웠다. 율곡의 주장은 사후에나 조금씩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율곡이 살았던 시대는 위기와 변화의 시대였다. 조세제도의 모순으로 인한 문제가 누적되면서 인민의 처지가 악화되는 한편, 국력은 고갈되고 있었다. 변방에서는 왜구와 여진족의 침입이 이어졌고, 이는 결국 율곡 사후에 임진왜란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림세력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새로운 주도권을 획득했다. 율곡은 이러한 시대가 낳은 과제를 외면하지 않고, 일평생 정면으로 대결하며 개혁을 주장했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쇠퇴와 인민주의 정치의 득세,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대표되는 국제정세의 혼란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 또한 율곡을 통해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2. 율곡이 살던 시대
예부터 나라가 중엽에 이르면 반드시 안일에 젖어 점차 쇠약해지기 마련인데, 그때 현명한 군주가 일어나 진작하고 분발하여 천명(天命)을 다시 이어가야 역년(歷年)이 오래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200여 년을 전해 와서 이제 중쇠기(中衰期)에 들어가는 시기이므로 천명을 이어 주어야 할 때입니다. … 오늘날 분연히 일어나지 못한다면 다시는 바라볼 날이 없을 것입니다. … 지난번 한재(旱災)가 있을 때에는 근심하고 걱정하시더니 비가 조금 내리고 나니까 갑자기 안락하게 여기기를 마치 태평한 때처럼 하고 있으니 소신은 깊이 우려하는 바입니다. 세속의 논의는 새로운 일을 추진하면 일 벌이기를 좋아한다고 하고, 옛날대로 답습하면 안정된 것이라고 하지만, … 만약 세속의 논의대로 한다면 한 가지 폐단도 고치지 않고 망하기를 기다릴 따름이니 어떻게 나라를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 『율곡 이이 평전』, 125~126쪽.
(『선조실록』 권15, 선조 14년 7월 일자 미상)
율곡은 조선이 건국한지 200년 가까이 지난 16세기의 인물이었다. 율곡은 왜 당대를 ‘중쇠기’라고 규정하고 경장을 주장한 것일까?
16세기 조선은 이앙법(모내기법)이 지주들에 의해 도입되어 점차 보편화되는 한편, 개간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경작 가능한 토지가 계속 늘어나던 시대였다. 농업생산력 발달과 토지증가에 따라 토지소유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도 변화하였다. 토지가 생산수단이었던 봉건제 사회에서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토지소유관계가 존재했는데, 이 시기 조선에서는 지주전호제가 확대·발전하였다. 지주전호제는 대토지 소유자(지주)가 소농민(전호농민)에게 토지를 빌려주어 경작하게 하는 토지소유관계로, 지주는 전호농민이 농사지은 농업생산물의 절반을 지대로써 징수하였다. 임진왜란 무렵에는 지주전호제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농사지을 사람이 적고 땅은 많은 이 시기에, 대토지 소유가 곧바로 많은 지대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지배층과 지주는 수익극대화를 위해 토지제도와 신분제를 적극 활용하였다. 이 시기에는 노비와 토지가 결합된 농장(農庄)이 확대되는 한편, 병작반수(竝作半收, 지주와 전호가 생산물을 반분함)에 따른 지주제도 늘어나는 추세에 있었다. 지배층의 토지집적에 따라 토지를 상실한 농민은 지주의 토지를 빌어 경작했다. 농민은 세금 부담으로 인해 자신의 땅을 지주에게 바치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16세기 전반 중종 때에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지만 “백성은 토지를 가진 자가 없으며, 토지를 가진 자는 오직 부상대고(富商大賈)나 사족(士族)뿐”이라고 할 지경에 이르렀다.
한편, 조선왕조는 ‘전(田)이 있으면 조(租)가 있고, 신(身)이 있으면 역(役)이 있고, 호(戶)가 있으면 공물(貢物)이 있다’는 당나라의 조용조(租庸調) 제도를 이념형으로 하여, 농민들의 생산물과 노동력을 수취하였다. 이에 토지를 대상으로 곡물을 수취하는 전세, 인신을 대상으로 노동력을 수취하는 군역·요역, 호를 대상으로 토산물을 수취하는 공납이 조선의 조세제도를 이루었다. 그런데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지주전호제의 확대로 인해, 조세제도의 개혁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즉, 인두세(人頭稅, 납세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부과하는 조세로 주로 생산력이 낮은 전근대 사회에 존재하였다)적 성격을 지니는 공납과 군역을 개혁하고, 생산력 발달을 반영하여 토지에 근거한 조세제도로 개혁해야 했다. 그러나 16세기 당시, 전세는 오히려 지주세력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편되어 수취율이 생산물의 약 1/20로 고정된다. 군역 또한 본래 양인 전체를 대상으로 하였으나 양반사족층이 이탈했고, 농민들도 포(布)를 납부하고 다른 사람을 세우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공납제였는데, 이미 더는 그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토산물을 납부하라고 하거나, 공물을 운반·수송하는 노동력도 납부자가 제공해야 하는 구조적 모순이 있었다. 여기에 더해 중간에서 납부자를 대리하여 납부 물품을 조달하면서 많게는 백 배를 착복하는 방납(防納)의 관행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와 같은 조세제도의 전반적 폐단은 국가재정과 병력의 감소를 불러왔으며, 그 근간을 이루던 농민의 삶을 피폐하게 하였다. 율곡이 평생 주장한 것도 공납제의 개혁이다. 그 핵심은 공물의 품목과 수량을 기록한 장부인 공안(貢案)의 개정과 현물 대신 토지를 대상으로 수취하자는 수미법이었다.
16세기는 정치적 변화도 일어났던 시기였다.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사림파(士林派)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으로, 공도(公道)를 내세워 기존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勳舊派)의 비리를 비판하며 성장하였다. 사림파는 15세기 말부터 삼사(三司) 등 주로 언론 문필기관의 관직을 통해 중앙으로 진출하였다. 중종 때에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파격적인 개혁을 추진하고,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자기 세력을 중앙으로 크게 진출시키는 적극적 활동을 한다. 이 과정에서 훈구파와 심각한 갈등이 벌어지면서, 사림파가 피해를 입는 ‘사화’(士禍)가 네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특히,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는 중종 때 공신세력이 격렬하게 반격하여 사림세력을 중앙정계에서 거의 완전하게 몰아낸 사건이었다. 그러나 사림파는 향촌사회에서 기반을 강화하여 16세기 후반에는 훈구파를 대신하여 중앙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요약하면 율곡이 살던 시대는 지주전호제의 확대로 지주의 토지집적이 늘어나 농민들이 점차 생업기반을 상실하고, 방납의 폐단으로 대표되는 조세제도의 모순으로 국가재정의 기반이 흔들리던 때다. 그 가운데 성리학으로 무장한 새로운 정치세력인 사림파가 등장하여 개혁을 주도해야 했던 것이다.
3. 율곡의 생애
1) 어머니를 잃고 방황하다 엘리트 코스 벼슬길에 오르다
율곡은 1536년(중종 31년) 12월 26일 오죽헌(烏竹軒)으로 알려진 강릉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년기 천재성과 효성을 보여주는 여러 비범한 일화들이 전하는데, 대부분 그의 제자들이 정리한 『율곡전서』에 실린 내용들이다.
율곡은 16세 되던 1551년(명종 6년), 어머니 신사임당의 사망으로 첫 시련을 겪는다. 유교 경전에 통달하고 시와 그림에도 뛰어났던 어머니는 그에게 우상이었다. 율곡은 3년 여묘살이 동안, 제수를 장만하고 제기를 닦는 일까지 손수 챙겼다고 한다. 어머니 상을 마치고 18세에는 관례를 행한다. 그런데 율곡은 이듬해에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버린다. 이 충격적인 행보로 인해 율곡은 평생 정적들에게 공격을 받게 된다. 갑자기 출가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그가 스스로 밝힌 이유를 들어보자.
어머니를 잃는 재앙이 참담하게 몸에 다가오고, 방향을 잃은 병이 마음을 때려서 미친 듯이 산속으로 달려가고 넘어지고 뒤집혀서 제자리를 잃었습니다. 공리(孔鯉, 공자의 아들)의 뜰에 나가지 못하고, 황향(黃香, 한나라의 효자)의 부채를 잡지 못한 것이 1년이었는데, 어느 날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 생각하니 후회와 슬픔이 치솟고, 스스로 책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살고 싶지도 않고,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한 것이 며칠이나 되었습니다. … 하지만 성인과 보통 사람은 모두 똑같은 성(性)을 가지고 있으며, 성인과 보통 사람이 다른 것은 오직 기(氣) 뿐입니다. 따라서 제가 미친 지경에 빠진 것은 저의 기 때문이지 성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지난날의 잘못은 거울에 낀 먼지와 같고 물에 섞인 진흙과 같은 것이어서 먼지와 진흙을 제거하면 거울은 깨끗해지고 물은 맑아질 수 있다는 것을 저는 믿겠습니다.
- 『율곡 이이 평전』, 66~67쪽.
(이모부 홍호에게 보낸 글, 『율곡전서』 권13, 별홍표숙서(別洪表淑序))
이 시기 다른 기록을 살펴보면, 아버지의 첩인 서모(庶母) 권씨와의 불화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율곡전서』에 따르면 그는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라는 공자의 말(『논어(論語)』, 「옹야편(雍也篇)」, 知者樂水, 仁者樂山)을 인용하며 금강산에 들어가 기(氣)를 기르고자 했다고 한다. 즉, 어머니를 잃은 충격이 큰 가운데, 서모와의 불편한 관계로 집에 미련도 없으니, 금강산에 들어가 마음을 다스리겠다는 생각이었을 수 있다.
율곡은 20세에 속세로 돌아온다. 율곡 자신이 ‘착실’(着實), 즉 현실에 뿌리를 두지 못한 불교의 허망함을 깨달은 탓이 컸다. 그는 유학을 공부하겠다고 다짐하고 과거 공부에 매진한다. 아버지 이원수의 3년상을 마친 율곡은 29세(1564년, 명종 19년)에 이르러 과거에 연이어 장원하며 성공한다. 이로 인해 세간에서 ‘아홉 번 장원한 분’(구도장원공, 九度壯元公)이라 불리기도 했다. 관직에 들어선 율곡은 호조 좌랑, 예조 좌랑, 사간원 정언, 병조 좌랑, 이조 좌랑 등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 벼슬길에 진입한다.
한편, 퇴계와 율곡 두 거장의 인연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23세에 율곡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년)을 예방한다. 이미 57세의 거장이었던 퇴계는 율곡을 보고 “후생가외(後生可畏, 제자가 두려움)라는 성인(공자)의 말씀이 나를 속이지 않는다”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그 이후 둘은 서찰을 통해 이기설(理氣說)을 토론하였고, 퇴계가 율곡의 설을 일부 수용하기도 한다. 율곡은 이외에도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 서경덕의 제자 박순과 두터운 친분을 맺고 지냈다.
2) 왕도 정치를 꿈꾸며 경장을 주장하다
율곡이 32세 되던 1567년, 새로운 임금 선조가 16세의 나이로 즉위한다. 선조를 새 임금으로 모시게 된 율곡은, 이제야말로 횡포를 부리던 척신들이 모두 제거되고 왕도정치가 꽃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선조 즉위부터 동서분당이 일어난 1575년까지는 율곡이 열렬하게 경장의 필요성을 역설하던 시기다. 율곡은 8년 만에 정3품 당상관(堂上官, 정3품 이상으로 조정회의에서 당상에 앉을 수 있는 최고급 관료집단)에 올랐다. 그가 역임한 관직은 모두 임금을 가장 측근에서 모시던 근시직이었다.
이 시기 율곡은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저술한다. 조선시대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라고 하여, 신하에게 휴가를 주고 학문을 권장하는 제도가 있었다. 율곡이 동호(東湖,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의 독서당에서 사가독서에 들어가, 그 결과를 정리하여 34세 되던 1569년에 바친 책이 『동호문답』이다. 이 해 경연에서, 율곡은 선조가 신하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다고 직언을 올렸다. 선조는 『동호문답』에 대한 내용을 질문하면서도, 자신은 요순이나 중국 성현 같은 자질이 없는데 어떻게 이상적인 정치를 할 수 있냐는 태도를 보였다. 군사(君師)가 되려는 노력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 선조의 태도에, 율곡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율곡이 개혁을 건의하고 선조가 받아들이지 않는 구도는 이후에 계속 반복된다.
실망하여 강릉에 내려가 있던 율곡이 35세가 되던 1570년(선조 3년), 선조는 그를 홍문관 교리에 임명했다. 율곡은 퇴계에게 자문을 구한다. 임금을 버려야 하는가, 아니면 끝까지 임금을 설득해 성군을 만들어야 하는가? 퇴계는 율곡의 질문에 “돌아갈 구업(舊業, 집과 재산)이 없으면 차라리 물러날 계획을 하지 마라. … 다만 벼슬을 하되 배운 것을 저버리지 마라”라고 답한다. 율곡은 퇴계의 조언대로 교리를 맡았다. 그는 물러나면 갈 곳이 없었다. 그러나 벼슬을 하면서는 자신의 신념과 현실의 간극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고민하던 율곡은 조정에 진퇴를 반복한다. 다만 36세 되던 1571년(선조 4년), 첫 외직인 청주 목사(淸州牧使)는 받아들여 서원향약(西原鄕約)을 만든다. 율곡은 민생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교화가 효과를 보기 어렵다(‘선양민 후교화[先良民 後敎化]’)고 보아, 조급한 향약(향촌 사회의 규약) 시행에 우려를 갖고 있었다. 도리어 인민을 괴롭힐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율곡은 자신이 주도하는 향약은 그럴 위험이 없다고 보고, 서원향약 이후에도 여러 향약을 시행했다.
율곡이 38세 되던 1573년(선조 6년) 선조는 처음으로 당상관의 벼슬인, 동부승지(同副承旨)로서 지제교(知製敎),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 수찬관(修撰官)을 내렸다. 이는 임금을 가장 가까이 수행하는 직책들이었기에, 율곡은 다시 마음을 굳게 먹고 선조를 설득하려고 애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조는 여전히 소극적이었다. 친구 성혼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차라리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는 것이 유자(儒子)의 도리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율곡은 “임금의 마음이 어떻게 갑자기 바뀌겠는가? 천천히 정성을 쌓아 가면서 임금이 깨달을 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정성을 다하지 아니하고 금방 성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문득 물러나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닐 것이다”라고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다. 39세가 된 1574년(선조 7년)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오른 율곡은 장문의 개혁 상소를 올린다. 이를 속칭 「만언봉사」(萬言封事)라고 부른다. 율곡은 「만언봉사」에서 당시 문제점 일곱 가지를 제시하고 임금의 수기(修己)와 안민(安民) 대책을 개진한다. 이는 평소에 하던 주장을 요약한 것이다. 선조는 「만언봉사」의 개혁안을 칭찬하면서도, 법을 갑자기 고치기는 어렵다면서 역시 시행하지 않았다. 율곡은 그 후에도 특히 공안의 개정을 적극 강조하며 민생안정책을 주장했으나, 선조는 조종의 구법을 함부로 고칠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는다.
1575년(선조 8년) 율곡은 불혹을 맞이한다. 율곡은 이때를 음이 끝나고 양이 생기는 시기로 보아, 일말의 희망을 품고 다시 선조를 설득한다. 선조가 즉위 후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지만, 진척한 일도 없어 신민들이 실망하고 있다고 직언한다. 같은 해 율곡은 자신의 경세학을 집대성한 『성학집요』(聖學輯要)를 편찬하여 선조에게 바친다.
3) 동서분당 속에서도 중쇠기의 위험을 경고하다
1575년 동서분당(東西分黨)이 발생하였다. 동서분당은 인사권을 가진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김효원파인 동인과 심의겸파인 서인으로 대립구도가 형성된 사건이다. 이로서 조선정치사의 가장 큰 특징인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서인은 척신 가문인 심의겸을 비롯하여 서울에 뿌리를 둔 기성세력이었던 반면, 동인은 이황과 조식의 문인들이 대부분으로 경상도를 비롯한 지방 출신이 많았다. 물론 양자 모두 성리학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던 사림 집단이었다. 율곡은 심의겸과의 친분으로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서인으로 지목되어 동인의 맹렬한 공격에 시달렸다. 그렇지만 평생 중립적 입장에서 갈등을 조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붕당 갈등 속 은거하던 율곡은 42세 되던 1577년(선조 10년) 선조의 대사간 벼슬을 거부하면서 이른바 두 번째 「만언봉사」를 올린다. 이 상소는 구체적인 개혁안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강경하게 선조의 잘못을 질책한다.
오늘날의 인심과 세도가 이 지경이 된 것을 보면 전하의 정치와 교화가 훌륭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세상의 일을 유념하고 계시며, 백성들의 삶을 염려하고 계시지만, 지금까지 정사(政事)의 폐단을 한 가지도 고치지 못하였고, 백성이 받고 있는 고통을 한 가지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전하께서 옛날 법규만을 굳게 지키시고, 변통할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날부터 제왕이 왕업을 이룩하고 법을 제정할 때에는 비록 진선진미하였다고 하더라도, 시대가 바뀌고 사태가 달라지고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는 것으로 볼 때 후세의 자손으로 선대의 사업과 뜻을 잘 계술(繼述, 계지술사)하는 자는 반드시 편의에 따라 고쳐야 하고, 옛 법만을 고집하지 않아야 합니다.
- 『율곡 이이 평전』, 112~113쪽(두 번째 「만언봉사」).
전하께서는 세상의 일을 유념하고 계시며, 백성들의 삶을 염려하고 계시지만, 지금까지 정사(政事)의 폐단을 한 가지도 고치지 못하였고, 백성이 받고 있는 고통을 한 가지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전하께서 옛날 법규만을 굳게 지키시고, 변통할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날부터 제왕이 왕업을 이룩하고 법을 제정할 때에는 비록 진선진미하였다고 하더라도, 시대가 바뀌고 사태가 달라지고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는 것으로 볼 때 후세의 자손으로 선대의 사업과 뜻을 잘 계술(繼述, 계지술사)하는 자는 반드시 편의에 따라 고쳐야 하고, 옛 법만을 고집하지 않아야 합니다.
- 『율곡 이이 평전』, 112~113쪽(두 번째 「만언봉사」).
이미 지난 10년간 끊임없이 경장을 주장했음에도 실현되지 않은 데에 대한 실망감이 컸을 것이다. 선조는 그를 칭찬하면서도 대사간직에서 해직시켰다.
45세 되던 1580년(선조 13년), 율곡은 선조의 간곡한 요청으로 4년 만에 벼슬길에 나온다. 홍문관 부제학, 뒤이어 대사간에 취임한 그는 나라가 토붕와해의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면서 다시 경장을 주장한다. 이 해에 율곡은 첫 판서 직으로 호조판서 직을 수행하며 개혁 추진 임시기구인 경제사(經濟司) 설치를 건의하나, 선조는 역시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 선조는 호조판서에 더해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성균관의 이른바 사관(四館)의 최고 책임을 모두 율곡에게 맡기는데, 그를 실무자보다는 학자로서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율곡은 47세에 이조판서, 같은 해 의정부 우찬성(右贊成, 종1품), 48세에 병조판서 등 중책을 맡는다. 그러나 그의 개혁론은 당쟁 구도 속에서 반대파에 부딪혀 좌절된다. 이조판서 때는 인사권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인사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려 한다는 비판을 받아 무산된다. 「학교모범」(學校模範)이라는 저작을 짓자, 자신의 문도(門徒)들을 성균관에 넣으려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우찬성 시절 마치 10년 뒤 임진왜란을 내다보는듯한 세 번째 「만언봉사」를 올리나, 선조뿐만 아니라 동인의 영수 유성룡의 반대로 개혁은 시행되지 못한다.
한편, 병조판서 시절 율곡은 경연에서 이른바 ‘10만양병설’을 건의했다고 하는데, 기록에 따라 주장을 제기한 시기에 차이가 있다. 1583년 여진족의 북방침입도 있었던 만큼 율곡이 양병에 적극적이었던 것과, 동인의 유성룡이 양병을 그다지 지지하지 않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
4) 율곡의 말년
율곡은 말년에 위기에 빠진다. 병조판서 시절 임금에게 아뢰지 않고 조치를 시행한 것과, 임금이 불러서 입궐하였으나 현기증이 나서 승정원에 가지 않은 일로 트집을 잡힌 것이다. 이는 임금을 무시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당시 율곡의 심각한 건강상태를 고려하면 그리 문제 삼을 일은 아니었다. 율곡이 병조판서를 사직하고 물러났음에도, 그의 생애 전체를 비난하는 온갖 발언과, 이에 반박하는 주장이 쏟아져 나왔다. 그 과정에서 율곡의 친구로 그를 변호하고자 한 성혼과, 동인이지만 중도적인 입장인 김우옹의 평가를 살펴볼만하다.
신이 보건대 이이의 사람됨은 소통(疏通)하고 명민(明敏)하고 천성이 매우 고매하여 젊은 시절부터 구도(求道)의 뜻을 가지고 학문으로 자신을 격려하여 왔습니다. …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것도 그의 지성에서 나온 것으로, 오직 나라가 있는 것만 알고 자신이 있는 것은 모르며, 시무를 구제하는 데 급급하여 자신의 따뜻함과 배부름 따위는 생각에도 두지 않음이 바로 그의 일생의 소양입니다. … 병통(病痛) 또한 없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 소통했기 때문에 소탈한 병통이 있어 침착하고 치밀한 기풍이 적습니다. 성품이 결백하고 정직하고 오활한 만큼 진실하기 때문에 겉모양을 꾸민다거나 남의 뜻을 맞추려고 하는 태도는 전혀 없고, 뜻이 큰 만큼 미세한 일에는 소략하며, 스스로를 믿어 시속(時俗)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를 사랑하는 자는 매우 적고, 비웃는 자는 많으며, … 게다가 시론과는 맞지 않는 시폐를 논한 것이 당시 사람들의 꺼리는 바가 된 것입니다.
- 성혼의 율곡 평, 『율곡 이이 평전』 145~146쪽.
이이는 명민한 학문과 해박한 지식으로 밝은 시대를 만나 전하께서 그를 믿고 의지하여 난국을 타개해 보려 했고 이이 또한 스스로 세도(世道)를 책임져서, 물과 물고기의 사이처럼 계책을 내면 실현되고 말만 하면 다 들어주시는, 참으로 천년을 두고 만나기 어려운 지우였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뜻만 컸지 재주가 소략하고 도량이 얕고 소견이 편협하여 … 일국의 공론을 모아 천하를 위한 일을 해내지 못하고, … 선비들의 인심을 잃은 지 오래인데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빈번하게 장주(章奏)를 올려 강변으로 상대를 이기려고 했으며, 하는 일도 경솔하고 조급한 데가 있어 거의 인망에 부응하지 못하고 … 이이의 본심은 조정을 안정시켜 시사를 목적대로 달성해 보려는 것이었지만 그의 의견에 편협된 바가 있어 그 해가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 이이의 본심은 이해하시되 소루한 병이 있음을 아시고, 삼사에 대해서는 그들의 부조(浮躁)함을 억제하되 사류들의 근본 심정을 살펴 주십시오.
- 김우옹의 율곡 평, 『율곡 이이 평전』 148~149쪽.
- 김우옹의 율곡 평, 『율곡 이이 평전』 148~149쪽.
이상을 보면, 율곡이 사심 없이 나라를 걱정하고 명민했던 점은 두루 인정을 받았음을 알 수 있으나, 동시에 너무 바른 말만 하고 방법이 급하고 세밀하지 못해 적을 많이 만들기도 했던 것도 사실로 보인다.
선조는 단호할 만큼 율곡을 비호했고, 선조는 진심으로 율곡을 신임하여 두 번째 이조판서 직을 내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율곡은 불과 3개월 만에 1584년(선조 17년) 1월 16일 49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선조수정실록』에 율곡에 대한 장문의 졸기(卒記, 주요 인물이 사망하면 그 생애와 인물평을 정리한 것)가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집안이 가난하여 장례 비용은 친구들이 부담했으며, 처자들이 살 집이 없어 문생(門生)과 고구(故舊, 오랜 친구)들이 재물을 모아 조그만 집을 사 주었으나 그래도 가족들은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장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셔져 있는 파주 자운산으로 정하고 3월 20일에 안장했는데 아버지 무덤 뒤 수십 보에 있었다. 장례식 날에는 거리마다 곡성이 진동하고 금군과 시민들이 모두 나와 횃불을 밝혀 수십 리 밖에도 불빛이 환하게 비쳤다.
- 『율곡 이이 평전』 152~153쪽.
4. 율곡의 경세론
1) 개요
조선시대의 지배사상은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에서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던 불교와 도교에 대항하여 성립한 새로운 유학이었다. 성리학은 보편적, 불변적인 이(理)와 현상적, 가변적 기(氣)로 우주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하는 이기론(理氣論)을 바탕으로 인간의 심성을 설명한 인성론(人性論), 도덕적 실천방법을 설명한 수양론(修養論), 성리학의 이상을 현실사회에 구현하는 방법인 예론(禮論), 이에 입각한 정치, 경제, 사회 정책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성리학은 신분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명분론(名分論), 지주전호제 아래 소작인과의 모순과 대립 관계를 완화하기 위한 분수론(分殊論)을 포함한다. 지주전호제 아래 중소지주층의 이해를 반영한, 기본적으로 보수적 사상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성리학은 봉건제 사회에서 자연과 인간 사회의 모든 분야를 일관되게 설명하려는 종합적인 사상체계였다.
그런데 동시에, 성리학은 공자의 인정(仁政)과 덕치(德治)를 바탕으로 맹자가 확립한 왕도정치(王道政治)와 민본사상(民本思想)을 포함하여, 그 계급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민생을 위한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성리학의 양면적 성격은 조선에서도 나타난다. 즉 성리학 중 수양학의 도덕적 실천만으로도 이상적인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는 다소 보수적인 경향과, 경세제민(經世濟民,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을 구한다는 뜻으로, 유가에서 현실의 실천 원리로 작용하였다)과 왕도정치 실현을 위해서는 경세학적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경향이 동시에 존재했던 것이다.
율곡은 이기론을 체계화한 조선의 대표적 성리학자였지만, 수양학에만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시각에서 경세학을 체계화하였다. 그의 대표작 『성학집요』에서 율곡은 성리학의 핵심을 수기치인(修己治人, 자기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림)으로 요약한다. 수양학을 근본에 두는 동시에, 이상적인 정치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경세론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히, 그의 경세론은 현실의 위기를 연산군 이후 폐단이 누적된 ‘중쇠기’로 정확히 인식하고, 체제 모순을 개혁하여 안민을 위한 개혁안을 추상적 원칙 이상으로 구체적으로 제출했다.
율곡의 경세론은 그의 저작인 『동호문답』, 『성학집요』와, 개혁안을 담은 장문의 상소 「만언봉사」, 경연에서의 발언들, 각종 상소문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성학집요』에서 왕도 정치 이념과 경장 이론을 가장 체계적이고도 상세하게 정리하였다. 이 책은 송나라 학자 진덕수가 편찬한 『대학연의』를 보완하기 위해 집필한 것이다. 조선 초기부터 경연 교재로 사용된 『대학연의』는 격물(格物)에서 시작하여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순서로 나아가야 한다는 정치 이론서다. 율곡은 이 책이 분량이 매우 방대하고 논지가 산만하여 핵심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에 분량을 8권으로 압축하고 핵심 논지를 부각시켜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해설하였다. 조선의 현실에서 제기되는 시무(時務)의 과제까지도 아울러 제시했다. 이 장에서는 특히 『성학집요』를 중심으로 율곡의 저작과 발언들에 나타난 그의 경세론을 살펴보기로 한다.
2) 중국과 조선의 정치사
율곡은 『동호문답』과 『성학집요』에서 경장의 필요성을 도출하기 위한 사전단계로, 왕도정치의 관점에서 중국과 조선의 정치사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치세를 가져오는 방법에는 왕도(王道)와 패도(覇道) 두 가지가 있다. 왕도는 인의(仁義)의 정치를 베풀어 천리의 올바름에 도달하는 것이고, 패도는 인의의 이름만 빌린 채 권모(權謀)의 정치를 베풀고 공리(功利)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율곡은 왕도가 시행된 이상시대는 삼대(三代, 중국 고대의 하·은·주를 일컫는 것으로 성리학적 사상체계에서 이상시대로 여겨짐) 뿐이라고 보았다. 도학(道學)을 하는 진실한 선비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치사는 어떨까? 율곡에 따르면 기자(箕子)가 처음으로 왕도를 행한 군사(君師)였다. 그 이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왕도 정치가 없었다. 고려 말에 정몽주가 나와 조금 유자의 기상을 갖추었을 뿐이다. 조선 왕조는 태조가 계운(啓運, 창업)하고, 세종이 요순과 같은 수성(守成)의 치적을 올렸다. 성종도 성군이었으나 보필하는 신하가 없었다. 중종은 연산군의 학정을 시정하기 위해 조광조 같은 현인을 등용하여 요순시대의 꿈을 꾸었으나, 조광조는 아직 학문이 부족하고 성급하여 임금을 바로잡는 데 실패하였다. 명종 때에는 이기와 윤원형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의 탄식이 극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선조의 즉위로 율곡은 큰 기대를 걸었다. 선조가 성군이 될 자질이 있고, 권간들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어려움도 있지만 율곡은 임금이 왕도의 뜻을 세우고 현명한 신하들을 가까이 하여 적극적으로 실천하면 삼대의 정치가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이미 보았다시피 선조는 율곡의 주장을 일관되게 거절한다. 그럼에도 율곡은 선조에게 이상적인 군주인 군사(君師)가 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한다.
3) 시무와 경장의 필요성
율곡은 『성학집요』의 4편 위정(爲政) 4장 식시무(識時務) 편에서 본격적으로 경장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는 왕도정치의 기본 원칙은 시대가 달라져도 바뀔 수 없지만, 시대에 따라 제도적 문제는 바뀔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그 시대가 요구하는 정치적 과제인 ‘시무’(時務)를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앞서 살펴본 왕도정치적 관점의 정치사에 따르면, 당시는 창업과 수성에 이은 경장의 시대이다. 개국한 지 200년의 세월이 흘러서 중쇠기에 접어들었다. 이럴 때 경장을 하여 성공하면 왕업이 오래갈 수 있지만, 그러지 않고 구습에 얽매여 있으면 토붕와해, 즉 흙벽이 무너지고 기와가 부서져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것이다.
여기서 율곡은 자신의 경장론이 그동안의 법을 모두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선왕의 아름다운 뜻은 계승하면서 부분적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를 계지술사(繼志述事)라고도 불렀다. 즉, 혁명적인 개혁도 아니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도 아닌 중간적 형태의 온건한 개혁이라는 것이다. 그의 목표는 삼대의 이상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4) 군신론
율곡은 경장의 주체로 군주와 함께 신하를 설정하여 이상정치 실현을 위한 군주와 신하의 역할에 대해 여러 차례 주장한다. 『성학집요』의 4편 위정에서 임금은 재상과 정치를 함께 논의하는 것, 즉 논상(論相)에 있으며 재상은 임금을 바로잡는 헌가체부(獻可替否, 옳은 일을 권하고 악한 일을 못하게 함)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평소에도 선조에게 계속 군사가 될 것을 요구하며 어진 신하를 가까이 하고 자주 의논할 것을 당부하였다.
율곡의 군신론은 『성학집요』의 5편 성현도통(聖賢道統)에 가장 체계적으로 나온다. 이상적인 군주인 ‘군사’는 임금이자 스승이라는 뜻으로, 권력의 정당성인 치통과 도덕적 정당성인 도통을 겸비한 인물이다. 그러나 율곡은 군사의 자격을 갖추고 왕도를 행한 임금은 요순삼대나 오제삼왕, 고조선의 기자와 조선의 세종대왕을 제외하고는 중국과 우리나라 모두에 없었다고 보았다. 그는 세습 군주제에서 군사가 반드시 나오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명종이나 선조도 군사가 될 만한 자질은 갖췄다고 보았으나, 실천을 하지 않았기에 군사로 보지 않았다.
율곡은 삼대 이후로는 임금이 아닌 재야의 학자에게서 성현의 도통의 명맥이 유지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도통을 지닌 어질고 능력 있는 신하들을 등용하여, 이들이 군주를 보완하여 함께 정치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볼 때, 율곡은 선조가 군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군신공치(君臣共治)를 통해 경장을 추진할 입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5) 구체적인 개혁론
율곡은 누적된 폐단에 대해 ‘안민’의 관점에서 구체적인 개혁안도 다양하게 제시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 민생이 극심한 빈곤 상태에 빠져있기에, 우선 경장을 통해 고통을 줄여 인민의 생업기반을 마련한 후에 국가기반을 다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율곡의 관심사는 주로 조세제도를 둘러싼 문제와 그 대책에 집중된다. 개혁 방향은 ‘양입위출’(量入爲出, 조선시대 재정운영 원칙으로, 수입에 맞추어 지출을 정하는 것) 원칙에 근거하여 국가경비를 절약하고 과대한 행정기구·관직을 줄이며, 합리적 조세제도 개혁으로 전반적인 조세부담을 줄이고 중간착취를 근절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양민’(養民)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율곡의 관점은 교육·사회 개혁안과, 외침(外侵)에 대비한 양병 정책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① 공납 개혁
율곡이 평생 관심을 기울인 것은 ‘방납’의 폐단으로 가장 큰 문제를 낳고 있던 공납 개혁이었다. 그의 기본적인 인식은 진상(進上, 본래 임금에게 예물을 바친다는 의미였으나, 사실상 조세화되어 공물과 함께 공납으로 바쳐졌다)은 불필요하게 거두고 있기에 줄여야 하며, 공물은 방납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공안을 개혁하고 공물을 토지세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율곡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신이 생각건대, 천자의 부는 사해(四海, 천하)에 저장해두는 것이며, 제후의 부는 백성에게 저장해 두는 것입니다. 창름(곡식 창고)과 부고(府庫, 창고)는 공공의 물건으로서 사저(私貯)로 가지면 안 됩니다. 나라의 임금이 사저를 가지는 것은 이익을 다투는 것이 됩니다. 이(利)의 근원이 한번 열리면 아랫사람들이 다투어 이익을 추구하여 어떤 일이라도 하게 됩니다. 신이 생각하기에, 전하께서 진실로 큰일을 하고자 하시면 먼저 내탕과 내수사를 호조에 넘겨 국가의 공비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재를 갖지 않아, 전하께서 터럭만큼도 이를 다투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신하와 백성들이 환하게 깨닫게 되면 더러운 풍습이 깨끗해지고 도덕이 지극하게 될 것입니다.
- 『율곡 이이 평전』 195쪽.
(『율곡전서』 권25 「성학집요」 7, 우언변별의리[右言辨別義利].)
한편, 율곡이 34세에 지은 『동호문답』에서는 공물과 관련하여 당면한 폐단 5가지 중 ‘공물방납(貢物防納)의 폐’로 지칭하며 ‘수미법’(收米法)을 제안한다. 공물을 바칠 때 중간에 이서(하급 관리)들과 상인들이 사비로 준비한 물건을 관청에 바치고 그 대가를 백성에게 백 배로 거두는 문제가 있으니, 토지 1결마다 1두의 쌀을 관청에 바쳐 물품을 조달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39세에 올린 「만언봉사」에서는 이 폐단이 원래 토산물로 바치던 공물(貢物)을 연산군 이후 궁중의 사치를 위해 그 지방의 토산물이 아닌 것을 바치도록 한 데서 비롯됐다고 보고, 원래대로 토산물을 바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미법 시행 이전에, 바치는 공물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공안 개혁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공안개혁론은 『성학집요』에서도 언급된다. 아마도 당장 수미법과 같은 개혁을 시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공안이라도 정비하자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율곡이 주장한 수미법은 임진왜란 중 유성룡의 건의로 일시적으로 채택되었다가, 100년의 과정을 거쳐 대동법(공물을 지방 특산물 대신 쌀로 통일하여 세금을 내도록 하는 제도)의 전국적 시행으로 이어진다.
② 군정개혁
율곡은 군정개혁도 지속적으로 주장하였다. 양반사족층이 군역으로부터 이탈하고, 포를 납부하고 다른 사람을 대신 세우는 풍조의 확산으로, 당시 조선은 외침에 대응할 수 있는 병력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는 우선 군역의 부담이 매우 크고 공평하지 않아 농민들의 생업기반을 파괴하고 있으므로, 일단 이 문제를 해결하고, 차후에 양병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율곡은 군정개혁도 지속적으로 주장하였다. 양반사족층이 군역으로부터 이탈하고, 포를 납부하고 다른 사람을 대신 세우는 풍조의 확산으로, 당시 조선은 외침에 대응할 수 있는 병력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는 우선 군역의 부담이 매우 크고 공평하지 않아 농민들의 생업기반을 파괴하고 있으므로, 일단 이 문제를 해결하고, 차후에 양병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군정개혁론은 『동호문답』에서 ‘일족절린(一族切隣)의 폐’로 지적된다. 율곡은 군역을 피해 도망간 사람이 생기면 그 부담을 일족이나 가까운 이웃에게 부담시키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도망간 자를 군적에서 삭제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 ‘역사불균(役事不均)의 폐’, 즉 역을 질 때 부담이 고르지 못해 도망가는 자가 속출하는 문제가 있으므로, 역 부과를 공평하게 할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과 함께 「만언봉사」에서는 변방 지휘관들이 녹봉이 없어 병사로부터 면포나 쌀을 받는 문제가 있으니 녹봉을 지급하고, 활쏘기를 시험하여 공사천(公私賤)을 양인(良人)으로 올려주자는 대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한편, 율곡의 ‘10만양병설’은 인조 시대 서인이 편찬하여 당파성을 띄고 있다고 평가받는 『선조수정실록』과 율곡의 제자들이 지은 『율곡행장』에만 기록되어 있어 그 실체를 둘러싸고 다소 논란이 있다. 두 기록을 통해서는 그가 ‘10만양병설’을 주장한 정확한 시기와 10만 명이나 되는 군사를 양성하려 한 방법을 알 수 없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볼 때, ‘10만양병설’을 ‘율곡이 10년 후 임진왜란을 예측하고 10만 명의 군사를 양병하려 한 주장’이라고 볼 근거는 부족해 보인다. 다만 율곡이 병조판서 재직 시절, 북방의 여진족 니탕개의 난이 발발하자 ‘시무6조’를 통해 양병 계책을 제출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양반의 군역이 면제되는 당시에 1475년(성종 6년)의 군액인 148,449명을 확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므로, 군정개혁을 잘 하면 대략 10만 명 정도를 상한으로 확보할 수 있으리라 추산해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10만양병설’은 율곡이 북방 여진의 침입에 대한 방비뿐만 아니라 남방 왜의 침입까지도 두고 백성을 잘 길러 병사를 양성해야 한다는 양병 계책을 낸 것이, 임진왜란 중에 이이의 문인들에 의해 다소 확대, 미화된 것일 수 있다.
율곡이 ‘시무6조’의 하나로 제출한 양병 계책에서, 그는 양병을 하려면 양민(養民)이 우선이라고 주장하였다. 백성이 곤궁하면 군대를 조발할 수도, 군량을 확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시 부담해야 하는 군역이 공평하지 않아 병사가 괴로움에 도망가면, 그 일족이 책임을 지게 한 탓에 심하면 마을 전체가 텅 비는 사태도 있다고 언급하였다. 이에 율곡은 백성을 편안히 하기 위해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여 군적(軍籍)을 전담하는 부서를 설치하고, 이 부서에서 군적을 관장하여 그 역을 균등하게 하며, 군사가 도망간 지 3년이 지나면 다시 모집하여 보충케 하고, 그 일족이 책임을 지는 폐단을 근절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③ 그 외
율곡은 노비제와 관련하여 지방에 있는 공노비들이 상경하여 역을 지게 한 선상(選上) 문제가 심각하니 폐지하여 고통을 줄이자고 주장했다. 또한 노비가 재산이었던 당시, 지배층이 노비를 최대한 늘리고자 양인과 천인을 혼인시키고 그 자녀를 노비로 만들어 사노비가 계속해서 늘어났는데, 이러한 폐단(이 문제는 조선 후기 내내 논란이 된다)을 지적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율곡은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奴良妻所生從母從良法)을 제안했다. 이는 천인 남성과 양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從母) 양인 신분을 주어, 양역을 부담할 수 있는 인구를 늘리자는 계책이었다. 당대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서인이 이 정책을 계승하여 후대에 실시되었다. 그 외에도 율곡은 쓸모없는 관직을 줄이고 군현을 개편하여 전반적인 국가재정을 절약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율곡은 노비제와 관련하여 지방에 있는 공노비들이 상경하여 역을 지게 한 선상(選上) 문제가 심각하니 폐지하여 고통을 줄이자고 주장했다. 또한 노비가 재산이었던 당시, 지배층이 노비를 최대한 늘리고자 양인과 천인을 혼인시키고 그 자녀를 노비로 만들어 사노비가 계속해서 늘어났는데, 이러한 폐단(이 문제는 조선 후기 내내 논란이 된다)을 지적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율곡은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奴良妻所生從母從良法)을 제안했다. 이는 천인 남성과 양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從母) 양인 신분을 주어, 양역을 부담할 수 있는 인구를 늘리자는 계책이었다. 당대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서인이 이 정책을 계승하여 후대에 실시되었다. 그 외에도 율곡은 쓸모없는 관직을 줄이고 군현을 개편하여 전반적인 국가재정을 절약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6) 소결
율곡은 성리학의 핵심인 수기치인을 균형 있게 이해하고, 수양학과 동시에 경세학을 체계화하였다. 특히 성리학적 정치사상을 기초로 세습군주제를 보완하는 신하들의 역할에 주목하고, ‘중쇠기’라는 시대인식 속에 구체적인 조세개혁을 주장했다. 다만 공납과 군역 외에 전세제도에 대한 개혁은 강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대대적인 양전(量田, 전세 징수를 위해 전국의 전결 수를 측량하는 것으로 본래 20년에 한 번씩 하도록 하였으나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을 전제하는 것이라 차후의 과제로 유보한 것으로 보인다.
5. 결론
율곡은 세상을 떠난 후에 더 빛났다. 그의 제자들은 기호학파를 형성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서인과 노론, 소론을 구성하고 조선 후기 300년의 역사를 주도했다. 숙종 때 성균관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조선시대 사대부로서 최고의 영예인, 국가의 제사를 받기도 했다. 율곡의 학문은 조선 후기 관학의 표준이 되어 그의 대표작 『성학집요』는 경연의 교재가 되었다.
이 책의 저자 한영우는 임진왜란 이후의 300년 역사는 율곡의 학문과 경장을 실천한 역사나 다름없다고 평가한다. 그가 주장한 공납 개혁은 대동법으로, 군정개혁은 균역법으로, 서얼 차별대우 비판은 서얼의 청직 진출을 허용하는 허통으로, 개방적 신분 사상은 후기 개혁 사상에 영향을 주는 식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율곡의 군사론은 영조와 정조, 고종에 의해 수용되었다는 언급도 한다. 한영우는 이러한 조선 후기의 변화가, 율곡의 학문과 사상이 경세학을 지닌 성리학이자 이단을 포용하는 성리학이었기에 가능했다고 평가한다.
한편, 과천연구실의 윤소영 교수는 『봉건제론』에서 율곡을 중국의 뛰어난 경세가였던 ‘한유부터 구준까지 한걸음에 내달은’ 인물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이후 서인이 율곡의 경세학을 상대화했다고 평가한다. 그는 율곡이 주장한 경장론의 핵심을 지주전호제에 적합한 조세제도의 개혁이라고 보았으며, 율곡의 군신론에서 구준의 군신공치론과의 친화성을 발견한다. 실제로 병자호란을 거치며 후대의 서인은 경장론보다는 예학과 친명반청의리론으로 치우친 모습을 보인다. 윤 교수는 그 과정에서 숙종의 환국정치는 신권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영조와 정조의 탕평정치는 붕당정치를 해체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율곡은 불교에 대항하여 삼대(三代)로부터 공자, 맹자로 이어지는 유가의 도통론(道通論)을 내세운 한유와 유사한 점이 많다. 당나라 시대 정치가이자 유학자였던 한유는 중국이 약 7백 년 간 도교와 불교의 영향 하에 있었던 시기에 도교와 불교를 비판하고, 『대학』에 주목하여 유가는 수양학인 동시에 경세학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로써 한유는 이후 ‘신유학’ 시대를 여는 선구자적 역할을 한다. 한편, 율곡은 명나라 시대 정치가이자 유학자였던 구준과 유사하게, 중쇠기라는 인식 하에 군신공치론을 주장하였다. 구준은 거자학(擧子學), 즉, 과거준비생을 위한 학문으로 유학이 변질되었던 때에 새로운 경세학을 제시하였다. 특히, 그는 『대학연의보』를 편찬하여 환관의 전횡으로 명나라가 중쇠기가 시작되었다는 판단 하에 상세한 개혁안을 제시하며, 세습군주의 한계를 보완하는 신하인 사유(師儒)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성학집요』 등에서 군사가 나오기 어렵다면 어진 신하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율곡의 주장과 유사하다.
세습군주가 통치한 봉건제 사회에서 개혁의 계기는 능력 있는 신하의 권한이 증대될 때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군신공치론이 담긴 『성학집요』가 조선 후기 경연교재의 애독서로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정치사는 점차 붕당정치를 해체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추세로 이어진다. 심지어 정조는 구준의 『대학연의보』에서 신하의 역할과 관련한 부분을 모두 삭제하고 왕권강화를 특별히 강조하는 『대학유의』를 편찬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인가?
더불어 율곡의 선구적인 공납 개혁과 군정 개혁은 후대에 대동법, 균역법으로 이어지며 조세의 전반적인 지세화로 이어진다. 그러나 조선이 이러한 일정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양전조차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고 ‘삼정의 문란’과 ‘민란의 시대’로 대표되는 19세기의 위기를 맞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와 같은 과정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율곡 사후에 등장한 경세가들과 조선 후기에 이루어진 논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바, 이는 다음 기회로 다루기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