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2022 가을. 1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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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는 민주주의를 부활시킬 수 있을까?

『더 레프트 : 1848-2000』

홍현재 | 회원,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차장

오늘날 스탈린주의가 남긴 오명으로 점철된 사회주의와 혁명의 역사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것, 더 나아가서는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8년에 출간된 『The Left 1848-2000』(제프 일리 지음, 유강은 옮김. 이하 ‘『The Left』’ 혹은 ‘책’)은 사회주의가 여전히 민주주의 확대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저자는 2000년을 사회주의가 종말한 시기로 보고, 그간 유럽 사회주의의 역사를 개괄하며 민주주의 이룩과 확대에 기여한 좌파의 성과와 한계를 분석한다.

책 서문에서 저자는 19세기 유럽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확대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민주주의의 법적 정의는 자유·보통·비밀·평등 선거, 표현·양심·집회·결사·언론 등의 시민 자유, 재판 없이 구금되지 않을 자유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에는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역사적 과정이 담겨있지 않다.

저자는 유럽 민주주의의 확대는 좌파의 역사와 동떨어질 수 없다고 강조한다. 좌파는 불평등과 인간성 억압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려 시도했으며, 인민 대중의 조직된 요구를 통해 이를 이뤄냈다. 단적인 예시가 바로 사회주의자들이 현대적 대중정당 모델을 창안했다는 점이다. 1860년대 민중의 민주주의 정당을 위한 법률적·헌법적 조건이 형성된 이후, 1868년~1872년 제1 인터내셔널로 집결한 사회주의자들은 인민의 의사를 조직하고 대변하는 정치를 실현하는 경로로 의회주의를 주요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70년대와 1890년대 사이에 유럽 대륙 곳곳에서 잇따라 사회주의 정당이 결성되었다. 이 정당들은 대중을 대상으로 공개적인 운동을 벌이고, 합의된 절차와 선출된 위원회 등 내부 민주주의를 실현했다는 특징이 있었다. 이러한 형태의 대중정당은 인민에 의한 정부에 응집력 있고, 중앙집중화되고, 지속적인 정치 형태를 부여했다.

그러나 저자는 또한 사회주의 세력이 대내외적으로 제기된 쟁점을 해결하지 못해 숱한 분열과 갈등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민주주의의 확대로 나아가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도 지적한다. 신체와 정신에 대한 개인의 온전한 소유를 지향하는 자유주의의 기획은, 생산수단이 부재하여 자본가에게 소유권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는 모순을 낳는다. 사회주의는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며 노동권을 주창하고, 자유주의의 한계를 넘어 소유권을 완성하기 위한 시도이다. 그러나 의회로 진출한 유럽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라는 질문을 다방면으로 맞닥뜨렸다. 의회와 정당으로 결집해 국가의 일부가 된 사회주의자들이 자유주의적 소유권을 옹호하며 민중의 반란에 억압적인 국가의 한계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의회 내에서는 사회주의적 노동권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정치와의 타협을 피할 수 없는 조건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어떻게 사회주의로 나아갈 것인가?

또한 저자는 사회주의가 사회주의 외부의 좌파 정치가 제기하는 성평등, 식민주의 등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였음을 지적한다. 20세기 동안 여성에 대한 차별을 폐지하라는 요구와 운동이 유럽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대부분의 시기 사회주의 정당은 이러한 운동과 결합하지 못한 채 남성 노동자 중심의 계급 정치에 골몰했다. 1900년경 강대국에 의한 식민주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사회주의자들은 식민주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사회주의 정당 내 우파 세력은 침략을 자행한 자국에게 이익이 되리라는 애국주의적·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전쟁에 찬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들에 답하지 못한 사회주의는 좌파의 외연을 통합하고 확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본지에서는 『The Left』의 논지를 따라, 자유주의의 한계를 넘어 민주주의를 완성하고자 했던 유럽 좌파의 시도가 맞닥뜨린 궁지를 중심으로 사회주의의 역사를 개괄한다.
 
 

1. 유럽 사회주의 정당의 등장

 
 
유럽에서 ‘사회주의’라는 용어가 ‘반反자본주의’라는 의미를 함축하게 된 것은 1850년 이후였다. 그 이전, 즉 1840년대까지 유럽 전역의 민중 반란을 지배했던 소자산 소유자들의 급진 민주주의는 소규모 생산이 이루어지는 생산자들의 공화국을 이상향으로 삼았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산업화를 거치며, 사회주의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공유하는 사적 소유와 계급지배 체제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의회나 정부를 넘어서서 경제 조직을 비롯한 사회 일반으로까지 확대하려는 지향, 즉 ‘민주주의의 사회화’를 의미하게 되었다.

19세기 전반부, 좌파는 사회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경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블랑키주의와 단절하고 과거의 정치적 모델을 탈피하려 시도했다. 1792~1793년 프랑스 혁명에서 영감을 얻은 블랑키주의는 인민 대중을 위해 행동하는 소수의 비밀 혁명 결사가 독재를 통해 혁명을 쟁취하는 모델을 상정했다. 그리고 대중은 혁명이 성공한 뒤 재교육을 통해 동의를 조직할 존재로 보았다. 그러나 1871년 파리코뮌의 실패는 봉기 중심 혁명관의 비극적 한계를 보여주었다. 또한 대중민주주의 정치가 발전하면서 억압이 부분적으로 완화됨에 따라, 1860년대에 시작된 사회민주주의 전통은 음모적 전위 집단과 반란에 대한 환상을 거부하고 혁명을 위한 민주적인 방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1868~1872년 제1 인터내셔널 내부 논쟁에서 의회주의적 관점이 좌파 내에서 점차 다수를 점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전국 차원의 대중 지지와 의회 대표를 위해 공개적으로 운동을 하고 회합, 결의, 합의된 절차, 선출된 위원회 등 내부 민주주의에 따라 자체 사무를 조직하는 사회주의의 대중정당 모델을 창안하고 도입했다. 이는 19세기 마지막 40년간 이루어진 결정적인 민주주의의 진전이었다.

다만 저자는 사회주의 정당에 한계도 있었다고 평가한다. 사회주의 정당들은 선거에서 전체 유권자의 1/4에서 1/3 수준의 득표에 멈췄으며, 부르주아 정부에는 참여하지 않는다는 제2 인터내셔널의 규범으로 인해 구조적으로 통치 질서의 바깥에 자리했다. 이러한 규범은 노동계급이 다수가 되고 사회주의에 대한 노동계급의 지지가 끝없이 확대되리라는 전망에 근거했지만, 사회주의 정당들이 노동계급의 보편적 지지를 얻는 일은 결코 없었다. 산업, 직종, 지역, 문화적 차이 등에 따라 노동계급의 지지는 조건적이고 실용적이며 불균등했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는 사회주의 정당들이 산업 노동자의 계급정치적 힘에 호소하며, 젠더와 같은 다른 정체성을 다룰 수 없었다는 한계도 있었다고 지적한다.
 
 

2. 사회주의가 마주한 질문들

 
 

1) 혁명이냐, 개량이냐: 자유주의 내부에서 자유주의를 극복하려는 사회주의 정치의 딜레마

1900년 사회주의 정당들이 부르주아 정치구조에 진입하며, 제2 인터내셔널에서는 ‘혁명이냐 개량이냐’라는 쟁점이 대두되었다. 특히 프랑스의 독립적 사회주의 지도자인 밀레랑이 공화국 수호 정부에 상업 장관으로 합류한 ‘밀레랑 사건’을 계기로 해당 논쟁은 격렬해졌다. 바이양은 국가는 억압적인 기구이므로 사회주의자들은 의회와 선거를 활용하고 그를 통해 얻은 자유를 옹호하되 공화국에 대한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더 나아가 게드는 공화국을 통해서는 진정한 개혁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비판까지 제시했다.

저자는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 정치 관료로 취임하며 민주주의의 강화와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진보라는 성과를 얻을 기회였음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현상에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논쟁하는 과정에서 ‘비사회주의자’ 집단을 반동적 집단으로 규정해 배척하는 것은 사회주의 세력을 고립시킨다는 카우츠키의 주장에도 저자는 일부 동의한다. 또 밀레랑 사건 당시 이탈리아의 경우, 일각에서는 사회의 민주적 제도가 위험에 처해 사회주의-자유주의 간 연합을 필요로 하는 비상 사태라고 주장했는데, 저자는 이런 주장 역시 근거가 없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1898년 5월 밀라노 시위대 학살 사건 이후 수립된 우익 정부가 국왕의 포고령을 내세우며 좌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는 국면이었고, 자유당이 이에 맞서 극좌파와 공동전선을 형성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회당 출신 각료가 도입한 일련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자와 부르주아지 간 진보적 공동전선은 자유당이 군대를 동원해 파업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논쟁의 결과, 인터내셔널은 1900년에 타협적인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결의안에 따라 부르주아와의 연합은 일시적으로만,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의 정체성과 독립성을 견지할 때만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독일 사회민주당이 정치 체제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베른슈타인은 체제 내 개혁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진화적 사회주의를 제안하며 체제 내 개량을 지지했다. 이러한 수정주의에 분노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결집했고,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은 부르주아와의 연합을 크게 제한했다. 구체적으로는 1904년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기권 12표, 찬성 25표, 반대 5표로 부르주아와의 개혁주의 동맹을 금기시하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결의안이 통과된 것이다.

그러나 의미심장하게도 반대와 기권은 대부분 튼튼한 의회제 헌법을 지닌 나라들에서 나왔고, 찬성은 민주주의가 허약한 나라들에서 나왔다. 이는 의회제가 정치 체제로 자리잡은 국가의 사회주의자들이 처한, 대중적으로 고립될 위험과 부르주아와의 타협 간의 딜레마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근본적으로는 ‘의회를 활용하되 그 한계를 극복하는 사회주의의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다. 저자의 평가에 따르면, 부르주아 정당과의 협력을 금기시하는 관점은 이러한 물음에 대한 근본적 해법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결정은 단기적으로는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를 통일시키는 추진력을 제공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주의의 분열을 야기했다.

좌파 내 사회민주주의의 위상을 좌우한 핵심적 변수는 자유주의적 입헌주의였다. 즉 의회제 정부, 시민 자유와 법의 지배, 노동조합 인정, 법으로 보장된 공공 영역 등 국가의 제도적 틀이 발전하지 못한 국가일수록 사회민주주의의 진전이 미약했다. 이는 부르주아 정치 구조에 진입하여 의회를 활용하는 전략이 자유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국가의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유의미한 선택지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정당으로의 집결과 의회로의 진입이 아닌 다른 사회주의 정치의 경로가 제시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노동자 통제에 기초한 지방적 협력에 대한 이상이 중앙집중적인 사회민주주의 모델에 대한 대안적 영감의 원천으로 남았다. 이러한 이상은 1914년 이후 전시 경제의 영향 아래 소비에트와 노동자평의회 운동 형태로 등장하기도 했다.

저자는 노동자평의회의 성과를 받아 안지 못한 것을 사회주의 정당의 한계로 지적한다. 1917~1923년 대부분의 혁명 활동을 주도한 노동자평의회는 산업민주주의, 노동자 자주관리, 노동자통제 등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는 의회와 국가기구를 통해 활동하는 사회주의 정당이나, 자본주의 경제의 임금 관계를 주요 관심사로 삼은 노동조합의 활동 양상과는 달랐다. 구체적으로 평의회는 지역사회에 기반을 두고 직장위원이나 작업장 네트워크를 통해 공장과 연결된 모델과, 생산에 기반을 두고 보다 광범위한 사회영역에 연결된 모델을 기반으로 활동했다.

평의회의 활동은 정당의 틀을 넘어섰고, 공식 노동조합에 반하여 진행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노조 지도자들이 평의회의 요구를 억누르고, 평의회를 노동조합 단체교섭기구의 일부로 축소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처럼 ‘협소한 입헌주의’와 ‘반란의 정치’ 양자 사이에 놓인 당시 사회주의 정당의 딜레마를 소개하며, 제3의 길을 찾는 데 실패한 두 사례로 1918~1923년 독일 사회민주당과 이탈리아 사회당을 꼽아 비교한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혁명을 협소한 의회주의의 길로 제한하여 민중운동을 억압하였다. 반면 이탈리아 사회당의 대외적 입장은 비타협적이고 극단적 전복을 추구하는 것이었지만, 반란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혁명적 도전을 구체적으로 제기하지는 못했다. 1919년 6~7월 생계비 소요, 1920년 4월 피에몬테 총파업, 같은 해 11월 공장점거 사태 등 정치위기가 고조화된 국면마다, 사회당은 혁명이라는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최대 강령만을 설정하였고 권력이나 정치 체제를 어떻게 활용할지, 혁명에 어떻게 다다를지에 대한 경로는 없었던 것이다.
 

2)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반전 문제

1900년경, 유럽의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반전 문제 역시 사회주의 내부 쟁점으로 등장했다. 아프리카 일부 지역 식민지화를 두고 남아프리카 원주민과 영국 사이에 일어난 보어 전쟁(1899~1902),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일어난 러일 전쟁(1904~1905) 등 식민주의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에 반대할 것인지를 둘러싼 쟁점이 사회주의자들의 국제적 연대를 가름하는 중요한 시험대가 되었다. 그러나 강대국 간 경쟁이 확대되며, 유럽 사회주의 정당 내부의 우파는 애국주의에 동조해 전쟁을 반대하자는 주장을 가로막기도 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내 관료적 보수주의는 전쟁에 제동을 거는 대중파업 전술에 대한 당의 조건부 승인을 뒤집었다. 우익 사회주의자들은 애국주의와 실용주의를 표방한 반면, 로자 룩셈부르크를 위시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은 대중파업 논쟁의 계기를 통해 전쟁에 반대하였다. 1904년 이후 전쟁에 반대하는 총파업 호소는 매번 인터내셔널 의제에 올랐다. 그러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중심부의 자본주의적 동학에 대한 반대에 그 초점이 맞춰졌으며, 식민지나 식민지 인민의 권리에 관한 입장은 모호했다. 결국 사회주의자들이 반군국주의와 민족 문제에 대한 접근법을 내놓지 못하면서, 1914년 8월 1차 세계전쟁 발발 후 제2 인터내셔널은 혼란에 빠졌다. 이후 1916~1917년 레닌이 식민지 세계에도 민족자결이 적용된다고 주장한 것이 식민주의 비판을 최초로 전면에 내세운 사례였다.

1차 세계전쟁 동안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외국의 침략에 맞서 국가 안보를 지지하고, 노동운동을 애국적 합의에 통합시켰다. 전쟁 발발 직전 국제사회주의사무국이 소집되었으나, 인터내셔널의 무력함을 인식한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급격히 선회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집행부는 반전 운동에 미온적이었는데, 이는 프로이센-독일 국가의 억압에 대한 두려움, 민중이 전쟁을 지지하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이에 더해 독일 정부가 러시아와의 충돌을 차르의 침략에 맞선 전쟁으로 미화하며, 독일 사회민주당은 애국연합에 합류할 논거까지 생겼다. 민족주의적 충성을 대가로 보편참정권 도입 및 일련의 사회개혁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시각도 애국 연합에 합류할 근거가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도 전쟁과 애국을 지지했다.

그러나 1915년 봄에는 스위스, 독일, 프랑스에서 전쟁에 반대하고 사회애국자 및 개혁주의자들로부터 정당을 탈환하려는 좌익의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그 결과물로 1915년 9월 침머발트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국제사회주의위원회가 탄생했다. 이후 1916년 4월 키엔탈 국제회의에서 채택된 결의안은 국제사회주의 사무국 집행부의 재조직과 정부 관직에 있는 사회주의자들의 추방 및 전쟁공채 거부를 요구하고, 전쟁에 동조하는 국제사회주의사무국과 교전국 정당들의 개혁주의 지도부를 강하게 규탄했다. 다만 키엔탈로 집결한 세력에는 서부 및 중부 유럽의 거대 정당, 차르 제국의 비러시아 민족, 미국 및 남아프리카를 제외한 유럽 외 국가의 세력이 유의미하게 포함되지 않았다.

한편 전쟁에 대한 대중적 분노가 거세지고 있었다. 이에 좌파는 전쟁 속에서 공통된 애국적 희생을 요구한 국가의 언어를 역으로 활용해, 전쟁으로 인한 부담의 공평한 분배를 요구했다. 1915년 봄 베를린의 식량 시위, 1915년 5~11월 클라이드사이드 세입자 파업 등이 벌어졌고, 1916년 여름 독일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인한 시위와 폭동, 사회민주당 좌파의 반전 시위가 벌어졌다. 이처럼 전시 경제하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했으나 우익 사회주의자와 노동조합 관료는 전시경제 규제를 일종의 사회주의로 인식하고 추진하였다. 이는 기층에서의 소외를 야기했고, 노동운동 지도부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과 분노가 커졌다.

이러한 흐름에 반발한 각국 내 국제사회주의위원회 지부들에 소속된 분파와, 1917년 독일 사회민주당의 기존 집행부에 대한 반대파가 출범한 독립사회민주당은 대중적으로 지지받는 세력은 아니었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는 파업과 소요의 건수나 참가자가 상당한 규모로 유지되는 등, 기층 노동자들의 운동은 이러한 그룹들과의 연계와 상관없이 더 집중되고 정치적으로 바뀌었다. 마침내 발생한 1917년 4~9월 유럽 곳곳에서 전쟁으로 인한 물질적 부담과 식량의 분배를 둘러싼 대중적 소요는 전쟁에 대한 애국주의적 동의 지반이 해체되었음을 알렸다. 이는 운동진영의 개혁주의와 급진주의 사이의 분열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3. 분열된 사회주의

 
 
‘반전을 주장하는 반대파 vs. 전쟁을 지지하는 입각 사회주의자들’, ‘호전적 개혁주의 vs. 레닌의 혁명주의’ 사이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분열되었다. 이러한 분열을 드러내는 것이 제2 인터내셔널과 분별되는 결집을 위해 출범한 제3 인터내셔널이다. 그런데 저자는 사회주의자 내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의 단초를 제2.5 인터내셔널에서 찾을 수 있다는 고유의 주장을 펼친다.

1920년 7월 코민테른 2차대회에서 코민테른 가입을 위한 21개 요건을 발표한 후, 21개 요건을 기준으로 하여 친볼셰비키 성향의 좌파가 충분히 강한 곳에서는 반대파를 축출하거나 새로운 당을 창설했다. 21개 요건을 거부한 좌파 사회주의자 잔당은 제3 인터내셔널과 구별되는 제2.5 인터내셔널(사회주의정당국제활동연합/빈연합)을 출범하였다. 1919년 여름에 제3 인터내셔널에 처음으로 가입했다가 탈퇴한 스위스 사회민주당,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좌파 등의 러시아 비볼셰비키 세력, 영국의 독립노동당 등도 여기에 합류했다. 1919〜20년 동안 양 진영 사이에서 일관되게 독립성을 유지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 정신적인 주도권을 발휘했다.

레닌은 빈연합을 비난했고 빈연합은 실제로도 분열을 소화할 수 없는 반개혁주의자들의 일시적 피난처였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 저자는 빈연합의 서기였던 프리드리히 아들러가 빈연합을 사회주의의 단결을 위한 다리로 활용하고자 했던 시도에 주목한다. 아들러는 1922년 4월 베를린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단결을 위한 회의를 중재했는데, 각 인터내셔널(제2 인터내셔널, 제3 인터내셔널, 제2.5 인터내셔널)은 이 회의에 10명씩의 대표를 파견했고 나머지 집행부는 참관인으로 참가했다. 이 회의의 성과로 향후 협력을 위한 9인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좌파 간 상호 비난이 거세지며 제3 인터내셔널은 철수했고, 1922년 가을에는 이미 제2.5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과 통합 수순을 거치고 있었다. 

결국 21개 요건은 개혁주의자들과 선을 긋는 효과적 조치였으나 부분적 해결책에 불과했다. 코민테른에 가입하기 위해 공산당은 21개 조항을 준수해야 했다. 이는 다음의 것들을 포함했다. 1) 공산주의 선전과 동요 활동을 하고 대중 앞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상을 떠받친다. 2) 중책을 맡은 개량주의자들과 중도주의적 의견의 지지자들을 당에서 제거하는 것 3) 체제전복 임무를 위한 혁명(합법적인 것을 포함하여) 조직을 창립한다.

의회제 국가에 대항하는 공산주의 정치로서 소비에트를 강조해도, 반란이 퇴조하면 결국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코민테른의 잠재적 지지자들이 소비에트와 의회민주주의 사이에서 동요하는 현실 속에서 21개 요건이 나름의 해결책으로 제시되었으나, 저자는 21개 요건이 좌익 사회주의자들을 사회민주주의 우파의 품으로 밀어넣는 결과를 야기했다고 평가한다. 제3 인터내셔널로 집결한 좌파도 구성상 국제 운동을 실제로 대표하거나, 통일된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합의가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이에 따라 구성원 중 볼셰비키가 결정적 발언권을 가졌기에 제3 인터내셔널은 러시아의 상황 전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머물렀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공산당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전투성을 구체화하는지”, 어떤 종류의 공산주의 정당을 장려할 것인지였다.

1914~1923년의 시기 동안 유럽은 전쟁 이후 헌법제정을 통해 민족국가들로 이루어진 체제가 되었다. 국가-경제 및 국가-사회의 관계가 전쟁의 요구에 의해 심대하게 개편됨에 따라 이해 집단들은 국가와의 코퍼러티즘적 결탁을 맺고 시민에 대한 국가의 요구를 크게 확대했다. 한편으로 전쟁에 대한 염증은 정부에 대한 민중의 믿음을 심각하게 손상시켰으며 급진적인 항의로 몰아갔다.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노동계급의 반란이 확산되는 가운데 새로운 민주적 정치체제를 안정화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좌파의 힘의 확대는 시민권의 확장 및 공공영역의 개방, 사회서비스의 진척, 법에 따른 노동조합의 뚜렷한 보호 등과 연결된 의회민주주의의 확대에 의존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가 선거에서 다수를 점하게 된 것이 곧 혁명의 도래는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첫째, 1918~1919년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강령을 마련하지 못한 채 정부에 들어갔고, 그 결과 사회주의 정치가 의회 영역으로 제한되는 ‘사회주의의 입헌화’가 두드러졌다. 둘째, 입헌적인 접근은 의회 외부 운동의 혁명적 욕구에 대항하여 추진되어야 했다. 이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지배계급과의 동맹으로 몰아넣었고, 급진적인 의지를 가로막았으며, 민중운동과 대결하게 만들었는데, 독일 사회민주당이 가장 극단적인 사례였다. 또한 1929년 대불황으로 자본주의 내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시도로서 드만 계획이 지배계급의 반대, 사회민주당의 배신으로 좌절되었다. 이는 개혁주의마저도 지배계급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제3 인터내셔널 출범과 21개 요건의 규정은 부유하는 사회주의자들을 공산당으로 모으고, 이들의 운동을 규정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시도는 처음에는 노선의 획일성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으며, 1921~1923년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를 비롯한 일부 공산당은 다른 좌파와 꾸준히 협력하였다.

그러나 1924년 7월 코민테른 5차대회에 이르면 유럽 공산당에 대한 지지가 붕괴하면서 볼셰비키화 정책은 공산당을 더욱 엄격한 관료제적 중앙집중주의로 몰고 갔다. 그 결과 남은 것은 민주적 자산을 강화하는 데 전념하면서도 급진주의를 공세적으로 거부하는 개혁주의적 사회민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의 전투성이라는 요새 속에서 혁명을 배반했다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소련의 우위를 무비판적으로 승인하는 혁명적 공산주의 간 분열이었다. 혁명적 공산주의는 획일화된 볼셰비키화 정책과 사회민주주의의 완고한 반공주의로 인해 그 경직성이 더욱 심화되었고, 이 분열은 20세기에 영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4. 파시즘에 맞서 문명의 위기를 막기 위한 시도, 인민전선

 
 
“자본주의의 몰락과 계획된 사회주의 산업화 사이의 대조가 일부 지식인들을 마르크스주의로 향하게 했다면, 위기의 분명한 정치적 결과인 히틀러의 승리는 훨씬 더 많은 이들을 반파시스트들로 변모시켰다. … 첫째는 이제껏 주로 이탈리아와 관계된 운동으로 보였던 파시즘 자체가 정치적 우파의 주요한 국제적 매개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 두 번째로, 파시즘의 위협은 단순히 정치적인 것보다 훨씬 더 컸다. 화두가 된 것은 문명 전체의 미래였다. 파시즘이 마르크스를 억압했다면, 파시즘은 볼테르와 존 스튜어트 밀도 억압했다. 파시즘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만큼이나 무자비하게 모든 형태의 자유주의도 거부했다. 그것은 러시아 혁명만큼이나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으로 생긴 모든 체제들과 더불어 18세기 계몽사상의 유산 전부를 거부했다. 똑같은 적과 똑같은 절멸의 위협에 직면해서 공산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불가피하게 같은 진영으로 밀려들어갔다.”
- 에릭 홉스봄,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의 노동운동은 전국, 지역, 지방정부 속에 깊이 박혀 있는 반면, 중간계급은 분열된 상태였다. 이러한 조건은 역설적으로 좌파의 입지 구축이 아니라 파국적인 패배라는 결과를 낳았다. 우파는 중간계급의 파편화라는 조건 속에서 좌파와의 민주적 연합이 아닌, 급진우파 및 파시즘과의 결탁을 선택했던 것이다. 결국 1920년경에는 유럽의 주변부부터 시작하여 (스칸디나비아를 제외한) 유럽 전역에서 민주주의가 권위주의에 굴복했다. 1933년 1월 30일 나치의 권력 장악을 시작으로 독일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사라지고, 체제 반대파에 대한 테러가 일어나는 등 민주주의의 위기가 유럽 전역에서 드러났다.

이처럼 비상 상황이 도래하자, 자유주의 세력과의 연합으로 파시즘에 맞서기 위한 좌파의 시도로서 인민전선이 등장했다. 인민전선은 사회주의 원칙보다 민주주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파시즘에 맞서 노동자, 농민, 진보적 부르주아지와의 폭넓은 협력을 구축하고자 했다. 인민전선의 결성이 순탄하게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이전부터 이어져 온 좌파 내 분열(사회당과 공산당)로 인한 연합의 어려움, 사회주의자들이 자유주의 제도를 옹호해서는 안 된다는 공산당 내 반대의 목소리 등이 있었다.

 이러한 인민전선주의는 민주주의를 수호할 뿐만 아니라, 장기적 후퇴기에 맞는 장기적 이행을 도모하기 위한 사회주의의 혁신이라는 목적과 함의가 있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공산당의 분파적 고립을 극복하고 공산주의 정당의 전위라는 목표를 타협했다는 점에서, 그럼으로써 새로운 지도의 모델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혁명적 낙관주의를 수정하고 볼셰비키 모델에 대해 최초로 의문을 던진 시도였다는 것이다.

인민전선 시도가 잠시나마 성공한 사례는 프랑스였다. 프랑스에서 상호 적대적인 사회당과 공산당 간의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 그 계기였다. 두 당의 지도부가 1934년 7월 27일 통일협정 조인에서 화해했다. 1933년 말에서 1934년 중반까지 카탈루냐, 아스투리아스, 자를란트, 오스트리아, 벨기에 등에서 통일전선이 이루어졌다. 코민테른 역시 반파시즘으로 기울면서 1934년 6월부터 ‘위로부터의 통일전선’을 제3 인터내셔널의 공식노선으로 채택했다. 코민테른은 1934년 가을 제2 인터내셔널에 접촉하였으나 거부당한 뒤, 통일전선에서 더 폭넓은 인민전선으로 방침을 전환했다. 이후 민주주의라는 가치 아래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공화주의자, 민족주의자 등 파시스트 블록에 맞서는 하나의 블록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1934년 2월 12일 프랑스 사회당과 공산당의 전국 총파업이 성사되었다. 이후 1935년 6월 피에르 라발의 우익 정부가 친파시즘적 정책을 펴자, 프랑스 공산당과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사회당 계열)가 개최한 대중집회에 급진당이 합류하며 프랑스 인민전선이 시작되었다. 1936년 6월 프랑스 사회당 레옹 블룸을 수반으로 한 정부가 들어섰고, 공산당은 외부에서 정부를 지지했다. 1936년 6월 7일 마티뇽 협정으로 고용주들도 노동조합의 권리를 존중하고 노동총연맹을 인정하며, 단체협상을 체결하는 등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인민전선 정부가 임금 인상과 주 40시간 노동 등 노동입법을 도입하여 생산성을 높이고 경제를 회생시키려는 시도는 결국 실패했다. 자본이 ‘파업’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금 준비금이 급감했고, 생산도 증가하지 못했다. 결국 1937년 재정정책은 보수주의로 회귀했으나, 최종적으로 인민전선은 해체되었다.

인민전선이 명을 다했으나, 영국, 소련, 미국의 대연합이 반파시즘 전선을 채택하면서 민족전선이 등장했다. 민족전선은 대체로 공산당이 앞서는 가운데 새로운 지식인 집단이 결합하는 방식이었으며, 사회당은 뒤로 쳐졌다. 1943~1945년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레지스탕스 운동을 주도한 결과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적인 인정을 획득했고, 비공산주의 좌파뿐만 아니라 파시즘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로부터도 받아들여졌다. 또한 반파시즘 투쟁의 과정에서 노동계급의 폭넓은 연합을 이루었고 그 결과 복지국가와 의회민주주의, 시민권, 법의 지배를 부활시켰다.
 
 

5. 공산주의의 위기와 유로코뮤니즘

 
 
그러나 전후 재건과 개혁의 시기는 짧았다. 2차 세계전쟁 종료 이후, 트루먼 미 대통령이 1947년 3월 전체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전 세계적 전쟁을 선포하며 공산주의 봉쇄 기조로 선회한 것이다. 1947년 9월 스탈린은 코민포름(공산당-노동자당 정보기구)을 출범하여 서유럽의 반공 제국주의 체제와의 투쟁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냉전의 진영 노선이 이전의 반파시즘 전선을 대체하며 동유럽에서 소련에 대한 순응이 강화되었다.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에도 서구 공산주의 운동은 한동안 스탈린 개인을 숭배하는 분위기가 지배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적 통제가 강했던 동독에서 생산기준량 증대에 항의하고 자유선거를 요구하는 봉기가 일어났고, 동유럽에서는 경제 자유화와 억압 완화를 요구하는 파업 물결이 일어났다. 뒤이어 흐루쇼프는 공산당 20차 대회에서 비밀연설을 통해 스탈린의 극심한 권력 남용과 독재 및 테러를 비판했고, 스탈린을 탄핵했다. 소련에 대한 순응에 균열이 일어났고, 거대한 딜레마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은 혼란을 겪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톨리아티는 스탈린 개인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기 위해 공산당 지도하의 획일적인 경로 외에도 사회주의로 향하는 여러 길이 있다는 다중심주의 개념을 제시했다. “공산당이 지도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주의로 향한 길을 따라가고 있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 바야흐로 체제 전체가 다중심적으로 바뀌고 있으며, 공산주의 운동 안에서도 이제 우리는 단일한 지도가 아니라 종종 다양한 여러 길을 따름으로써 달성할 수 있는 진보를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The left 1848-2000』, 607쪽.)

코민포름은 해산되었고, 1957년, 1960년에 열린 공산당 국제회의는 소련에 대한 전면적 충성을 거부했다. 1956년 발생한 헝가리 사태와 이집트 침공은 소련과 서구가 각자의 지리적 영역과 범위에서 행동의 자유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냉전의 타협과 질서를 깨뜨린 사건이었으며,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전선을 넘어서는 새로운 대립의 공간을 만들어낸 계기였다. 헝가리의 너지 정부는 레닌의 신경제정책이 스탈린의 5개년 계획보다 사회주의 건설에 더 유리한 모델이라고 내세우며 점진적인 산업화, 소비재 중점 육성, 집산화 중단 등을 추진하였다. (너지는 이를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아닌 제3의 길을 위한 요구라 규정했다.) 그러자 헝가리의 라코시 전 총리는 개혁에 반대하고 너지의 해임을 강요했다. 이에 스탈린주의 정치범들에 대한 시민사회의 비판이 폭발하자, 소련은 다른 스탈린주의자 에르뇌 게뢰를 총리에 앉혔다. 그러나 너지는 헝가리의 바르샤바조약기구 탈퇴를 발표했고, 소련의 붉은 군대가 헝가리의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또한 1956년 이스라엘이 영국, 프랑스와 공모하여 이집트를 침공했다. 이집트의 민족주의 지도자 가말 압델 나세르가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며 과거 식민영토에서 서구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 그 배경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수에즈운하 보호를 명목으로 이스라엘과 이집트 양측의 철수를 요구할 의중이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자, 영국과 프랑스 역시 이어서 이집트를 침공했다. 그러자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에 휴전을 강제하며 수에즈운하 사태는 종료되었다. 수에즈운하 사태는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미국의 우위와 함께, 예전의 제국주의 강대국들이 식민지 해방을 저지할 수 없음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태에도 영국 노동당, 프랑스 좌파는 식민지 인민의 자결권을 등한시하는 등 무능함을 드러냈다. 그 결과 비공산당 반제국주의 비판이 새롭게 등장했다. 헝가리 사태, 소련 붉은 군대에 맞선 헝가리 풀뿌리 민주주의의 부활, 이집트 침공 등 일련의 사건들은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모두 호소력을 잃었음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제 제3의 정치 공간 즉 신좌파가 형성될 공간이 만들어졌다.

프랑스의 68혁명은 소비자본주의 이면의 불평등과 세대 갈등, 드골 정부의 권위주의,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새로운 좌파의 정치가 폭발한 사건이었다. 1968년 3월 22일, 파리의 낭테르 대학 학생들이 베트남 전쟁을 반대한 활동가 6명이 체포되자 학교를 점거한 것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학생들의 시위와 노동자들의 파업이 5~6월까지 이어졌다. 대학생 1,500명이 서명하고 ‘3월 22일 운동’에서 발표한 선언문은 “자본주의-기술관료주의적 대학, 노동분업, 이른바 중립적인 지식에 대한 철저한 거부”를 선언하고, “노동계급과의 연대”를 호소했다. 노동자들은 공장에 기반을 둔 노동자통제와 자주관리 협동조합, 참여적인 의사 결정을 기반으로 한 경제의 민주화를 상상하고 요구했다. 68혁명은 의회사회주의와 자유주의적 절차, 이를 철칙으로 삼은 1945년 이후 좌파 정치에 반대했으며(프랑스 공산당은 나름대로 68혁명에 대응하였으나 의회주의적 틀을 고수하는 한계를 보였다), 직접민주주의와 반문화, 일상 생활에서의 새로운 정치를 지향했다.

한편 같은 해 벌어진 소련의 체코 침공은 유럽의 많은 공산주의자가 소련 비판으로 돌아서며 탈스탈린화 흐름이 가속화되는 계기였다. 1948년 이후 스탈린주의를 추종해 온 체코 공산당의 제1서기에 소극적인 개혁파 둡체크가 오르자 민중과 기층 당원들의 민주화 요구가 분출했다. 프라하의 봄은 스탈린주의 체제와 공산당의 정치 독점에 문제를 제기하며 표현·결사·집회의 자유, 검열 철폐 및 언론의 자유, 문화적 자유의 제도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소련은 체코를 침공했고, 체코 개혁파를 강하게 압박하고 위협함으로써 프라하의 봄을 끝냈다. 당시 소련 지도자들에게 자유화는 사실상 반혁명이었다. 따라서 자유를 주장하는 좌파 정치는 공산당을 통해서가 아니라 공산당에 반대해서 생겨나야만 했다. 1968년 이후 서유럽 각국 공산당은 사회주의의 민족적 길, 사회주의하에서 개인 및 집단의 자유를 지지하며 점진적인 탈스탈린화 과정을 거쳤다.

1970년대에 이르자 사회주의적 전통을 조직하는 노동대중의 통합적 정체성으로서 ‘노동 계급’은 해체되었다. 이는 1) 산업 구조의 전환으로 인한 전통적 노동인구의 감소와 새로운 노동인구의 등장, 2) 전 세계적인 불황과 신자유주의로의 전환, 전국적 교섭 체계의 해체 및 기업별 체계로의 대체로 인한 결과였다. 포스트포드주의와 탈산업화로 석탄, 제철·제강 등의 전통적인 산업은 쇠퇴한 반면, 식품 및 요식조달업, 보건, 사회서비스 등 서비스업이 확장되었다. 새로운 산업 부문의 일자리들은 불안정 저임금 파트타임 여성 노동자들로 채워졌다. 또한 여러 국가에서 세계 불황과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 이후 복지국가와 케인즈주의는 포기되고 신자유주의가 부상하며 전국적 노사관계가 해체되었다. 특히 이러한 변화는 전후 노동운동을 배제하고 케인즈주의와 코퍼러티즘이 강고하게 구축된 국가들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심지어 좌파 정부가 위기 관리를 위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채택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1980년에는 사회주의 계급중심 정치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대처 정부 하에서 복지국가와 전국적 교섭 체계가 해체된 이후, 노동조합회의의 진보주의적 축이었던 엔지니어노동조합과 운송·일반노동조합은 기업별 교섭을 매개로 실리주의에 경도되었다. 거대 산업별노동조합이 부문이기주의로 후퇴하자 공공부문 노동조합이 진보적인 역할을 이어받았다. 스스로의 권리가 복지국가의 실현과 연계되어 있던 공공부문 노동조합은 지방정부 공격과 복지 및 사회보장 삭감에 대한 방어, 서비스 민영화 반대, 최저임금과 여성 노동자의 동일임금 및 차별반대, 행동주의를 강조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네오파시스트들의 테러가 자행되었고, 칠레에서는 민중연합에 대항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는 등 여전히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 남아 있었다. 이에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도자 엔리코 베를링구에르는 사회당뿐만 아니라 (좌파와 분리될 시 네오파시스트와 함께할 수도 있는) 기독민주당까지 규합하여 이탈리아 민주주의 연합 전선을 만들기 위한 ‘역사적 타협’을 시도했다. 나아가 그 성과를 바탕으로 이탈리아 공산당은 혁명에서 소련의 우위를 비판하고, 개별 국가가 자기 나름의 민족적 길을 걸을 권리를 주장하며 유로코뮤니즘을 선언했다. 즉 소련의 스탈린주의에서 벗어난 이탈리아 사회주의의 ‘민족적 길’의 전망을 반파시즘과 결합시킨 것이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기독민주당에 대한 반대의 입장에서 벗어나 기독민주당 정부를 지지하고 공동 프로그램을 교섭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타협은 궁지에 빠졌다. 기독민주당이 주도하고 공산당이 지지한 민족연대정부가 출범하자 좌파 테러리스트 집단인 붉은 여단이 알도 모로 전 총리를 납치하였고, 공산당이 이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 결과 테러리즘은 서서히 소멸했으나, 경찰의 권한이 확대되며 시민 자유의 수호자를 자임했던 공산당의 이름에 오명이 남았다. 이는 이탈리아 공산당이 체제의 전제(나토, 기독민주당, 가톨릭,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것으로부터 예고된 딜레마였다. 1977~78년 공산당은 정치적 권한 확대 및 사회개혁과 연결해 일자리와 투자를 위한 임금 억제와 생산성 향상(임금물가연동제)을 받아들였다. 그로써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희생으로 경제를 구하게 하고, 민주주의를 강화하여 경제 재건의 기반을 쌓고자 했다. 그러나 실업은 계속해서 증가했고, 공산당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이 쌓였다. 결국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도 유로코뮤니즘 시도가 실패하면서 유로코뮤니즘은 막을 내렸다.

유로코뮤니즘은 민주적 정상화의 전망을 제시했고, 이를 통해 유럽 공산당들이 소련과 단절하고 자신들도 통치할 역량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유로코뮤니즘은 사회주의에 이르는 구조개혁을 구상함으로써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신의 역할을 높이고자 했다. 따라서 유로코뮤니즘을 시도했던 정당들의 실패는 장기적 쇠퇴를 의미했다. 유로코뮤니즘은 서구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 이행의 전략을 실행하기 위한 최종적 시도로 부상했으며 그 실패는 혁명적 사회주의에 대한 마지막 옹호를 주변으로 밀어냈다. 반면 저자는 유로코뮤니즘의 성과도 있었다고 평가한다. 유로코뮤니즘은 우익의 위협을 제어하고 시민권 옹호, 성차별 금지 등의 개혁을 이뤄냈고, 유로코뮤니즘 이후의 유럽 공산당들은 다원주의, 다당제, 자유선거, 의회정부를 포용했고 산업노동계급의 범주보다 더 포괄적인 쟁점들을 고려하게 되었다.

마침내 1980년대 혁명들은 공산주의의 종말을 고했다. 1968년 소련의 체코 침공 이후 안전해보였던 동유럽의 신스탈린주의 정권들에 폴란드의 저항이 균열을 냈다. 1970년, 1976년 폴란드에서는 물가 인상에 반발하고 당-국가에 도전하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저항이 벌어졌다. 공산당은 높은 임금과 저렴한 식료품, 복지국가라는 유화책과 선별적인 억압으로 이에 대응했으나 1980년 8월 세 번째 반란을 막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독립성 확보를 최우선으로 하는 정치적 요구를 제기했고, 정부가 이에 합의한 후 9월 17일 독립자치노동조합(연대노동조합)이 창설되었다. 1981년 연대노동조합의 입장은 계획경제의 거부, 자율적인 자주관리 기업 선호,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 비판을 드러냈다. 12월 12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연대노동조합지도자들이 일제히 검거되었으며, 구국군사평의회가 구성되었다. 이 계엄령은 노동자들이 요구안 개혁을 받아들일 수도, 그 요구를 회피할 수도 없었던 공산당을 군대와 보안군이 대체하여 선포된 것이었다. 따라서 정치적 의미에서도, 실질적 의미에서도 공산당을 파괴하고 제거하는 전례없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소련은 해체의 수순으로 접어들었다. 1986년 27차 전당대회에서 고르바초프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심화, 경제관료제의 무기력과 부패 청산을 위한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내세웠다. 또한 두 대립적인 진영 대신 인류 공동의 가치, 상호존중, 독립국가들의 주권이라는 가치를 기반으로 한 ‘포괄적인 국제안보체제’를 제안했다. 1988~1989년 동유럽의 정치는 민주주의적으로 재편되기 시작했고, 소련의 여러 민족이 독자적인 길을 요구했다. 당-국가 역시 1989년 인민대표자대회 선거와 이후 정당들의 결성을 계기로 여러 세력에게 도전받았다. 1991년 고르바초프는 연방이 행정부로 축소된 그리고 공산주의 전통과 단절된 연방제를 각 공화국과 협상하며 실행 가능한 연방 조약을 추구했다. 그러나 공산당 고위 관료들의 쿠데타와, 발트 3국을 선두로 나머지 공화국들의 독립이 이어졌다.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소련은 사라졌다.
 
 

6. 결론 : 민주주의를 벼려 온 좌파의 유산 

 
 
책 제목 『The Left 1848-2000』에서 각각의 연도는 프랑스 2월 혁명을 비롯한 전 유럽 혁명의 연도(1848), 이탈리아 공산당 일간지 『통일』이 폐간된 연도(2000)를 뜻한다. 각 연도가 상징하는 것처럼, 저자는 책에서 유럽 좌파의 시작부터 종말까지의 궤적을 추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궤적을 ‘민주주의’라는 키워드로 조명하고 평가하고 정리하는데, 그 이유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더욱 중요한 점으로, 이 책은 그러한 전통 ― 18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온갖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사회주의 ― 을 민주주의 투쟁이라는 더 폭넓은 배경 속에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이러한 맥락을 통해서 사회주의 전통의 찬란한 업적과 참담한 한계를 더욱 잘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좌파’를 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더욱 폭넓고 엄격한 틀, 나아가 그것의 모든 사회·경제·문화·개인적 차원과 동일시함으로써 20세기 마지막 30년의 사회주의의 위기로 인해 야기된 무력감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 사회정의의 문제가 정치의제에서 영원히 추방당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가 마침내 윤리적·평등주의적 비판에 면역력을 갖게 되지 않는 한, ― 위험천만하게도 현재 이 두 조건은 가까이에 다가와 있다 ― 사회주의의 주장은 여전히 급진적 민주주의의 희망을 위해 절대로 필요할 것이다.”
 
오늘날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사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제약과 자유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민주주의를 완성하려는 시도였다. 파시즘의 발흥으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사회주의가 그 후퇴를 저지하는 최전선에서 활약했다는 사실은 이를 방증한다. 저자는 그 과정에서 사회주의가 민주주의의 중요한 쟁점들(성차별과 젠더, 인종과 민족)을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체제를 넘어서려 했지만, 체제를 수용해야 했던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도 밝힌다.

저자는 사회주의가 오늘날 종언을 고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시도에서 과제를 도출하고 변혁을 위한 시도가 지속된다면 그렇게만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럽 좌파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이 숙고해야 할 질문은 분명 사회주의가 넘지 못한, 하지만 넘어야 할 과제들이다.

유럽 사회주의 정당이 마주했던 딜레마는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적 소유권의 의의와 한계를 모두 체현하는 소유 구조와 정치 체제를 넘어서는 대안 세계가 무엇이며, 그 이행 경로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맞닿아있다. 사회주의자들은 현대적 대중정당 체제를 구현했고, 의회와 정당을 제한적으로나마 활용해 체제 내에서 개혁적인 정책을 도입하였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운동과의 연계를 일정 이뤄냈다. 또한 파시즘에 맞서 다른 정치 세력 혹은 지배 계급과 연합하여 민주주의의 퇴행을 막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경기 침체기 지배계급의 탄압과 공세에 얻어냈던 개혁이 감축되거나, 페미니즘과 민족 문제에 대한 정치적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그 결과로 사회주의는 좌파 내 분열을 통합하지 못한 채, 장기적인 퇴행의 길을 걸었다.

돌이켜보건대(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사회주의의 궁극적 과제는 노동자와 여성의 온전한 소유권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치와 제도의 건설이다. 구체적으로는 소유권을 제약하는 임금-노동 관계와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의 철폐, 재생산의 사회화와 여성의 성차에 입각한 여남 관계의 변형 등 경제와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 이는 사회주의 정당으로 집결하고, 실제로 집권하더라도 달성했다고 확언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오히려 당장은 대중적 지지와 정치적 권력의 확대를 달성한 것처럼 보여도, 노동자·사회운동의 이념적 쇄신없이는 분열과 퇴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유럽 좌파의 역사에서 배울 수 있다. 결국 사회주의적 변혁은 이념에 토대를 둔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역량 형성이라는 장구한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가 ‘민주주의’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유럽 좌파의 역사를 정리한 점은 반추할 만하다. 유럽 사회주의는 대중의 의사 결정을 조직하고 노동자 민중의 민주주의를 활성화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성장했고 세력화되었다. 반면 민족과 젠더 쟁점에 대한 맹목을 극복하지 못하고 개혁주의와 스탈린주의 사이에서 분열된 사회주의는 위기를 맞이했다. 정당에 안착한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을 위해 기존의 체제에 완전히 순응할 것인지, 혹은 영향력을 상실하더라도 자유주의 정치에 끝까지 반대할 것인지의 양극단 선택지 사이에서 갈라졌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정치적 권력과 영향력은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민주주의의 강화에 기여하기 위해 사회주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을 얼마나 잘 찾아내고 수행해내는지에 따른 결과다. 유럽 좌파의 시도는 그 답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진전시켰지만, 한편으로는 민주주의를 완성하지 못한 ‘미완의 기획’으로 남았다.

한편 저자는 정치에서 공동선의 소멸, 자본주의에 대한 적합한 비판의 종말을 경고한다. 공동의 이익에 대한 합의가 소멸하고, 자유와 평등을 제약하는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 대신 특정 집단에 대한 원한의 정치가 보편화되고 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전면화된 시기에는 자본주의에 맞선 대안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하던 시기에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보루로서 그 역할을 수행했다. 즉 공동선, 보편적인 이익을 제기하고 쟁취하는 비판적 대안 세력으로서 영향력을 분명 발휘했었다. 공산주의 전망의 재건 역시 사회주의가 오늘날의 정치적 퇴행에 제동을 거는 비판적 대안으로 거듭나고, 더 나은 민주주의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역량을 창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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