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2023 봄. 1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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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경제(經濟)를 자신의 임무로 삼다

『김육 평전』

이진호 | 회원, 전국교육공무직본부 인천지부 조직국장

 

1. 개혁을 성취한 경세가, 김육 

 
1592년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거의 패망할 위기에 놓였다. 1601년 영의정 이항복은 본래 230만 석이던 비축곡이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에 50여 만 석으로 줄었고, 조선 초기 세입이 40여만 석이었는데 지금은 20만 석에 불과하며, 인구 또한 평시에 비해 10분의 1로 줄어든 데다가, 전국의 전결(田結, 논밭에 물리는 세금, 또는 그 논밭)도 겨우 30여만 결로 평시의 전라도 하나의 전결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선조에게 아뢴다. 전쟁으로 얼마나 국토가 황폐화되고 인민이 고통받았는지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몇 년 전 사망한 율곡 이이는 조선이 중쇠기(中衰期)에 이르렀다며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평생 주장하였으나, 결국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조선의 위기는 임진왜란이라는 외침뿐만 아니라 사회에 누적된 내적 모순이 폭발한 결과였던 것이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는 뛰어난 인재들이 나타나 풍성하게 활약하며 사회를 재건한다. 유성룡, 이원익, 김육 등의 인물들은 뛰어난 재상인 동시에 경세제민(經世濟民), 즉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고 인민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친 경세가들이었다.

그중 대동법(大同法)은 현물세이자 인두세적 성격을 지녔던 공납(貢納, 지방의 토산물을 현물로 내는 세금제도. 중앙정부가 각 지방의 토산물을 기준으로 공물의 품목과 수량을 정하고 그 장부인 공안(貢案)을 마련하여 지방에서 이를 징수해 상납하도록 했다)을 합리적으로 토지세로 편입한 것으로, 민생 안정, 재정 확충, 시장 발달을 통해 조선이 다시 부흥할 수 있게 기여한 최대의 개혁이다. 그 개혁을 이뤄낸 주역이 바로 잠곡 김육(潛谷 金堉, 1580~1658, 잠곡은 호)이다. 그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충청도 대동법을 성취하고 “삼대의 정전법(井田法, 고대 중국에서 실시되었다고 전해지는 이상적인 토지제도)을 지금 다시 시행할 수는 없으나, 그다음으로 대동법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자부하였다. 

이 글에서는 김육의 생애와 개혁, 그를 둘러싼 시대를 다룬 이헌창의 『김육 평전』을 소개한다. 그는 전통적 성리학자이면서도, 경륜과 식견을 갖추어 개혁을 성취한 경세가였다. 『효종실록』에 실린 김육의 졸기에서 그가 평생 경제(經濟), 즉 경세제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는 젊은 시절 출세의 뜻을 버리고 농촌에 은거하다가, 무려 70세에 재상의 지위에 올라 대동법 실시에 성공한 파란만장한 인생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대동법은 기존 세금을 많게는 1/10로 줄였다는 점에서 뛰어난 개혁이었다. 뛰어난 구상이 있어도 현실에서 이뤄내지 못하면 그 의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율곡은 경세학을 체계화했지만 끝내 살아서 개혁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김육은 그 뜻을 계승하여 생전에 대동법이라는 개혁을 이뤄낼 수 있었다. 개혁의 뜻을 일평생 간직하며 현실의 구체적 실천을 모색했기에 가능했던 일일 테다. 변혁을 지향하면서도 현실 제도에 대한 분석과 이행을 예비하기 위한 운동을 꾸준히 만들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현시대의 활동가들도 그의 삶에서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2. 역경 가운데 정진하며 경세제민의 뜻을 키우다

 
김육은 1580년 기묘명현(己卯名賢, 중종 때 조광조를 비롯해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사림)의 후손으로, 당쟁으로 인한 피해로 한미해진 가문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으로 그의 일가는 큰 시련을 겪었다. 각지를 떠돌며 피난하러 다니는 와중에 아버지 김흥우가 1594년 황해도 해주에서 객사하고 만다. 전란 중에 아버지의 장례도 제대로 못 치른 그는 연이어 할머니와 어머니의 죽음을 맞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장남으로서 남동생과 두 누이를 보살피면서 26세 때 사마시(司馬試, 합격하면 생원·진사가 되어 성균관 입학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시험)에 합격한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며 북인이 집권한다. 이는 서인 가문 출신 김육의 정치적 장래에 다소 부정적인 조건이긴 했으나, 이때까지만 해도 김육 자신은 현실 정치에 그리 비관적이진 않았다. 그러나 1613년 문경 새재에서 발생한 은상(銀商) 살해 사건으로 큰 변화가 찾아온다. 밝혀진 주범은 놀랍게도 양반의 서인(庶人) 7명으로, 이들은 서얼이 차별받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무기와 양식을 확보하려고 범행을 벌였다고 자백했다. 당시 집권당인 북인의 대신 이이첨은 이들이 이 사건으로 확보한 자금으로 반란을 일으켜 왕과 세자를 죽이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고 자복하도록 한다. 이로 인해 대대적인 옥사(獄事)가 벌어지는데, 이것이 계축옥사(癸丑獄事)다. 관련자가 대거 죽임을 당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쫓겨나 1614년 결국 살해당하였고, 인목대비는 1615년부터 서궁(지금의 덕수궁)에 유폐된다. 

계축옥사는 김육의 정치적 장래에 악영향을 끼쳤다. 그를 후원했던 친척 김권은 정치할 의욕을 상실하고 두문불출하다가, 폐모론에 반대하는 글을 올리고 유배된 뒤 사망한다. 김육 역시 이러한 현실에서 출세를 추구할 마음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계축옥사가 일어나던 34세 때 경기도 가평 잠곡 청덕동에 거처를 정해 가족을 이끌고 들어온다.

이때부터 김육은 잠곡에서 10년 간 농민 생활을 한다. 정치적 포부를 접고 농촌에 은거하려는 뜻으로 호도 잠곡으로 삼았다. 전란 속에서 가족을 잃고 아우와 누이들을 보살피면서도 공부해 벼슬에 합격하였던 그가, 한창 뜻을 펼칠 나이인 30대에 잠곡에 은거하기로 결정한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럼에도 한 줌 미련이 남았는지, 그가 택한 잠곡은 아침에 출발하여 부지런히 걸으면 저녁 늦게 서울에 도착할 수 있는, 서울에서 100리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김육은 초가삼간을 지어 이를 ‘회정당(晦靜堂)’이라 명하고, 손수 농사짓고 땔감을 마련하여 생활을 꾸려나갔다. 가끔 그와 친분 있는 명사들이 찾아오면 술을 대접했는데, 훗날 인조반정에 참여한 장유와 최명길이 찾아오기도 했다. 1643년 청나라 심양에 머물 때 그가 남긴 시는 이때의 농민 생활을 잘 묘사하고 있다. 

지난 옛날 산속에서 살았을 적엔 형문(衡門)으로 오두막집 닫아걸었지.
(…) 약초 캐러 구름 뚫고 산에 올라갔고 낚시한 뒤 달빛 안고 돌아왔지.
나무하는 노인이나 농사꾼 세월이 오래됨에 사귐 깊었고,
가을 서리가 내리면 추수를 서둘고 봄비 내릴 적엔 밭을 갈았지.
손님 오면 웃옷을 벗은 채 웃고 산골 술상 따로 차릴 것 뭐 있나.
수건으로 동이 속의 술을 거르고 물고기에 나물무침이면 됐지.
맑은 담소 나누면서 소원함 펴고 큰소리로 노랫가락 흥을 돋웠지. 

김육의 농민 생활은 훗날 경제 정책을 중시하고 그 구체적 방안을 수립하는 데에 유용한 자산이 되었다. 그는 이때의 농민 생활과 이후의 지방관 경험을 통해 인민들의 삶을 가까이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대동법 추진 과정에서 반대 여론에 부딪혀도 뚝심 있게 ‘안민(安民)’을 위한 개혁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3. 인조반정으로 다시 관직에 나아가 경력을 쌓다

 
김육이 44세가 되던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세상이 바뀐다. 인조는 광해군 때 폐모론에 반대하여 조정을 떠난 인사를 불렀다. 이때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내 다른 당파의 조정 참여를 두고 견해가 갈렸으나, 김류의 조정론이 채택되어 당색과 관계없이 인재를 널리 받아들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다시 본격적인 벼슬길에 나서 다양한 관직을 거치면서 경력을 쌓는다. 
 

1) 지방관, 중앙관료,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경력을 쌓다

김육의 가장 대표적인 지방관 경력은 1638년의 충청감사(관찰사)이다. 그는 인민 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서 흉년구제책을 강구하기도 하고, 기근대처법이 담긴 『구황촬요(救荒撮要)』와 전염병 치료법이 담긴 『벽온방(僻瘟方)』 두 책을 엮어 『구황촬요급벽온방』을 간행했다. 나아가 이를 조정에 올려 다른 도에 반포할 것을 청했고, 이 역시 수용되었다. 또한 중국의 기술을 도입해 수차(물레방아)를 만들어 전국에 보급하도록 건의하기도 했다. 1647년 개성부 유수 재직 시절에는 동전의 통용을 요청하기도 했다. 

중앙 관료 시절에는 국방과 군역, 경제와 산업 등 여러 방면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당시 조선은 병농일치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군역에 징발되는 대신 포(布)를 내는 관행이 확산되고 사족(士族)은 군역에서 면제되는 특권이 형성되었다. 그 결과 군사가 부족해지고 조세부담이 일부 인민에게 가중되는 폐단이 생겼다. 김육은 병농분리 정책을 시행하고, 사족의 군역 면제 특권을 폐지하여 일부에게 군포를 징수하는 개혁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동전 통용과 민간 은광 개발 정책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동전 통용을 주장했던 시점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 은이 조선에 대량으로 유입되어 은화가 통용되면서, 동전 통용책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 시점이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개혁은 병자호란의 발발로 중단되거나 채택되지 못했다. 

김육은 인조 때 세 번 사신으로 중국을 왕래하며 외교 분야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명·청 교체기의 혼란기에 새롭게 부상한 청나라의 압박 속에서 조선의 여러 현안에 대처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그는 외교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중국과 서양의 우수한 문물을 관찰하고 도입하려 시도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수레와 동전이다. 1636년에는 해시계인 지평일구(地平日晷) 제작법을 얻어 훗날 시헌력(時憲曆, 서양 역법을 수용하여 만든 역법으로, 오늘날 음력이 바로 이것이다) 도입에 이바지하기도 하였고, 지구가 둥글다는 지구설을 수용하기도 했다. 
 

2) 충청 감사로 재직하면서 충청도 대동법을 건의하다

조선시대 공납 개혁 논의는 장기간에 걸쳐 벌어졌다. 보통 논이 1결당 벼 20~30석을 수확하는 가운데 전세는 4~6두로 세율이 2~2.5%였다. 반면, 공물은 각종 폐단이 많고 부담이 무거워서 인민의 고통이 컸다. 그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토산물이 부과되거나, 공물을 운반·수송하는 비용도 부담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무엇보다 중간에서 공물 납부를 대행하는 관행으로 시가(市價)보다 높은 가격을 받아 많게는 백배를 착복하는 방납(防納)의 폐단이 컸다.

공납개혁론으로 제기된 대동법의 핵심은 가호(家戶)를 단위로 부과하던 현물 조세를 전결을 단위로 부과하는 토지세로 전환하여 합리화하고, 그렇게 걷은 대동미(또는 지역에 따라 포나 동전)로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구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세율을 10% 미만으로 하여도 중간 착취를 막으며 필요한 물품을 조달할 수 있었다. 또한 토지를 기준으로 조세를 부과하기에 생산력을 반영하며 납세자의 부담을 고려할 수 있었다. 이미 1569년 율곡은 해주의 사대동(私大同, 지방관이 자체적으로 대동법을 실시한 것)을 모범으로, 1결당 쌀 1두를 거두어 공물을 조달하자는 수미법(收米法)을 제안한 바 있다. 그런데 이후 율곡은 수미법 시행보다는, 공물의 품목과 수량을 현실에 맞게 바꾸는 공안 개정을 줄곧 주장하였다. 공안개정론은 이후 대동법 시행에 반대하는 논거로 활용된다. 

1594년 영의정 유성룡은 1결당 쌀 2두를 거두어 국가 물자를 시전(市廛, 도시에 있던 상설 점포, 또는 종로에 설치된 상설 시장)에서 구매하는 수미법을 주장하여 시행에 성공한다. 1608년에는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로 선혜청(宣惠廳)이 설립되고 경기도에서 선혜법이 실시된다. 이에 따라 경기도에서 1결당 16두를 거두어 14두를 공물 조달 비용으로, 2두를 수령의 공·사 비용으로 삼고 사신 왕래접대비를 추가로 지급하였다. 그러나 이는 곧 심한 반대에 부딪힌다. 반대자는 주로 방납 세력, 각 읍의 향리와 수령, 양반 세력가 등 선혜법 시행으로 손해를 보는 이들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에도 대동법 확대 논의가 이루어진다. 이조정랑 조익은 맹자가 말한 천하의 공정한 십일조 세는 농민이 바친 곡식으로 제후가 토산 공물을 천자에게 바치는 것인데, 농민에게 직접 토산공물을 받는 조선의 제도는 유학 경전에 맞지 않다며, 조선의 임토작공(任土作貢, 각 지역에서 바치는 공물은 그 지역의 토산물이어야 한다는 공물 부과 원칙) 이념을 최초로 비판한다. 이 상소에 힘입어 삼도 대동청이 설립되어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에 대동법이 시행된다. 그러나 최명길, 김장생 등이 양전과 공안 개정이 선행될 것을 주장하며 대동법에 반대하자, 인조는 강원도를 제외한 충청도, 전라도 대동법을 폐지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1626년 충청 감사였던 권반은 개혁안을 짜놓고도 실시하지 못하였다. 이후 충청 감사에 부임한 김육은 바로 이 권반의 안을 보고 1638년 충청도 대동법을 청하기에 이른다.

대동법은 실로 인민의 구제에 절실합니다. 경기도, 강원도에 이미 시행하였으니 충청도에 어찌 행하기 어려울 리가 있겠습니까. 신이 도내 결부의 수를 모두 계산해 보건대, 1결마다 각각 면포 1필과 쌀 2두씩 내면 진상물과 공물의 값과 본도의 잡역인 전선(戰船), 쇄마(刷馬, 공무에 필요한 관용 말, 혹은 그에 따른 비용) 및 관청에 바치는 물건이 모두 그 속에 포함되어도 오히려 남는 것이 수만입니다. 지난날 권반이 감사일 때 도내 수령들과 더불어 이 법을 시행하려다가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만약 시행하면 한 사람도 괴롭히지 않고 번거롭게 호령도 하지 않으며 면포 1필과 쌀 2두 이외에 다시 징수하는 명목도 없을 것이니, 지금 굶주림을 구제하는 데에 이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역시 공안 개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반대론이 일어나 인조는 그 의견을 따랐다. 충청도 대동법 시행까지는 더 시간이 필요했다.
 
 

4. 효종의 신뢰를 받으며 정승에 올라 개혁을 성취하다

 
김육은 인조 말미에 한직에 머무른다. 소현세자와 그 부인 강빈(姜嬪)을 미워한 인조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646년 67세에 관직을 박탈당한 그는 은거지를 마련하며 마지막 여생을 준비한다. 그러나 세상일은 알 수 없는지, 1649년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한 뒤, 김육은 요직인 예조판서로 임명되며 정승 길에 들어선다. 김육은 정승이 되어 그동안 주장한 여러 개혁안을 실행한다. 양란의 피해와 청나라의 과도한 물자 요구로 재정이 궁핍하고 외교가 어려웠던 시기, 효종은 김육을 자신의 시대를 뒷받침해줄 대신(大臣)으로 여겨 적극적 신뢰를 보여준다.
 

1) 산당의 조정 진출과 김집·김육의 논쟁 

1649년 효종은 대신들의 청에 따라 원로 김상헌과 김집, 송준길, 송시열, 권시, 이유태 등을 불러들인다. 이들은 산림(山林)으로, 벼슬길에 나오지 않고 재야에서 학술·교육 활동을 하던 인물들이다. 김집은 율곡의 제자였던 김장생의 아들이자 제자였다. 송준길, 송시열, 이유태, 윤선거 등도 모두 김장생의 제자였다. 효종은 파격적 인사를 단행하며 이들을 우대하였고, 후에 송시열과 송준길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은 산당(山黨)이라 불릴 만큼 세력화한다. 

산당의 목표는 예치(禮治)국가 건설이었다. 이들은 구체적인 개혁보다는 공리(功利)를 배격하고 마음을 바로잡아 성의(誠意)를 다하면 국가가 저절로 잘 다스려진다는, 전통적인 유학에 충실한 주장을 펼쳤다. 또한 조정에서 악한 소인배를 몰아내고 선한 군자들을 장려하는, 이른바 ‘격탁양청(激濁揚淸)’ 활동에 주력한다. 그러나 산당의 이러한 활동은 지나치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어 자칫 독선에 빠지고 당파 싸움을 부추길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육과 김집 간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김집은 인조 국상(國喪)에 대해 주자(朱子, 주자학을 집대성한 중국 송대 유학자 주희에 대한 존칭)의 예설을 중심으로 국상례의 개혁을 주장했다. 당시 예조판서였던 김육은 300년이 넘게 유지된 『국조오례의』는 신중하게 개혁해야 한다며 국가제도를 옹호하였다. 이는 산림 김집과 관료 김육 간에 직접적인 쟁점이 드러난 계기였다.
 

2) 정승에 올라 충청도 대동법 시행을 관철하다 

산당이 조정에 진출한 시기에 김육은 1649년 70세의 고령으로 우의정에 부임하였다. 당시 조정의 면면을 보면, 좌의정 조익은 인조 때부터 대동법의 지론을 견지한 인물이었으며, 형조판서 이시방은 공물제도 개혁에 식견도 있고 관련 정책을 담당한 경험도 있었다. 영의정 이경석은 신중하나 경세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바야흐로 대동법을 시행할 적기가 온 것이다. 김육은 충청도, 전라도 대동법 시행을 요청하며 구체적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국가에 일이 많다 보니 민역(民役, 인민에게 국가가 노동력을 수취하는 것)이 날로 무거워져, 1년에 마땅히 행하는 역으로 1결당 소용되는 비용이 거의 무명 10여 필이나 되고 적어도 7~8필을 밑돌지 않는데 뜻밖에 마구 나오는 역은 여기에 들어 있지 않으니, 백성이 어찌 곤궁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만약 대동법을 시행하면 1결마다 봄에 무명 1필, 쌀 2두를 내고, 가을에 쌀 3두를 내면 모두 10두가 되는데, 전세 이외의 진상물과 본도의 잡역, 본읍에 납부해야 할 것이 모두 그 가운데 있어 한번 납부한 후에는 1년 내내 편안히 지내도 됩니다. (…) 충청도, 전라도의 전결이 모두 27만 결로 무명 5400동과 쌀 8만 5000석을 거둘 수 있으니, 유능한 사람에 맡겨 계획하여 조치하면 쌀과 직물의 남는 수가 반드시 많아서 국가 재정과 민간 저축이 모두 충족하여 뜻밖의 역에도 응할 수가 있습니다. 

김육은 대동법 시행을 위한 협조를 구하기 위해 산당의 영수인 김집을 찾아가기도 하나, 결국 김집의 반대로 법 시행은 무산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김집은 표면적으로는 부친 김장생의 주장을 견지하여 공안개정을 통해 지출 규모를 줄이는 것이 우선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쟁점은 개혁 과제에 대한 인식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김육이 대동법 시행을 통해 안민부국을 이루고자 했다면, 산당은 예치국가 확립을 우선시한 것이다. 김육과 김집의 대립은 인사제도를 놓고 이어져 결국 둘 다 사직소를 올리고 물러나는 지경에 이른다. 

산당이냐 김육이냐를 택할 기로에 놓인 효종은 놀랍게도 김육을 선택했다. 김육은 1651년 영의정에 올라 『인조실록』 편찬 총재관에 임명되고, 차남 김우명의 장녀가 왕세자빈으로 선정되는 등 효종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는다. 영의정이 된 김육은 비변사 논의를 주도하며 비로소 충청도 대동법 시행을 관철한다. 1651년 8월 24일 『효종실록』에는 충청도 대동법을 영의정 김육이 힘껏 주장하여 비로소 정하였다며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도를 통틀어 1결마다 쌀 10두를 거두되, 봄가을로 나누어 각각 5두를 징수한다. 그리고 산골 고을은 쌀 5두 대신에 무명 1필을 거둔다. 대읍, 중읍, 소읍으로 나누어 관청의 수요를 제하여 주고, 또 남은 쌀을 각 고을에 헤아려 주어서 도 전체의 역에 응하게 하고, 그 나머지는 선혜청에 납부하여 각사의 역에 응하게 한다.” 

우여곡절 끝에 실시된 충청도 대동법 시행의 최대 쟁점은 양반 지주들의 반발이었다. 그러나 지역에서 올라온 상소를 통해 대동법 시행에 찬성하는 지역 인민들의 여론이 전달되면서, 조정 내 논의지형에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대동법 실시는 지역 여론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편 대동법에 반대하는 여러 논거가 약화된 과정도 있었다. 선결 과제로 제시되었던 양전과 공안 개정은 1634년 삼남 지방에 대한 양전과 공안 개정으로 해결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개간 진전, 국제 무역 번영으로 시장이 성장해 공물의 조달 여건도 개선되었다. 시장의 성장과 방납의 성행은 현물 공납의 근거였던 임토작공 이념을 약화했다.  

충청도 대동법의 시행은 김육만의 공은 아니었다. 김육은 1654년 편찬한 『호서대동사목(湖西大同事目)』의 서문에서 “율곡 선생의 만언소에서는 공안을 고치고 폐법을 개혁하는 것에 대해 앞뒤에서 여러 차례 말하였다. 지금 경전을 빌려 시비를 논하는 자들은 과연 고금을 뛰어넘는 식견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언급하며 율곡의 뜻을 계승했음을 분명히 한다. 또한 협력한 관료들을 일일이 열거하고, 무엇보다 효종의 지원으로 충청도 대동법 시행이 가능했다는 점을 밝힌다.

충청도 대동법의 성공은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호서대동사목』에 따르면, 충청도 대동법 시행으로 1652년 실결 12만 4764결로부터 쌀 8만 3164석을 거두어 서울로 4만 8280석을 상납했는데, 선혜청 지출 예산이 4만 6266석으로 여유가 있고 충청도 유치미가 3만 922석인데 지출 예산이 2만 2918석이어서 여미가 8000여 석 있었다고 전한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충청도 대동법 시행 이전인 1647년에는 전국 공물 값이 9만여 석이고,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는 5만여 석에 지나지 않았다. 즉 대동법 시행으로 1652년 충청도에서만 1647년 4개 도의 공물 수준을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3) 동전 통용책과 군역 개혁안을 주장하다 

김육이 대동법만큼 노력을 기울인 사업이 행전(行錢), 즉 동전 통용이었다. 1651년 물품 화폐를 근절하기 위한 조치가 추진되자, 김육은 동전 통용책에 적극 나선다. 이때 서울에도 동전이 통용되어 상평통보(常平通寶)라 불린다. 김육은 동전을 국가 지불 수단으로 사용해야 널리 통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충청도 대동법 시행 이후에는 대동미 일부를 동전으로 대신 납부하는 전략을 추진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교적 쉽게 결정된 행전은 반발에 부딪히다가 결국 1656년 중단된다.

한편, 대동법으로 공물이 개혁되자 군역이 인민에게 가장 큰 부담으로 남았다. 김육은 병농분리로 정예병을 양성할 것과, 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군포 제도 개혁과 둔전 설치를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1654년 좌의정이었던 김육은 재정을 고려하여 수도 방위군을 5000명으로 제한하고, 직역이 없거나 생원·진사가 아닌 21~50세 모든 남자에게 군포 1필씩 거두어 재원을 마련하자는 개혁안을 내놓기도 한다. 그의 개혁안은 사족 전체에게 군포를 부과하자는 호포론(戶布論)의 선구였고, 군역 부담을 1필로 줄여 균등화한다는 의의가 있었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4) 전라도 대동법을 추진하다 생을 마감하다 

생이 얼마 남지 않았던 김육은 전라도 대동법 시행에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았다. 1656년 전라도 유생이 상경하여, 토호들의 반대로 도민의 뜻이 전해지지 않으니 원하는 고을부터 대동법을 시행하자며 대동법 시행을 전라도로 확대할 것을 요청한다. 이때는 충청도 대동법이 성공적으로 정착하여 조정의 평가가 긍정적으로 변한 때였다.   

어떤 사람은 백성의 마음에 모두가 했으면 하는데 수령이 원하지 않기 때문에 시행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라도민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수령은 불과 50여 명밖에 안되는데, 50여 명이 반대한다고 수많은 백성이 크게 바라고 있는 바를 시행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현재 본도에서 1결에 대한 조세로 거두는 쌀이 거의 60여 두에 이른다합니다. 10두를 거두어들인다면 백성에게서 다섯 배나 적게 거두지만 그래도 국가의 쓰임에는 부족한 바가 없는데, 무엇을 꺼려 이를 시행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 10두를 제외하고는 모두 백성 자신이 먹는 식량입니다. 구휼하는 방안이 이보다 좋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창고의 곡식을 풀지 않고도 나라에 굶어 죽거나 야윈 백성이 없을 것입니다.

효종은 전라도 대동법 시행에 적극적이었다. 쟁점은 대동미 운송의 불편함과 연해 고을과 산간 고을 간 견해차였다. 김육은 다수가 시행을 원한다며 전라도 실시를 주장하였으나, 결국 조정은 일단 전라도 연해 고을에서만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결정한다. 김육은 1658년 9월 4일 저녁 “전라감사의 상소에 대한 회계(回啓, 임금의 물음에 대해 신하들이 심의하여 대답함)가 어떻게 되었는가?”라고 묻고 숨을 거두었다. 과거 김육은 상소를 올리며 “재주와 힘을 다하면서 직무에 온 힘을 쏟다가 쓰러져 죽기를 기약하는 것이 신의 평소 뜻이었습니다”라고 했는데, 뜻을 이룬 셈이다.
 
 

5. 김육의 경세론 

 
김육은 백과사전인 『유원총보』를 편찬하고, 『광해군일기』, 『선조수정실록』, 『인조실록』 편찬에 모두 참여했으며, 『황명기략』, 『해동명신록』 등 여러 저서를 남겼다. 그러나 자신의 경세론을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저술한 글을 남기지는 않았다. 따라서 김육의 경세론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개혁 추진 과정을 종합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저자 이헌창 교수는 김육을 안민(安民)과 부국(富國)을 동시에 추구한 경세가로 규정하는데, 주로 그 입장을 중심으로 김육의 경세론의 특징을 살펴보자. 
 

1) 성리학에 갇히지 않는 개방적 학문 태도

조선 전기에는 선비가 경학(經學, 사서삼경과 같은 유교 경전을 연구하는 것), 즉 윤리와 철학의 공부에 힘쓰되, 기술학도 중시해야 한다는 주장도 상당히 존재하여 경세 재상의 양성에 유리했다. 선조대 이후 사림 정치의 성립은 양면적 효과를 가져왔다. 사림이 대두하며 명신이 성장하기는 좋았으나, 점차 공리를 배척하고 기술학을 경시하는 풍조가 확산되기 시작한다. 김육과 대립했던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산림들이 주로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김육은 투철한 유학자였으나, 현학적 관념론이나 예학의 세밀한 규정을 논한 글을 남기지 않았다. 도덕적 수양과 실천에는 성리학의 기본 정신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 듯하다. 대신 그는 개방적인 자세로 현실 정책에 유용한 사상을 폭넓게 흡수하여 개혁에 힘썼다. 율곡은 성리학을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요약했는데, 김육도 율곡처럼 도덕적 수양에만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경세관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당대에 김육에 대한 공통적 평가는 박학(博學)하다는 것이다. 그는 역학(曆學)을 열심히 공부하여 시헌력 도입에 이바지하였으며, 백과사전 『유원총보』를 집필했다. 유학에서도 성리학에 갇히지 않고 한(漢)대 학문, 송대 왕안석의 개혁론, 명대 양명학 모두에 개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치인을 중시하여, 중국 한대 초기 명재상으로 전해지는 가의(賈誼)를 모범으로 삼고 한대 역사를 종종 언급하기도 하였다. 

또한 자신의 정책 이념을 『논어』를 중심으로 하는 전국시대 이전 유학 기초 경전에서 구하였다. 그는 주자학이 배타적 교조주의로 흐르는 가운데, 유학 본래의 정신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김육이 김집과의 정책 대결로 사림의 비판을 받자 우의정 사직을 청하며 올린 다음의 글은 이러한 그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신은 몹시 고루하여 기모(奇謀)와 비책을 알지는 못합니다. 오직 『서경』의 “서민을 보살펴 보호하라”, 『시경』의 “애처로운 이 외로운 자들이여”, 『논어』의 “절약하고 인민을 사랑하라”, 『맹자』의 “화합만한 것은 없다”, 『중용』의 “인민을 자식처럼 사랑하라” 및 『대학』의 “대중을 얻으면 국가를 얻는다”라는 구절이 만세에 마땅히 행할 도라고 여겨, 조세를 고르게 부과하고 인민을 편안히 하여 국가의 근본을 굳건히 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2) 도덕과 공리의 조화로운 추구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공공 이익인 공리의 추구는 권장되었으나, 사리의 추구는 공직자 윤리로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데 주자학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공리를 포함하는 이익 추구 전반에 대한 부정적 관념이 강해졌다. 이에 따라 양란 이후 제기된 부국강병론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송시열과 산당은 수기(修己)에 절대적 의의를 부여하며, 엄격한 도덕률을 인사정책에 적용하는 등 예치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반면 김육은 도덕과 공리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그는 지나치게 명분에만 치중하는 이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올린 상소와 개혁안들은 현안에 대한 분석과 해결책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그는 도덕적으로 다소 하자가 있더라도 경세 능력을 갖춘 인물을 등용하고자 했다. 심지어 시헌력을 배울 때는 중국 관헌에 뇌물을 쓴 적도 있다. 특히 수기에 힘쓰면 경세제민은 저절로 잘 될 것이라고 본 산당과 달리, 경세론에 독자적 의의를 부여하고 공리를 중시한 것이 김육의 가장 큰 특징이다. 

제도 개혁에 대한 신중한 원칙론(‘이익이 10배로 예상되지 않으면(利不十倍) 경계한다’)이 있었던 조선시대에, 김육은 경세론의 관점에서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제도 개혁의 명분은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긴다(法久弊生)’라는 논리였다. 김육은 율곡을 이은 적극적 개혁론자로, 대동법과 같은 개혁을 성취할 수 있었다. 
 

3) 안민부국론을 추구한 경세가 

저자 이헌창 교수는 김육을 ‘안민부국론’으로 규정한다. 이는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 유학은 전통적으로 안민이 자연스럽게 부국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았기에, 안민을 우선하는 경향이 있었다. 민생이 안정되면 인구가 자연적으로 증가하고, 인민이 부유해지면 10%의 이상적인 세율로도 재정 수입이 증가하고, 지출을 절약하면 비축이 넉넉해져 군사력 강화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봉건제 사회는 기술진보가 느린 탓으로 경제 성장률도 매우 낮았기에, 민생구제를 우선하다보면 국가재정을 소모하여 부국을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안민과 별도로 부국에 대한 정책이 필요했다. 

저자에 따르면, 율곡은 왕도적 안민론자였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안민과 부국을 동시에 달성하려는 안민부국론과 안민을 최우선시하는 안민지상주의론으로 분화하였다. 전자는 공자, 맹자, 순자의 평균적 관점으로 김육이 계승하였으며, 후자는 주자학의 관점으로 산당이 계승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육은 일관되게 안민부국론을 견지하였다. 특히 대동법은 안민부국책의 맥락을 지닌다. 율곡이 조세의 균등화와 경감, 중간 수탈 배제를 통해 소민 보호 대책으로 수미법을 제안한 이래, 유성룡이 수미법을 군량 확보책으로 설정하며 대동법이 안민부국책이라는 관점의 원류를 제공하였다. 이원익 또한 삼도 대동법을 추진하며 군량미 등 식량 확보를 목적으로 하였다. 그리고 김육은 인민도 구제하고 국가재정도 확충하여 부국을 도모할 수 있는 대동법을 정착시킨 것이다. 

반면 안민 지상주의론자들은 대체로 이러한 정책에 반대하였다. 이들은 대동법과 동전 통용책의 취지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었으나, 시행이 어렵고 반발이 큰 제도 개혁을 강행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이들은 민생 안정을 절대적 가치로 설정하여, 부국론으로 나아갈 길을 사실상 봉쇄하였다. 대표적으로 송시열이 1649년 올린 「기축봉사」는 왕실 재정과 군영의 축소로 세출을 절감하여 조세부담을 줄이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후 송시열을 대표로 하는 산당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이러한 관점은 주자학자의 모범적 견해로 통용되었다. 

종합해보면, 김육은 율곡의 경세관을 계승하여 균형 잡힌 수기치인의 관점에서 개혁을 추구하였다. 주자학을 절대시하는 산림이 등장하는 상황에서도 경세학의 독자적 영역을 인정하고, 안민과 동시에 부국을 이룰 수 있는 정책인 대동법을 정착시켰다. 그러나 이후 송시열 노선이 주류화되면서 그의 경세론은 거의 계승되지 못한다. 
 
 

6. 결론 

 
전라도 대동법은 현종대인 1662년, 예조판서이자 김육의 장남인 김좌명의 건의에 따라 산군 지방까지 확대 시행된다. 숙종대인 1678년에는 전국에 대동법이나 그에 준하는 법이 시행되기에 이르며, 동전도 전국에 통용된다. 군역개혁도 영조대인 1750년 균역법(均役法)을 시작으로 어느 정도 실현된다. 김육이 주장했던 개혁들이 후대에 이르러 상당 부분 실현된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 이헌창 교수는 조선시대 당쟁에는 폐단이 분명히 존재했으나 중요한 개혁에 대해서는 초당적인 정책 논의가 이루어졌다고 본다. 일례로, 대동법은 서인 율곡이 처음 제안한 이래 남인 유성룡이 처음 제도화하여 남인 이원익이 경기도, 강원도에 정착시켰고, 서인 김육이 충청도와 전라도로 확대한 데 이어서 남인 이원정이 경상도로 확대했다. 송시열을 비롯한 산당 또한 충청도 대동법 성공 이후에는 대동법에 반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조선시대 붕당정치에는 이념과 정책이 분명히 존재했으며, 조선사의 핵심은 붕당 간의 대립과 당쟁보다는 개혁과 정책 논의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대동법은 중앙 관부의 지속적 지출 증가로 지방 유치분이 감소하고, 이를 잡세를 통한 추가 징수로 보충하면서 점차 문란해진다. 게다가 본래 인민구제를 목표로 했던 환곡이 중앙과 지방의 중요 세원이 되면서 오히려 인민의 고통을 더하게 된다. 19세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따르면, 각종 수취 항목은 44종에 달했고 그 부담은 법정세의 2배를 넘었다.  

대동법이 훗날 문란해지고, 조선이 19세기 소위 ‘삼정의 문란’으로 대표되는 위기를 맞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저자는 대동법은 합리적 개혁이었으나, 의회의 미성립으로 불완전했던 조세법률주의, 녹봉을 받지 못하는 아전에 의한 부정의 구조화, 수령에게 징수 재량권을 폭넓게 맡기는 전통 등이 문제였다고 지적한다. 더불어 송시열 등의 안민지상주의가 득세하면서 양전제도를 개혁하지 못하고 상업 육성, 외국 선진 기술 도입에 실패하였다고 본다. 그러면서 만약 유성룡의 부국강병책, 김육의 안민부국론이 조정의 정책 이념이 되고, 18세기 초 방전법(方田法, 숙종 때부터 제기된 토지측량 방식의 개혁으로, 토지 누락을 방지하기 위해 토지를 일정한 크기의 사각형으로 구획하는 방안이다) 개혁으로 재정을 크게 확충하고, 18세기 후반 북학파의 해로 무역 육성론과 외국 선진 기술 도입론을 수용했다면, 경제성장이 촉진되고 조선이 부국을 이룰 가능성이 있었다며 아쉬워한다. 

지난날 율곡은 경세학을 체계화하면서 당대를 ‘중쇠기’로 규정하고 공납과 군역에 대한 구체적인 조세개혁을 주장하였다. 이는 지주전호제가 확대되는 상황에서 기존의 인두세적 성격을 갖는 조세를 생산력 발달에 따른 합리적 방향으로 우선 개혁하고, 양전을 통한 토지세 개혁은 차후의 과제로 남긴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육이 성취한 대동법은 율곡의 주장대로 공납을 개혁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김육 이후에는 군역도 개혁되었으니, 남은 것은 토지세 개혁이었다. 그런데 김육 사후 숙종대 논의되었던 양전개혁론인 방전법은 실시되지 못했다. 환국 정치와 영·정조대 탕평 정치를 거치며 붕당정치가 사실상 해체되면서, 건강한 정책 논의가 사라지고 개혁 또한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환국 정치의 와중에 이루어진 양전과 전세를 둘러싼 논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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