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가 지난 1917년 10월
번역: 임지섭 정책교육국장
역자 해설
이 글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가 편집위원으로 함께하는 반연간지 《위기와 비판》(CRISIS AND CRITIQUE)의 4권 2호(2017년 11월)에 실린 글이다. 발리바르는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기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글을 시작한다. 1917년 10월은 이제 먼 과거에 속하게 되었지만, 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잔혹하고 완전한 실패라는 평가와 탁월한 반(反)자본주의 혁명으로서 현존 질서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라는 평가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대조적인 담론이 동일한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가?
이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방법을 따라, 10월 혁명에 대한 표상 또는 이미지로부터 거리를 두고 세 가지 시간성을 고려하는 비판적 분석이 필요하다. 발리바르가 설정하는 세 가지 시간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역사적 ‘사건’으로서 볼셰비키 혁명의 시간, 둘째, 10월 혁명의 흔적이 남은 20세기라는 ‘극단의 시대’라는 시간, 셋째,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공산주의 혁명이 세계적으로 만들어낸 역설적 ‘결과’로서 ‘사회주의 이후의 자본주의’라는 시간이 그것이다.
먼저 첫 번째로, 발리바르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볼셰비키 혁명의 시간성을 검토한다. 그는 볼셰비키 혁명이 봉기적 상황과 소비에트라는 주역이 처음 등장하는 1905년에 시작하여, 스탈린이 유일한 지도자로 등장하고 5개년 계획과 집단화 과정이 시작되며 신경제정책이 종료되는 때 끝이 나는 것으로 설정한다. 이러한 시간성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어떻게 혁명이 단기간에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전위와 대중을 결합해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시도할 수 있었는지, 그런 결합이 파괴되고 혁명이 국가화되며 혁명적 과정이 끝나게 된 것은 언제인지, 마지막으로 무엇이 이 혁명에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부여하는지다.
이 대목에서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적 개념인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을 가져온다. 과잉결정은 사회 변혁 과정을 시작할 힘을 집중시켜 결정화하는 이질적인 역사적 요인들의 복잡성을 의미하며, 과소결정은 만약 어떤 요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그런 ‘우연적’ 사실을 의미한다. 발리바르는 혁명의 조건과 내용이라는 측면에서 러시아혁명을 과잉결정한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이었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러시아혁명은 전쟁의 결과였다. 동시에, 전쟁을 억누르려던 혁명은 내전으로 인해 또 다른 전쟁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혁명적 조직은 군사화되었고, 공산주의 지도자와 활동가들은 전쟁을 정치의 최고 형태로 여기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이는 혁명이 국가화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변질되는 데 분명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편 과소결정과 관련하여, 발리바르는 당과 소비에트라는 대립물의 통일을 실천적으로 이루어냄으로써 러시아혁명을 결정화한 것은 다름 아닌 역사적 개인으로서 레닌이었다고 단언한다. 달리 말해, 당시의 정세에서 전위와 대중, 조직과 자발성을 종합적으로 결합한 레닌의 역할이 없었다면 러시아혁명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1917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해 만들어진’ 혁명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결정화한’ 혁명이다. 즉 전쟁이라는 조건에서 형성된 혁명의 요인들이 레닌이라는 역사적 개인이 담지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실천적으로 결합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조직되고 혁명적 과정이 지속되었다. 반대로 내전을 거치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물리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파괴되었을 때 혁명적 과정도 끝났으며, 그 역으로도 그러했다.
두 번째로, 발리바르는 10월 혁명의 ‘흔적’을 포함하는, 20세기의 ‘극단의 시대’라는 시간을 검토한다. 그에 따르면, 20세기의 특유한 역사적 궤적에는 혁명과 반혁명의 대립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1차 세계전쟁 이후 세계 각지의 혁명적 시도들은 그 형태에 있어 볼셰비키 혁명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동시에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은 그러한 시도들이 실패한 주요한 조건이기도 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러했는데, 하나는 혁명에 맞서 반혁명이 세계적 무대에서 조직되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후의 혁명적 시도들이 볼셰비키 혁명의 승리를 보장했던 ‘당 형태’를 모방하고 반복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발리바르는 파시즘의 발전과 소련의 ‘주권’ 국가로의 변형이라는 요인을 지적하며 이러한 설명을 보충한다. 전쟁의 산물 그 자체로서 반혁명 정치를 대표하는 파시즘의 등장으로, 1929년 이후 세계는 자유주의, 파시즘, 공산주의라는 세 유형의 정치 체제가 민족국가라는 형태로 갈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공산주의 운동에 파괴적인 효과를 낳았는데, 특히 ‘사회주의 조국’ 소련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파시즘과 타협함으로써 민주주의 세력으로서 공산주의의 권위를 추락시켰다.
여기에는 스탈린 치하에서 소련이 주권 국가화된 효과가 결부된다. 스탈린 시기 소련, 더 나아가 공산주의 운동에서 당은 혁명적 조직에서 지배 기구로 변형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상에 공백으로 남아 있던 실제 권력의 행사라는 측면을 채우고 지배했다. 이는 혁명을 과잉결정했던 요인들의 결합을 급속하게 붕괴시켰다. 결국 당은 정치권력에 대한 군사권력의 종속, 계획당국과 공장 내 당 기구에 대한 경제권력의 종속, ‘사회의 적’을 규정하는 국가에 대한 사법권력의 종속, 국가 철학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형성한 정부에 대한 정신적 권력의 종속이라는 네 겹의 예속을 혁명에 부과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과정은 자본주의와 파시즘과의 이중적 대결이라는 조건에서 이제 소련이라는 주권국가 자체가 필수적이고 영구적인 혁명의 도구이자 중심이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진행되었다.
이 대목에서 발리바르는 20세기 공산주의의 혁명적 과정에서 일어난 하나의 분기로서 1920년 바쿠에서 열린 코민테른 동방인민대회에 주목한다. 그는 이 대회가 볼셰비키 혁명을 복제하려 했던 유럽 혁명의 실패를 상쇄, 보완하고자 했다고 본다. 아울러 마오쩌둥과 중국혁명은 시간성과 혁명의 주역이라는 측면에서는 10월 혁명과 완전히 다르지만, 그때와 같이 대중의 참여와 당의 지도력의 결합을 재현하면서 러시아 모델과의 분기를 만들어냈다.
또한 발리바르가 보기에, 1917년 혁명 모델의 모순적인 현실화로서 중국혁명은 유럽에서 비롯된 공산주의라는 정치적 언어가 더는 유럽 중심적이지 않은 맥락에서 간직된다는 ‘역사적 전환’을 의미한다. 이러한 ‘유럽의 지방화’가 세계화 시대의 자본주의 이전에 공산주의에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또한 공산주의와 1917년 혁명의 흔적을 지닌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발리바르가 마지막으로 검토하는 오늘날의 시간성으로 연결된다.
발리바르는 결론을 대신하여,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 새겨진 1917년의 사건과 그 흔적을 논의하기 위해 ‘거꾸로 뒤집힌 이행’이라는 공식을 빌린다. 그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그리고 그 반대인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두 가지 연속되는 전환이라는 공식으로부터, 종종 신자유주의의 승리로도 묘사되는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를 ‘사회주의 이후의 자본주의’로 개념화하고자 한다. 이는 공산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체제가 패배하여 세계 시장에 장악당한 것으로 이어졌지만, 단순히 다시 자본주의로 ‘복귀’했다는 것을 넘어 20세기 자본주의 역사에 계급투쟁을 반영하는 일정한 노동력 보호와 국가의 경제정책이라는 형태로 그 흔적을 남겼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사회주의 이후’의 시대에, 어떤 이는 여전히 1917년 혁명을 망각의 역사로부터 부활시켜야 할 이상적인 모델로 보거나, 반대로 급진적인 대안이 요구되는 반면교사로 본다. 또한 이 양자를 매개하며, 1917년 레닌의 결정적 개입을 통해 작동한 전위와 대중의 ‘결합’이 미완으로 남았음을 제기하고 소비에트의 자율적이고 ‘반권위주의적’인 기능을 강조하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사회주의와의 대립을 무시하고서는 다룰 수 없는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를 조사함으로써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있다고 본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와 대립하며 만들어온 역사적 타협을 생산의 탈영토화와 금융화로 역전하려는 가운데, 새로운 사회주의적 역전과 공산주의적 대안은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 관계와 통치 형태의 망에 얽혀있다. 따라서 발리바르는 공산주의 혁명의 충격과 흔적에서 비롯된 ‘역사적 사회주의’의 모순된 효과들에 대한 조사야말로, 사회주의 이후의 시대에 다른 길을 시도할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의 조건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발리바르가 이 글을 열며 내밀었던 첫 질문, 즉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기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예비적인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 안은 원문의 설명이며, [] 안은 역자가 추가한 설명이다. 굵게 처리된 부분은 모두 원문에서 기울임체로 강조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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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0월’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논하기 전에, 방법과 목적에 관해 예비적인 몇 가지를 언급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우리는 왜 1917년 10월을 지금, 이 시점에 논하는가? 명확하지만 다소 가벼운 대답은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100주년은 역사적 사건을 쓰고, 기념하고, 부활시키거나 영원히 묻어버릴 기회이고, 학문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킬 기회이기 때문이다. 더 신중한 대답은 1917년(초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셰비키’ 또는 ‘러시아’ 혁명을 떠올리는 날짜 또는 명칭)이 많은 사람에게 노골적인 모순을 포함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책이나 동화 속에서만 살지 않는 대부분 사람은 이 사건[1917년]이 일어났던 ‘세계’가 이제는 먼 과거에 속한다(기억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는 표준적인 기간인 3세대라는 시간을 넘어섰다)는 것을 인정한다. 바로 그 세계의 구조가 1917년의 사건이 벌어지는 상황을 창출하고, 그 주역들이 등장하는 틀을 짜고, 그 사건에 관한 가상을 구성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소련이 사라지자 선언된 ‘역사의 종말’[프랜시스 후쿠야마]이 우스꽝스러운 농담으로 밝혀진 뒤, 잔혹하고 자신감에 찬 자본주의 형태(‘절대 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가 세계화되었고, 다양한 형태로 계속 변모하는 혁명에 대한 요구가 우리 사회에서, 특히 다른 미래를 꿈꾸며 적극적으로 그런 미래를 ‘만들고’ (또는 가능하게 하고) 싶어 하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1917년은 탁월한 반(反)자본주의 혁명이자, 모든 모순적 측면을 담고 있다. 1917년은 잔인함과 완전한 실패(아마도 범죄적인 실패)로 악명 높은 동시에, 현존 질서에 대한 저항의 돌이킬 수 없는 상징이었다. 어떻게 이러한 대립적인 담론이 동일한 ‘현실’에 대해 적용될 수 있는가? 이제, 그리고 아마도 과거와 똑같은 방식을 결코 반복하지 않는, 비판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이 분석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나는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훈련받았으며,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 구성요소였던 혁명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 (몇 없는 예외를 제외하고) 마르크스주의의 무능력함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그저 현실에 대한 (사죄와 유토피아적 항변 사이에서 진동하는) 이데올로기적 비평으로 몰락하게 된 주된 이유라고 믿기 때문에, 나는 우리가 기본적인 방법론적 원칙을 마르크스 본인(『정치경제학 비판』의 서문)으로부터 빌려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어떤 개인이나 역사적 시대에 대한 판단과 마찬가지로, 어떤 혁명에 대한 ‘판단’(해석)은, 혁명 이후에 생산되거나 발생한 혁명 그 자체에 관한 표상(representation)을 따라서는 안 된다. 혁명은 아름답든 추악하든 혁명의 이미지로부터 반드시 거리를 두고 떨어져야 한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예를 들어 오래된 공산주의자로서, 그 사건이 낳은 사후적 효과의 범위 안에 주관적으로 깊이 자리 잡고 있다면, 그리고 그 사건이 커다란 열정과 판단을 동반했다고 한다면, 그것이[혁명의 이미지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가능할까?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완전히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립성이나 객관성을 가장한다고 해서 더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10월 혁명에 대한 어떠한 평가에도 영향을 미치는 세 가지 시간성(temporality)에 대한 검토를 안내선으로 삼아서, 혁명의 영향과 거리를 결합하는 전략을 시도해보려 한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혁명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논한다. 이는 10월 혁명의 시간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라는 혁명의 주역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로 시작한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그 사건의 흔적을 논할 것인데, 이는 우리를 10월 혁명의 특이점과 연결시키기도 하고 분리시키기도 한다. 달리 말해, 나는 ‘극단의 시대’(‘단기’ 20세기에 대한 에릭 홉스봄의 신조어)로 돌아갈 것이다. 이러한 성격 규정은 주로 혁명의 비극적 발전과 혁명이 상대 세력과 맞서는 과정에서 나타난 극단적 폭력에 기인한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글의 작업을 이어가는 것을 준비하며) ‘공산주의’ 혁명이 세계적으로 생산해낸 역설적 결과를 공식화하려 할 것이다. 이 ‘공산주의’ 혁명의 결과는, 적어도 현재의 관점에서는, 공산주의도 아니고 심지어 사회주의도 아닌 자본주의의 새로운 조직 양식이다. 이는 실로 극적인 ‘역사의 간지(奸智)’다. 여기가 바로 우리가 가장 어려운 쟁점을 마주하는 곳이다. 이러한 비판적 관점은 우리를 어떠한 정치적 결론으로 이끄는가? 이것이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혁명적 사건의 시간
이 첫 번째 절에서 나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실제로 역사를 두 개의 구분되는 시대로 나눠버렸을 정도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묘사하고자 한다. 이는 (이 혁명의 재림을 ‘준비’하며) 이 혁명을 숭배했거나 (이 혁명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으며) 혐오했던 여러 세대의 상상 속뿐만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도 그러했다.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를 포함하여) 혁명이 깨어난 후 불러일으킨 거의 모든 것이 달라졌고, 그로부터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 무엇도 정말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비가역성이야말로, 강한 의미에서 이 사건을 가장 반박 불가능하게 설명하는 단어이며, 특히 ‘혁명들’을 다룰 때 이러한 비가역성에 주목해야 한다. [1917년] 당시에도 프랑스 혁명은 이미 그러한 영향을 미쳐왔기 때문에 [두 혁명 간의] 비교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10월 혁명의 주역들 사이에서 압도적이었고 많은 비평가에게 쉽게 채택되었던 표상을 바로잡기 위해 거리를 두기 시작해야 한다. 그 표상은 프랑스 혁명을 묘사하는 극작법을 러시아혁명의 순간들을 읽는 기호(code)로써 러시아혁명에 투영하는 것이다. (이는 종종 정반대로 프랑스 혁명을 러시아혁명의 전조로 읽는 경향을 낳기도 했다) 자코뱅과 볼셰비키는 등가물로 여겨지고, 레닌은 또 다른 로베스피에르이고, 스탈린은 또 다른 보나파르트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또 다른 공안위원회이고, 적색 테러는 또 다른 청색 테러이고 등등. 이런 식의 투영은 비극을 (비극의 반복으로서) 소극(笑劇)으로 보이게 하는 위험성이 있을뿐더러, 이미 확립된 대답이 없는 문제들, 즉 10월 혁명의 역사적 특이성에 대한 모든 질문을 데자뷔라는 그릇된 감각을 일으킴으로써 가로막는다. 우리의 분석은 ‘역사를 만드는’ (혹은 장기간에 걸쳐 역사를 추동하는 힘을 결정하고, 그 이해관계들을 결정하며 또한 그 표상을 결정하는) 그 어떠한 두 사건도 같은 시나리오에 따를 수 없다는 우리의 방법론적 규칙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10월’ [혁명]이 완전히 독창적인 역사적 단절 또는 사건이 되게 하는 계기들의 연쇄와 과정에 대한 평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시간적 경계를 규정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사건의 시간성을 결정하는 데에는 물론 혁명적 힘으로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고, 이 권력을 반혁명의 맞불로부터 지켜내고, 이 권력을 사회 변혁을 시작하는 데 사용한 순간들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기준은 너무 짧다. 여러 이유로(이러한 이유는 불가피하게 순환논리를 따르는데, 즉 그 이유 자체는 내가 혁명의 역사적 성격에 결정적이라고 생각할 행동들에 달려있다), 나는 혁명적 사건이 비록 하나의 문제(하나의 사회-정치 체제를 파괴하는 것과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또 하나의 체제를 창조하는 것)를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긴 하지만, 에피소드들의 특정한 연쇄를 포함하고 있다고 제안한다. 그러한 연쇄에서 상황, 세력들의 성격과 세력들 사이의 관계는 계속해서 변화한다. 이러한 연쇄적인 사건들은 적어도 ‘2월’과 ‘10월’ 양자를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이 둘은 두 개의 혁명(하나는 ‘민주적’이고 다른 하나는 ‘쿠데타’, 혹은 좀 더 마르크스주의적 표현으로 전자는 ‘부르주아’[혁명]고 후자는 ‘공산주의’[혁명])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봉기로 차르 체제가 무너지고, 페트로그라드에서 ‘이중권력’의 상황(임시정부 대 소비에트)이 나타날 시기에 발생한 하나의 혁명이다. 이는 이중권력의 마지막 잔재가 제거되면서, 즉 볼셰비키가 (1918년 초) 제헌의회를 해산하면서 끝이 났고(이를 로자 룩셈부르크가 비판한 것은 유명하다. 그렇지만 그녀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은 아니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공식적으로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끊는 것은 불충분한데, 왜냐하면 봉기적 상황과 이중권력의 형성은 이미 1905년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혁명’(연대기에도 ‘혁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의 발전은 차르의 탄압에 의해 잔혹하게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전쟁으로 인해) 다른 조건들이 주어지고, 그 이면으로, 혁명적 병사들이 군대 내에서 등장했던 1917년에 다시 시작되었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다. 따라서 ‘1917년 혁명’은 1905년에 시작되었으며, 혁명의 주역들은 이미 그때부터 식별할 수 있는 형태로 활성화되어 있었다고 관찰하는 게 타당하다. 이는 대칭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사건’을 형성하는 완전한 순환, 즉 혁명적 과정이 끝나는 때는 언제인가? 1918년 초는 중요한 의심할 여지 없이 중요한 기점인데,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한 이유와 함께, 이때 단독강화(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와 당의 ‘공산당’으로의 변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아직 아무것도 달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즉 이 시기에 절대적인 불확실성을 가진 내전이 시작되었다. 내전은 특정한 폭력의 형태들과 제도들(적군, 체카), 제국주의 강대국(프랑스, 영국, 폴란드, 일본)의 반혁명적 개입, 노동자와 농민 간의 교환과 과세 ‘체제’, 또는 상호의존 ‘체제’를 확립하려는 연쇄적인 시도 등등을 동반했다. 그래서 [혁명적 과정의] ‘끝’은 언제인가? 나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각각은 그 근거가 있다. 하나는 1922년이다. 이때 내전이 실질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전시 공산주의’가 신경제정책(NEP)을 위해 폐지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공식적으로 새로운 국가로 탄생했다. (비록 새로운 국가의 체제가 과도적이고, 그 [영토적] 경계가 잠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신경제정책의 종료다. 이때 스탈린이 (서로 긴밀히 연결된) 당과 국가의 유일한 지도자로 등장하고, 5개년 계획이 준비되고, (불균형적이었지만 그래도 소비에트 권력과 농민이 맺었던 ‘동맹’을 끝낸다는 함의를 지닌) 집단화 과정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 두 번째 가능성, 즉 ‘더 넓은’ 시기 구분을 택하고자 하는데, 왜냐하면 신경제정책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변증법적 발전으로 보기 때문이다. 즉 이때까지는 혁명적 이행을 위한 새로운 전략이 시도되었으며, 당은 아직 국가기능의 위계질서를 통제하고 주민에게 국가의 명령을 분배하는 국가의 최고 기관이 되지 않았다. 다른 한편, 이 시점에 이르면, 혁명에 그 이름을 부여했던 대중기관, 즉 소비에트가 이미 오래전에 자율적인 기능을 잃었다는 사실도 인식해야만 한다. (그것은 아마도 1921년 초로, 이때 크론슈타트 수병 봉기와 그에 대한 진압이 발생했다) 나아가 문제의 일부분으로서 첫 번째 시기 구분[즉 1922년까지]에서는 레닌 본인이 아직 살아 있었던 반면 (우리가 알고 있듯, 레닌은 심각한 병마와 싸우면서도, 모셰 르윈(Moshe Lewin)의 표현에 따르면, ‘최후의 투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두 번째 시기 구분[즉 신경제정책 종료까지]에서는 레닌이 이미 사망하여 미라가 되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볼셰비키 지도자 간에 발생한 ‘승계 투쟁’에서 스탈린이 부하린의 도움을 받아 승리했다. 당시 부하린은 [스탈린의 권력 장악 후]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렇게 더 복잡한 시간적 경계 설정을 통해서, (알튀세르적 방식으로 표현하면) 내가 혁명적 사건의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이라고 부를 논의의 틀이 마련되었다. 물론 나는 극도로 도식적이고 부분적이게 될 수밖에 없다. 즉 이것은 [1917년] 혁명의 역사가 아니라, 그 역사서술을 조직할 수 있게 하는 문제제기의 몇 가지 노선에 대한 논의일 뿐이다. 과잉결정을 통해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질적인 역사적 ‘요인들’의 복잡성인데, 이런 요인들이 결정체를 이루어, 앞으로 권력을 장악할 세력들을 집적하고, 낡은 제정 체제를 파괴하고, ‘부르주아적’ 대안의 발전을 저지하고, 기존에는 없었던 (따라서 그 효과를 예측할 수 없었고, 단지 ‘계급 없는 사회로의 전환’과 같은 추상적인 공식만 있었던) 유형의 사회적 변형 과정을 개시했다. 과소결정을 통해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연성’(또는 불확정성)인데, 이는 그런 요인들이 결정체를 이루지 못할 수도 있었고, 다른 무엇보다도, 그 요인들의 효과가 융합되거나 조합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만약 정치 행위자가 그 전략적 순간에 남겨졌던 ‘공백을 채우지’ 않았다면, 동일한 기회(chance)에서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오래된 수사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우리는 이러한 기회를 카이로스[Kairos, 기회 또는 특별한 시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라고 부를 수 있다) 도식적으로 말해서, 나는 과잉결정의 핵심적 구성요인이 억압적인 ‘봉건적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사회적 반란과, (조지 모스(George Mosse)의 범주를 빌면) 전쟁의 ‘야수화’ 효과의 결합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 전쟁[1차 세계대전]은 전 유럽에서 대규모 파괴와 살육을 동반했고, (러시아에서 벌어진 전쟁처럼) 종종 ‘절멸주의’라는 지경에 도달하기도 했다. 그 결과는, 러시아혁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이다. (전쟁에 저항했고, 그러나 또한 새로운 형태로 전쟁을 수행했다) 이야말로 [즉 전쟁과 맺는 불가분의 관계야말로] 전적으로 러시아혁명의 담론이나 이데올로기, 제도, [러시아혁명과 함께 등장한] 역사적인 정치 ‘스타일’ 또는 정치 개념 등의 틀을 구성했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은 혁명 초기의 경계를 넘어 혁명을 확장하려는 정치운동(즉 20세기 공산주의)에 대체로 전달되었고, [혁명의] 비극적인 결과도 함께 전달되었다. (물론 이는 혁명에 대한 적대자들의 본성이라는 또 다른 요인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나는 과소결정의 ‘우연적’ 요소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역사에서 위인의 역할’을 강력히 주장하기를 두려워하는 역사학자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볼셰비키 정당이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또는 볼셰비키 정당이 단독으로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정당은 아무리 지식을 갖추고, 조직적이고, 급진적이고, 기존 질서와의 단절을 준비했더라도, 전통적인 제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레닌이라는 이름의 우연적 개인(혹은 전 생애 중 특정 순간의 우연적 개인[즉 특정 순간의 레닌], 이 순간에 그는 죽을 때까지 책임져야 할 선택을 했다)이 대표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즉 레닌이 없었다면, 볼셰비키 정당은 전통적인 정당의 발상을 뛰어넘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와 같은 슬로건을 제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 때문에 레닌은 완전히 ‘예외적인’ 역사적 인물이 되는데, 아마 레닌이 유일하지는 않더라도 그에 견줄만한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차원[과잉결정과 과소결정](두 차원은 물론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렇지 않으면 혁명은 있을 수 없다)에 대한 몇 가지 세부 사항을 덧붙이고자 한다.
내가 과잉결정이라고 부른 것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하나의 측면[즉 전쟁]은 물론 잘 알려져 있고, 혁명의 조건과 내용, 양자의 측면에서 이러한 측면[전쟁]이 결정적 기능을 했다는 사실을 반드시 강조해야 하지만, 항상 이런 강조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혁명을 촉발한 것은 전쟁을 지속하기를 거부하는 부대들의 반란이었고, 이는 전체 주민의 격분을 배경으로 했다. 일반적으로 전쟁의 마지막 해에 러시아군은 200만 명을 잃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다른 교전국들에서도 엄청난 손실이 있었고, 1917년에는 프랑스 전선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지만, 프랑스 공화국의 장군들은 (아무리 야만적이고, 오만하고, 무능하고, 자기 병사들을 총알받이로 소모하더라도) 병사들을 열등한 인간(moujiks, 제정 러시아 시대 농민)으로 간주하는 귀족이 아니었다. 그렇게 병사들을 취급한 러시아 장군들이야말로 러시아 농민들로부터 그들이 경작하는 땅을 빼앗은 귀족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봉기의 혁명적 기관은 ‘노동자와 병사의 소비에트’였다. 그러나 병사들은 농민이었고, 전쟁을 위해 그들의 공동체로부터 대규모로 뿌리 뽑혔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급속한 ‘산업혁명’의 산물이었고, 이 산업혁명은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비참하고 고도로 집적된 프롤레타리아를 창출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다른 유럽 국가들이 차례로 (남성) 주민에게 부여했던 완전한 시민권이 전혀 없었다. 봉기의 요구는 평화, 보통선거권, 노동자의 권리, 그리고 토지의 분배였다. 특히, 대중은 2월 이후 새로운 임시정부가 전쟁을 중단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자 임시정부를 강력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볼셰비키가 일방적 평화(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를 선언하자 곧바로 내전이 뒤따랐고, 외국군이 러시아를 침략했다. (처칠은 볼셰비즘을 “그 요람에서 교살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백군’ 장군들은 학살을 일으키는 군벌이 되고, 농민들은 두 진영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았다. 혁명은 반혁명세력들을 진압하기 위한 고유한 군사장치(적군)와 경찰을 창출했다. 따라서 전쟁을 억누르려던 혁명은 직간접적으로 수백만 명의 사망자를 내는 또 다른 전쟁이 되었다. (사망자 비율은 미국 남북전쟁과 비슷하다) 1915년 (짐머발트 대회에서) 제기된 레닌의 역사적 표어,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 변형하자”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얻게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모든 혁명적 기관은 ‘군사화’되었으며, 공산주의 지도자와 활동가들은 ‘전쟁’을 정치의 최고 형태로 여기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바로 이러한 틀 안에서 주도력을 행사하고, 연대를 실행하고, 상상력을 발휘했다.
이는 과소결정이라는 다른 측면으로 우리를 이끈다. 여기서 우리는 ‘혁명적 주체’, 즉 ‘혁명을 창출했던’ 집단적 행위자가 누구냐는, 고도로 민감한 주제를 다루게 된다. 이 주제는 봉기 그 자체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 중 하나다.) 토론은 전위를 강조하는 입장(오직 볼셰비키 당만을 강조하거나, 10월 이전 몇 주 동안 헤게모니를 쥐게 되었던 대중조직들과 함께한 볼셰비키 당을 강조하는 입장)과, 혁명의 대중적 성격을 강조하는 입장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나는 둘 다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당이 매우 조직적이고 기강이 있었기 때문이고, (비록 우리가 알고 있듯 전술이나 당면 목표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러한 전술 또는 당면 목표에 따라 레닌은 동지들이 봉기에 나서도록 ‘밀어붙였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와 농민이 (초반에는) 대규모로 볼셰비키의 편에 섰고, 심지어 볼셰비키가 계속 전진하도록 밀어붙였고, 집단적인 정치 행동을 펼치는 데 적절한 형태(‘소비에트’ 또는 평의회)를 전국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더 말해야 할 것이 있다. 즉 당과 소비에트 양자가 모두 활발하게 운동하는 한, 혁명은 낡은 정치행동 양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 또는 혁명 그 자체가 새롭고, 공산주의적인 ‘정치적 실천’을 수반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나 특히 당과 소비에트의 실천적 종합은 대립물의 통일이었고, 이는 저절로 일어난 것도, 안정적인 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개인으로서 레닌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기능을 부여하는 이유다. 레닌은 4월 테제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통해 [혁명의] 주도권을 다른 혁명적 요소들에 넘겨주었고, 이를 꺼리는 (이는 소비에트가 순수한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는 사실로 인해 촉진되었다) 자기 당에 맞섰다. 이 시점에서 레닌은 당이 언제 어떻게 ‘지도자’로서 역할을 되찾을지 알 수 없었다. 레닌이 진정으로 예외적인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은 (단지 그의 이론뿐만 아니라) 바로 이 도박(wager)이다. (하지만 그의 이론도 특히나 제국주의에 대한 그의 해석을 통해서, 상황에 맞도록 개작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측면에서도 이러한 우연적 특이성을 살펴볼 수 있다. 즉 당과 소비에트 사이, 대립물의 통일이 결정적인 순간에 창출되었다는 사실은, 권력을 장악하고 역사의 경로를 바꿀 수 있는 혁명적 역량의 중심에 간극 또는 ‘공백’이 존재했음을 사후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 간극은 레닌의 제안(initiative)에 의해 메워졌고, [당과 소비에트] 양측이 모두 이를 듣고 따를 수 있었다. 분명히도, 간극의 존재는 그러한 간극을 채우기 위한 충분조건이 아니다. 간극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적절한’ 주도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레닌이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때, 그는 그 주도권의 ‘담지자’가 될 것이었다. 즉 그는 결코 되돌아가거나 후퇴할 수 없을 것이며, 오로지 그 모든 결과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것은 단지 외견상의 역설에 불과하다. 즉 널리 공유된 의견과 달리, 레닌이 혁명에서 행한 역할은 대립적인 힘과 논리를 통일했다는 점이고, 바로 이 때문에 혁명을 쿠데타라고 부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역할은 곧 전위와 대중의 참여를, 조직과 자발성을 ‘종합하여’ 결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혁명을 정의하는 데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경향적으로, (자본주의적인) 계급 사회를 ‘무계급 사회’로 ‘변형’하는 공산주의라는 프로젝트를 정의하고 창도하는 것은 당이지만, 그러나 급진적인 민주적 경험을 구현하는 것은 소비에트이며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대중이] 공적 기관에 참여하기 위한 집단적 구조들이며), 그러한 [즉 소비에트와 대중 참여라는] 경험이 없다면 공산주의란 존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몇 가지 중간 설명이 필요할 것이지만 이를 그냥 남겨둔 채, 바로 이로부터 나는 네 가지 언급과 질문을 도출하고 싶다.
1. 왜 단지 며칠, 몇 주 만에 권력 이양을 달성할 수 있었는가? 이에 대한 답은 다시금 사회적 위기와 전쟁의 결합으로 되돌아간다. 즉 볼셰비키가 성공적인 쿠데타를 ‘음모’했거나, 그람시(Gramsci)가 나중에 주장했듯 러시아에 ‘시민사회’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전쟁이 국가권력을 군사화된 형태로 집중화하고, 국가권력의 생존이 군사기관의 작동과 성공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 활동의 전 부문(군수산업에서부터, 인간과 생산물의 징발에 이르기까지)도 군사기관에 종속되었다. 이는 [즉 군사화·집중화된 국가권력은] 환상이 아니라 (비록 전쟁이 환상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이며, 이러한 현실은 전쟁의 패배라는 도움을 얻는다면, 봉기에 그 대상[즉 군사화·집중화된 국가권력]을 ‘제공’하고, 그 대상에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이와 동시에, ‘종합된’ 혁명적 행위자[즉 당과 소비에트]는 정치적 ‘의지’나 결정능력이라는 측면에서 중앙집중화된 국가를 능가했고, 대중의 지지라는 측면에서도 그것을 압도했다.
2. 레닌(과 다른 많은 볼셰비키)이 생각하고 있던 혁명의 표상은 무엇이었나? 그리고 그들이 [10월 혁명이라는] 사건을 갑작스럽게 촉발된 시간(precipitated time)이라고 인식하게 한 혁명의 표상은 무엇이었나? (그러한 시간 속에서는 (종말론적 함의를 지닌 유명한 마르크스적 표어를 따르자면) “일 년이 걸릴 일을 며칠 만에 이룰 수 있다.”) 내 생각에, 여기에는 사실상 서로 연결된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이들은 ‘제국주의 사슬’의 ‘가장 약한 고리’에서 일어난 (또는 오히려 시작한) 러시아혁명이 하나의 세계혁명이라고 확신했다. 10월 혁명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과 그 목표는 완전히 이러한 [세계혁명이라는] 본질에 의존했다. 그러나 세계혁명이, 적어도 지금 당장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깨닫는 것은 이들에게 매우 극적이고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실행 불가능한 딜레마에 처했다. 즉, 공산주의 혁명으로서 그들의 혁명을 포기할 것이냐(그러나 어떻게 혁명을 ‘중단’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들의 혁명을 ‘세계화’하는 데 있어 빠져있는 조건들을 가능한 한 빠르게 창출할 것이냐(그러나 혁명의 세계화는, 코민테른의 도움을 받더라도, 오직 그들에 의해 달성될 수는 없었다). 둘째, 이들은 20년 전에 벌어졌던 그 유명한 ‘수정주의 논쟁’의 중심, 즉 (장기적인) ‘운동’과 ‘최종 목표’ 사이의 딜레마를 역사가 해결해주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를 경험했다.) 베른슈타인의 용어로 말하자면, 운동(Bewegung)과 최종 목표(Endzweck)는 이제 하나의 동일한 실천으로 재결합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공산주의적 미래를 향한 ‘이행’의 시작이 그 자체로 공산주의가 될 수 있다(그리고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새로운 ‘레닌주의적’ 개념은 이러한 생각을 명료하게 밝히고 실행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공산주의로의 이행의 개시가 곧 공산주의라는 생각은 그러한 레닌주의적 개념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있다)
3. 언제 두 혁명적 힘[당과 소비에트]의 결합이 붕괴되고, 또는 양자 간의 공산주의적 종합이 변질되고, 또한 그에 따라 당이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 썼던 것처럼, ‘이미 비국가인 국가’라는) 이행의 모순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조직에서 국가의 형성을 기대하고 따라서 혁명의 국가화를 야기하는 ‘기계’ 또는 장치(dispositif)로 변형되었나? 국가주의적 경향은 매우 초기부터, 사실상은 [혁명의] 기원에서부터 존재했던 것이 분명한데, 왜냐하면 국가주의적 경향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녀의 선견지명을 보여준, 1918년 가을에 쓴(그러나 그녀가 죽고 난 뒤 1922년에야 출판된) 「러시아혁명에 관해」(On the Russian Revolution)에서 제기된 비판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후에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는 질문을 다음과 같이 변형하게 한다. 즉, 언제 국가화를 향한 경향이 그 대립적 경향, 즉 우리가 ‘자치론적’ 또는 ‘무정부주의적’ 경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경향을 압도하게 되었는가? ([국가주의적 경향과 자치론적·무정부주의적 경향] 양자는 [당이든 소비에트든 간에] 하나의 동일한 제도들 내에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1921년에 이르면, 비가역적인 지점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나의 전환점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레닌의 ‘최후의 투쟁’은 대체로 새로운 권력체제의 양식을 협상하는 것이었다) 1921년, 크론슈타트의 ‘반혁명’ 소비에트와 농민 반란(탐보프)을 진압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과 공장 자주관리의 역할을 둘러싸고 당의 주요 세 분파 사이에 결정적인 분쟁이 일어난 뒤 볼셰비키 당에서 ‘분파’ 형성을 ‘임시적’으로 금지했다(10차 당대회). 나는 국가화에 대한 초기 충동(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개념의 점진적인 무력화)은 볼셰비키의 활동에 작용하는 삼중의 제약에서 발생한다고 제시한다. (1) 초민족적 ‘국가 체계’가 가하는 외부적 제약. 이에 맞서 볼셰비키는 [초민족적 국가 체계가] 그들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해야 했다. (이는 당장에는 전쟁에 대한 저항을 [즉 내전에 대한 외국의 개입 중단을] 의미했고, 나중에 그것은 외교와 경제관계가 [즉 정상적인 외교·경제관계 수립이] 되었다.) (2) 경제적 상황이 가하는 국내적 제약. (기근과 같은) 사회적 긴장이 커졌고,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민 내부의 모순’을 억압하기보다는 ‘관리해야’만 했다. (그에 따라 신경제정책은 이를 실험하고자 시도했고, [인민 내부의 모순을] ‘조절하는’ 국가장치로 가는 길을 닦는다) (3) 마지막으로, 혁명운동 그 자체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적 제약. 특히나 당-형태는 [즉 당이라는 특수한 조직형태는] 두 가지 관점 사이에서 진동했다. 즉 한편으로는, 전략적 프로젝트를 고려하면서 ‘구체적 상황’을 해석하는 사회 변혁의 지도부라고 보는 관점과 다른 한편으로, 혁명이 직면한 [서로 대립하는] 대안들이라든가 사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갈등이 기층 당원을 통해서 반영 또는 표현된다고 보는 관점 말이다. (나중에 그람시는 후자를 ‘집단지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볼셰비키 당이 (혹은 ‘당 형태’ 그 자체가) (자치론자들이 판결하듯이) 국가화의 벡터(vector)는 아니고 [즉 당이 그 자체로 국가화라는 일정한 크기의 방향성을 가진다고 볼 수 없으며], (트로츠키주의의 주문(呪文)처럼) 당이 그 본질을 잃고 ‘관료화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세 가지 제약이 교차한 결과, 볼셰비키 당은 국가화되고, 또한 사회와 소비에트 국가 내에서 ‘주권적’ 기능을 획득했으며, 이 양자는 서로를 강화하는 악순환을 낳았다. (또는, [스탈린주의라는]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는 소비에트 국가를 탄생시킨 ‘선순환’이었다)
4. 마지막으로, 아마도 가장 어려운 질문은 이것이다. 무엇이 이 혁명에 (혁명의 사상, 조직 형태, 그리고 이후에 미친 영향력이란 측면을 포함하여)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부여하는가? 나는 내전 말기에 도달한 (부정적인) 상황에서 계급 결정의 모순적인 양상을 읽는 것 외에는 다른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내전 말기에 이르면, 외부의 적들이 패배하고 내부의 반혁명은 분쇄되었지만, 사회는 피폐해졌고 경제는 산산조각이 났으며, 농민과의 계급 동맹은 (아르노 마이어(Arno Mayer)가 ‘반혁명’이라고 말하기를 선호한) 상호불신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가 사멸해버렸다.” 이는 레닌이 극적이었던 10차 당대회 중간에 외친 절규였는데, 분명히 두 가지를 의미했다. (1) 혁명 이전부터 파업을 통해 계급의식을 강화하고 2월과 10월 봉기의 주역을 맡았던 전투적인 노동자, 특히 소비에트의 구성원들이 내전에 ‘먹혀버렸다’[죽거나 사라졌다]. 그들은 내전에서 적군과 적군 내 정치간부의 중추를 형성했다. (2) 경제가 황폐해졌고, 산업은 새로운 노동계급과 함께 재건되어야 했다. 이는 결정적인 문제다. (리타 디 레오(Rita di Leo)는 그녀의 책, 『세속적인 실험: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그리고 그 반대방향으로』(L’esperimento profano. Dal capitalismo al socialismo e viceversa), 2012에서 이를 적절하게 강조했다) 이는 혁명 이후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결정적인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나는 나중에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산업의 재건이 국가의 결정에 의한 노동계급의 ‘형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비록 급속한 공업화와 집단화가 당의 이데올로기([스탈린주의적 의미의] ‘레닌주의’)와 함께 ‘계급의식’이라는 역할을 했지만 말이다. 이러한 강한 주장으로부터 더 중요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름은 ‘노동계급’이나 ‘임금노동자 계급’과 동의어가 아니며, 오히려 프롤레타리아는 그와 다른 역사적 기능을 가진 집단을 형성한다. 이러한 집단에서,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름은 대립물들의 통일체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즉 한편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어떤 ‘본원적 축적’이라는 형태에 의해 ‘소유를 박탈당하고’ 불안정한 삶에 내던져진 궁핍화된 대중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이들은 부르주아의 지배(사실은 모든 계급적 지배)에 도전하는 근본적으로 착취 받는 계급이며, 다양한 (넓은 의미의) 정치적 조직을 형성함으로써 자신을 표현한다. 혁명적 ‘사건’의 ‘혁명적 순간’에는 이 두 가지 양상이 놀라울 정도로 연속하여 나타난다. 왜냐하면, 특히나 전쟁에서 벌어진 농민에 대한 강제 동원은 이례적인 수준, 즉 그전보다 훨씬 더 야만적인 프롤레타리아화라는 수준에 이르렀고, 2월 이후와 10월 이후의 집단적 행동은 전투적인 노동자들이 혁명적 행동과 논쟁에 높은 수준으로 참여하게 했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우리가 1917년을 (낡은 마르크스주의 도식을 뒤따라서, 또는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을 뒤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해 이뤄진 혁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결정체를 형성한 혁명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1917년 혁명은 정치적 행위자로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창조한 그들 자신[프롤레타리아]의 ‘독재’였다. 그러나 또한 그 프롤레타리아를 해체한 것은 그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변질이었다. 혁명적 과정이 전개되었을 때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그 자신을 형성하고 조직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물리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파괴되었을 때 혁명적 과정도 끝났으며, 그 역으로도 그러했다. [그 후] 완전히 새로운 과정, 즉 ‘사회주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사회주의적 노동자 계급의 형성이 핵심적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인 이유들 때문에, 같은 명칭,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보존되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 이전에 혁명 전략을 지칭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정치·경제 체제를 의미하였다. 이는, 스탈린이 이론화한 것처럼, 그들을 [즉 혁명전략과 정치·경제 체제라는 이질적인 과정을] 하나의 동일한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연속적인 ‘국면들’로 보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이 두 과정이 사실상 서로 매우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왜 후자[정치·경제 체제를 건설하는 과정]가 전자[혁명전략으로서 프롤레타리아를 형성하는 과정]의 흔적을 유지했는지 이해해야만 한다.
소극이 아닌 비극으로서의 반복
20세기의 궤적을 해석하려는 역사학자들이 직면한 어려움은 비교적 간단하게 표현되지만, 이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한편으로, 볼셰비키 혁명의 효과가 결정적인 기능을 수행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20세기의 궤적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달리 말하면, 1917년 사건은 비가역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유발한 작용 때문에 또는 그것이 촉발한 반작용 때문에 지워질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1917년 사건으로부터,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간에, 20세기의 궤적을 연역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20세기는 그 혁명이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형되는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변형은 혁명이 일어났던 ‘영토’(물론 안정적인 국경은 아니다)의 안과 밖 모두에서 부정할 수 없는 흔적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매우 일반적인 정의에 더해, 우리는 즉시 다른 두 가지 보완적인 지적을 추가해야 한다.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말대로, ‘단기 20세기’는 극단의 시대였다. (‘단기 20세기’는 1차 세계전쟁과 소비에트 혁명에서 시작하여,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냉전의 종식과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혹은 변이, 자본주의의 새로운 ‘세계적’ 형세의 등장으로 ‘끝난다.’) 그는 극단의 시대라는 표현을 통해서, 정치운동들이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와 동시에, 그들의 적대가 전쟁, 대량학살(그중 일부는 집단학살의 성격을 갖고 있다), 전체주의적 지배형태라는 연쇄고리를 야기한다는 사실을 전달하고자 한다. 20세기 세계사의 전형적인 특징을 형성하는 이러한 잔혹성이라는 유례없는 요인들에, 우리는 혁명과 반혁명의 대립도 포함해야만 한다. [20세기에는] 혁명을 시도하려는 연속적인 흐름이 있었고, 이는 많든 적든 10월의 사례에서 영감을 얻었고, 그중에서 오직 일부만 성공을 거두었고 (그러나 물론 [성공을 거둔] 예외는 더욱 놀랄 만한 일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와 동등하게 반혁명 정책의 연속적인 흐름이 있었다. (그중 일부는 일반적으로 예방적인 반혁명 정책이었다) 이러한 반혁명 정책과 전자[일련의 혁명적 시도들]의 대립은 20세기 정치제도의 틀을 형성했다. 여기에서도 복합적인 난점이 존재한다.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혁명의 모델이 오직 하나만 있었던 것이 아니듯이 (심지어 1917년 10월이 [혁명] 개념을 재정의한 이후에도 그러하다), 정치제도의 핵심에 반혁명적 목적을 도입하는 모델도 오직 하나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비록 나는 공산주의 혁명과 그 후과가 세계에서 폭력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더 나쁜’ 형태들을 발생시켰다는 견해는 지지하지 않는데, 그러한 견해는 파시스트 정권(나치즘 등)의 잔혹성, 식민지 전쟁(그리고 식민화 그 자체)의 집단학살적 측면, ‘자유세계’의 ‘민주주의적’ 체제에 내재하는 거대한 차별 등등을 ‘망각’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그리고 이것이 여기서 나의 핵심 관심사다), 나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체제가 행사한 폭력을 흐릿하게 하고, 그 폭력을 체제 내부와 외부의 적들 탓으로 돌리려는 모든 시도는 속임수이고, 사실상 터무니없다고 주장한다. 특히나 다음과 같은 사실은 20세기라는 비극의 핵심을 구성한다. (여전히 우리는 이 비극을 이해함으로써, 이 비극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필요가 있다) 즉, 레닌 이후의 마르크스주의라는 매우 중요한 지적 도구 역시 (소련이라는 국가와 볼셰비키 당의 이익을 위해서) 이러한 폭력을 감싸주거나 최소한으로 축소 평가하고, 또는 그 폭력을 해석할 수 없는 무능력을 드러냈다는 사실 말이다. (왜냐하면 [폭력에 대한] 항의와 고발은 아무리 진정성이 있고 감명을 주더라도, 그것이 곧 적합한 해석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두고, 이제부터 지난 세기에 남은 10월의 ‘흔적’에 대해 몇 가지 질문과 반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나는 그 흔적을 해석하기 위한 나의 열쇠가, 당연히도 일부분을 다룰 뿐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또한, 내가 말했듯, 나의 열쇠는 게임에서 결코 뺄 수 없기도 하다)
내가 주의를 환기하고 싶은 첫 번째 지점은, 세계에서 다른 혁명들이 부상할 때 볼셰비키 혁명이 끼친 양면적인 효과다. 다른 혁명들은 나중에 임마누엘 월러스틴과 여러 사람들이 ‘자본주의 세계체계’라고 부르게 되는 것의 ‘중심부’와 ‘주변부’, 양자 모두에서 일어났다. (이는 본질적으로 유럽-아메리카 세계와 식민지를 의미한다) 우리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많은 사회와 국가에서 반란과 봉기, 혁명이 벌어질 환경이 무르익었지만, 그 가능성의 조건은 서로 달랐고, 이는 그들이 [전쟁의] 승자와 패자 사이의 경계에서 어느 쪽에 서게 되느냐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 각지에서 시도되었던 그러한 혁명들은 그 형태에 있어 볼셰비키 혁명의 직접적인 반향, 혹은 결과였다. 그러한 혁명들이 계속 이어 나간 강령, 이데올로기, 집단적 상상력은 볼셰비키 혁명이 낳은 가장 가시적인 성과물인, (그리고 세계의 지배계급들 위에 출몰하는 새로운 ‘유령’이 되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구성하게 한 한 가지 원인이 되거나, 또는 코민테른의 조직과 계획에서 파생되었다. 그런데 실상은 이러한 혁명 대부분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전의 마지막 사례이자, 가장 비극적인 사례 중 하나는 파시스트가 공화국에 맞서는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발생한 1936~1939년의 스페인 혁명이다)
내가 논증하고자 하는 바는, 만약 볼셰비키 혁명이 이러한 혁명적 시도들에 대해 긍정적 조건이었다고 한다면, 볼셰비키 혁명은 그 시도들이 실패하게 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을 주목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새로운 혁명들은 실패했는데, 왜냐하면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했기 때문이며,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을 죽이려는 시도들을 이겨내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먼저 한 가지 측면을 살펴보면, 반혁명이 세계적 무대에서 조직되었으며, 여기저기에서 혁명이 벌어지리라 예상하면서, 이를 견뎌내거나 분쇄하기 위해 힘을 모았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예상치 못한 혁명이라는] 기습 효과는 없었다. 이것은 음모론이 아니다. 이는 자본주의의 사회적 모순들이 ‘보통의’ 수단으로는 처치 곤란한 지점에 다다랐다는 생각을 지배계급(자본주의 부르주아 계급, 제국주의·식민주의 열강)이 이제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의 증거다. 또한 이는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이 지역적 현상(예를 들어, 전쟁 전 러시아의 낡은 제국체제가 낳은 산물)이 아니라 (어쨌든 당시 세계에는 러시아와 맞먹는 체제가 많이 있었다), 사실상 세계혁명을 예고하거나, 지정학적 문제를 드러낸다는 생각을 공유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는 다른 한 가지 측면을 검토하도록 이끈다. 즉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은 그것을 반복하거나 복제하려는 시도를 낳았다는 점에서 [다른 혁명들에 영향을 미치는] 부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앞에서 내가 지적했듯, 볼셰비키(그리고 다른 나라의 동지들, 즉 독일의 스파르타쿠스단, 1919~1920년 토리노 봉기에 참여한 로르딘 누오보(L’Ordine Nuovo, 신질서)에 속한 이탈리아 사회주의자[그람시 그룹] 등등)는 공산주의 혁명이 자본주의 착취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이자, 정치권력의 신경중추들을 목표물로 삼을 때만 의미가 있다고 확신했다. 이는 볼셰비키의 승리를 보장했던 전략과 조직형태들, 특히 당 또는 ‘당 형태’의 구조를 모방하려는 강력한 동기였다. 제2인터내셔널에서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모델’의 지위를 점했던 것처럼, 사실상 그 이상으로, 소련 공산주의는 코민테른 내에서, 그리고 코민테른을 넘어서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민족적, 사회적 차이에 따라 (지배계급이든 피착취계급이든) 계급들은 매우 상이한 역사와 경제적 기반에 처하게 되는데, 이러한 민족적, 사회적 차이는 운동의 통일성과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만약 무시되지 않았다면, 상대화되었고, ‘구체적 분석’에 기초하여 [볼셰비키와 다른] 대안을 발명하려는 시도는 모델로부터의 일탈로 인식되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예외는 중국에 대한 마오의 전략인데, 나는 나중에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제약은 ‘계급 대 계급’ 노선과 ‘인민전선’ 노선이라는 두 극 사이에서 진동하기 시작했던 코민테른(후에는 각국 공산당)의 연쇄적인 ‘전략들’에 압력을 가했다. ‘세계혁명’이라는 관념이 정밀하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을 때, 그 관념은, 세력들을 [각국에 맞는] 특정한 방식으로 축적함으로써 (이는 그람시가 ‘진지전’으로 부르게 되는 것의 일부분이다), 각 국가에서 혁명을 반드시 재창조해야만 한다는 관념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다른 요인들을 도입해야만 한다. 다른 요인들은 이처럼 추상적이며, 사실 여전히 너무 단순한 설명방식을 비틀어 버린다. 첫 번째는 파시즘의 발전이다. 두 번째는 소련이 그 자신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와 방위전략을 갖는 ‘주권’(sovereign) 국가로 변형된 것이다.
파시즘(특히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후 가장 중요한 세력이 된 나치즘)은 분명히 ‘순수한’ 형태의 반혁명 정치를 표상한다. 그러나 파시즘은 그 자신이 ‘혁명적’ 전술을 활용한 [반혁명적 정치]형태였고, 따라서 파시즘은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체제들이 통제할 수 없었고 (심지어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체제들이 공산주의보다는 파시즘과의 ‘타협’을 선호할 때도 그러했다), 나아가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체제에 파시즘은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위협이 되었다. ‘자유 군단’이나 준군사조직인 ‘동맹’ 등등의 형태를 취했던 파시즘(특히 유럽의 파시즘)은 그 자체가 전쟁의 산물이며, [전쟁에서] 민족적으로 패배하고 반혁명적 광풍이 불었던 지역에서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파시즘의 중추는 인종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이며, 특히 (1929년) 거대한 경제 위기의 맥락에서 자신의 대중운동을 모으는 데 성공한다. 혁명 이후의 공산주의는 파시즘의 모습에서 치명적인 적대자를 발견할 것이며, 러시아 내전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과 생사를 건 대립을 [내전보다] 더 큰 규모로 벌일 것이다. 그러나 그 대립은 이제 세 유형의 정치 체제(자유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간의 삼각 갈등이라는 모습을 취하고, 민족국가(와 국민군)의 형태로 서로 싸우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극적인 결과를 낳았는데, 그중 일부는 혁명의식의 바로 그 핵심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는 특히 ‘사회주의 조국’이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또는 없는 체하면서), 또는 ‘반파시스트 동맹’이 실패했다는 이유로 파시즘과의 ‘전술적’ 동맹을 선택할 때마다 그러했다. 프랑스가 소련과의 협정을 거부하고, 히틀러와 프랑스, 영국 사이에 뮌헨 협정이 체결된 이후, 독일-소련 간의 협정이 맺어졌다. 이 협정은 공산주의 투사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또한 이는 공산주의가 민주주의 세력으로서의 권위를 잃게 했으며, 비민주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한 가지 종류로서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모두 속하게 되는] ‘전체주의’라는 정의를 예비했다. 이는 1945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냉전의 틀 속에서 단지 부분적으로만 상쇄되었다. 1920년대 초 ‘세계혁명’의 실패가 20세기의 첫 번째 비극이었다면, 반파시즘 전략에서 나타난 [파시즘과의] 타협은 두 번째 비극이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두 비극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이율배반적인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하나는, 수백만 명에 이르는 소비에트 군인의 희생, 혁명의 자손들, 그리고 사회주의 계획화에 따른 군수산업이 없었다면, 유럽에서 나치즘에 맞서 민주주의가 승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와 나치즘, 둘 다 자국 주민에게 테러와 극단주의 정책을 가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번째 ‘과잉결정 요인’, 즉 스탈린 치하에서 소련이 ‘주권’ 국가화되면서 나타나는 효과가 개입한다.
나는 주권(sovereignty)이야말로 국제주의 혁명이 민족국가로 변형된 것을 (그리고 점점 더, 제국주의적 요소를 지니게 된 것을) 분석하는 데 있어 핵심 범주라고 믿는다. 충분한 여유를 갖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상의 핵심부에 존재하는 형이상학적이고 정치적인 딜레마로 되돌아가는 게 필요할 것이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법보다 상위에 존재하는 계급권력’이라고 정의했고 (따라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보다도 상위에 존재한다), ‘평화적 수단과 폭력적 수단’의 결합을 통한 사회의 변형을 추구했다. 물론 여기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사상은 ‘주권자 없는 주권’, 즉 주권을 유일하게 보유하는 주권자는 곧 혁명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이며, 또한 이는 계급 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역사적 과정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이 실제로는 권력의 행사에서 빈 공간을 낳았다. 이러한 빈 공간은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채워’지거나 점유될 수 있었는데, 그러한 방식 중 일부는 사실상 반혁명적이었고, 또는 ‘혁명당’이 그 대립물인 지배장치로 변형되는 것이었다. 근본적으로, 이것이 바로 스탈린 시대(와 그 이후)에 소련(그리고 더 나아가 공산주의 운동)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혁명의 최후 단계에, 레닌의 죽음 전후로, 공산당은 정치적 주도권을 ‘독점’했고, 순식간에 이는 혁명의 민주적 성격과 양립할 수 없게 되었고, 달리 말하면, 혁명에서 나타난 다양한 양상의 행위자들을 결합하는 ‘종합’을 붕괴시켰다. 다음 단계에서, 주권의 논리가 더 심화됨에 따라, 당은 자신의 위계제와 지배에 네 겹의 예속을 부과했다. [첫째] 군사권력은 정치권력에 종속되었다. (이는 ‘인민위원’을 통해 이루어졌고, 정치권력은 대조국전쟁에서도 여전히 결정적인 힘을 발휘했다) [둘째] 경제권력은 공장 내 당 기구와 계획당국(고스플란)에 종속되었다. [셋째] 사법권력은 ‘사회의 적들’을 규정하는 국가에 종속되었다. 부르주아는 범죄와 정치적 반대를 구별하는데, 사회의 적들에 대한 규정은 이러한 구별을 제거했다. (그에 따라 집단수용소 제도가 창출되었다) [넷째] 정신적 권력은 국가 철학(‘변증법적 유물론’)의 형성을 통해 정부에 종속되었고, 국가철학은 모든 지적 활동의 공식적 코드가 되었다. 이러한 종속은 소련이라는 국가가 다른 인민들에게도 혁명의 중심이자 아성이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심화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커다란 역설이 있다. 즉, 소련 국가 내부의 ‘주권적 기능’이 (자본주의의 폐지가 명확한 목표였고, 지도자와 간부들이 혁명적 봉기의 주인공이었던) 공산당에 의해 행사되었다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소련 안팎의 수백만 노동자와 투사는 그 국가 그 자체가 혁명의 도구이며, 자본주의와 파시즘과의 이중적 대결이라는 조건에서 혁명은 그 자신의 대립물[국가]도 포함할 필요가 있는 ‘영구적인’ 과정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는 역설 말이다.
과거에 스페인의 공산주의 지도자였던 페르난도 클라우딘(Fernando Claudin)은 여전히 귀중한 성찰의 수단으로 남아있는 그의 탁월한 저서 『코민테른에서 코민포름까지,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History of the Communist Movement from Comintern to Cominform, 1970년 스페인어로 출판)에서 정당하게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했다. 즉 디미트로프와 톨리아티가 이끌던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는 파멸적인 ‘계급 대 계급’ 전략을 파기하고 ‘인민전선’ 혹은 반파시즘 민주동맹 전략을 지지했다. 하지만 심지어 7차 대회 이후에도, 코민테른의 전략들은 스탈린이 규정한 소련의 국가이익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었고 (즉,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는 노동운동의 이익에 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소련의 국가이익은 코민테른 전략들의 한계와 진동을 좌우했다. 당연하게도, 클라우딘은 스페인 혁명(1936~1939)의 과정에서 이러한 종속이 미친 영향에 특히 관심을 두었다. 스페인 혁명은 2차 세계전쟁 이전 유럽에서, 1917년 러시아의 봉기에서 나타난 특징이었던, 무장한 민주적 운동과 정치조직 간의 일종의 ‘종합’이 다시 나타났던 아마도 유일한 계기였을 것이며, 모든 측면에서 거대한 장애물에 직면하고 있었다. 소련은 무기(와 정치위원)를 보내고, 국제여단을 조직하는 것을 돕기는 했으나, 서유럽의 세력 균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조심했고 (그리고 소련은 2차 세계전쟁이 끝날 무렵 그리스에서 다시금, 훨씬 더 명확하게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 이는 파시즘(그리고 행위자로서 나치즘)의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 이와 같은 사태의 전개과정에서, 또한 그는 7차 대회가 다른 대회들보다 더 혁신적이기는 하지만 (왜냐하면 7차 대회의 노선은 1930년대 자본주의의 거대한 위기에 따라 나타난 노동계급의 ‘독창성’에 의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유럽 중심적’이었다고 강조한다. 이에 따라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도, 저서의 마지막 절을 바로 중국의 ‘마오주의’ 혁명에 할애한다. 그것은 볼셰비키 혁명을 반복하려는 도식과 효과적으로 결별하고, 혁명운동이 소련의 국가이익으로부터 사실상의 독립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한 (또는 심지어 소련의 국가이익과 모순을 빚기도 한) 유일한 사례다. 마오주의 혁명은 세계적인 수준에서 사회적·정치적 세력분포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작동하고 있다. 나도 이 점에 대해 몇 가지 언급하며 이 절을 마치고 싶지만, 이를 위해서는 혁명의 흔적이라는 문제의 ‘원점’으로 잠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1917년 봉기가 앞으로도 계속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면서, 또한 (이것이 더욱 중요한데,) 소비에트 형태의 사회주의가 (집단적 상상이라는 측면에서) 공산주의 사상과 연결된 근본적 해방의 열망과 직접적으로 모순을 빚었다는 것이 사실로 나타나자, 우리가 혁명 속에서 혁명(revolution in revolution)을 달성하려는 시도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는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이 두 가지는 다양하게 조합될 수 있다. 즉 [첫째] 현존하는 혁명이 전도되거나, 배신을 당하거나, 혹은 단지 ‘얼어붙어’ 버렸으므로, 본래의 이상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현존 혁명 모델을 되살리기 위한] 내적 혁명을 해야 한다. 아니면 [둘째] 새로운 혁명은 전략과 정의(definition)라는 측면에서 현존 모델과 단절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내전과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반제국주의 전쟁을 결합했던 ‘대장정’ 이후, 1949년에 승리를 거둔 중국혁명이 두 번째 길의 골자를 잘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마오주의자’로 불리는)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찬미자와 지지자의 눈에는 그것이 결국 첫 번째 길의 의미를 구체화한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중국혁명은 그것이 대체하기를 원했던 바로 그 모델[러시아혁명]의 몇 가지 핵심적인 특성과 다방면의 관습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복잡성을 추적하려면, 우선 10월 혁명, 바로 그 과정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지금까지 나는 10월 혁명은 연쇄적인 계기들로 구성된 사건이며, 하나의 계기가 반드시 그다음의 계기에 이른다는 필연성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국가 혹은 ‘프롤레타리아’ 국가로 나아가는 하나의 단일한 경향이 존재했다는 생각을 따랐다. 나는 이러한 표상에, 혁명적 과정의 분기가 (가상적으로라도) 일어날 가능성을 포함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상 적어도 한 가지 분기가 실제로 일어났다. 비록 그 결과가 즉각적으로 인지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것은 바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개최하여 1920년 바쿠에서 열린 동방인민대회의 의미였다. 여기에는 28개국(아시아가 아닌 나라도 있었다)의 대표단이 참가했는데, 당시 내전은 승리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내가 시사하고자 하는 바는, 이 대회가 볼셰비키 혁명을 복제하려던 유럽의 혁명들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유토피아적인 방식으로) ‘상쇄’하고, (넓은 의미에서) 피식민지 인민의 특수한 이해를 고려하면서 동양으로의 혁명의 이전을 기대했다는 점이다. 이는 ‘세계혁명’ 개념이,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혁명운동이 확장되는 국제적 과정이라는 개념으로 전환될 때 나타난 하나의 중요한 양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환의 결과는 즉각 나타나지 않았고, [사실 즉각적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중국에서는 혁명과정이 피로 물든 실패로 시작했는데, 이는 중국공산당이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라 국민당과 동맹을 맺었다가, 나중에 국민당의 헤게모니에 맞서 도시에서 봉기한 노동자들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에 부분적으로 기인했다. (이 사건은 말로(Malraux)의 유명한 소설 『인간의 조건』(La condition humaine)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 후 일본의 침략이 뒤따랐는데, 마오쩌둥은 본질적으로 소농에 의한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역사적 괴물(monster)을 창안하기 위해서 이러한 파국을 움켜잡았다. 마오의 혁명은 의심할 여지 없이 공산주의적이고, 이는 ‘공산주의 체제’의 수립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이 혁명은 비록 시간성이나 주역이라는 측면에서는 완전히 다르지만, 대중의 참여와 당의 지도력을 연합한다는 측면에서는 10월 혁명이 보인 ‘종합’이라는 특성을 재현한다. 그러나 중국혁명은 비록, ‘프롤레타리아적’ 용어법을 유지하지만 (중국혁명은 그 모델이라는 측면에서 [러시아혁명과] 분기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이러한 분기는 성공으로 판명되었다), 자신이 공식적으로는 1917년의 흔적과 ‘레닌주의’라는 틀 속에 있다고 보았다), 어떠한 유의미한 물질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분명히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아니다. 이것은 역사에서 기표(記標)들의 자율적 힘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며, 특히 그 기표들이 [사회가] 비가역적으로 변형되는 과정들에 대한 기억을 통합하고 있다면 그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 역사에서 ‘문화혁명’이라고 알려진 훗날의 사건에서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이라는 자격[즉 기표]이 중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 그 이름이 사회 세력이나 계급의 존재와는 별로 관련이 없을 것이다. (소련의 계획적 산업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공장에서 청년 노동자들이 ‘생산되고’, 그들이 학생들과 함께 ‘홍위병’ 운동에서 적극적 역할을 할 것이지만 말이다) 사실상,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은 이제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적 형성물을 지칭하게 되는데, 이는 급진적 평등주의 요소뿐만 아니라 허무주의적이고 반지성주의적인 요소를 담고 있었다. 이는 국가와 당의 전문가라는 ‘새로운 계급’이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등장했기 때문인데, 그들을 프롤레타리아라고 지칭할 수 없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중국혁명은 1917년 혁명 모델을 이율배반적으로 실현하는데, 이는 그 모델에 예측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치고, 그 핵심적 측면들에서 1917년 혁명 모델과 모순된다. 이러한 핵심적 측면들은 ‘공산주의 사상’이 이제 완전히 다른 ‘세계’ 속에 자리를 잡게 된다는 사실과 관련을 맺는다. 즉 이 다른 세계는 대체로 유럽의 역사에서 영향을 받은 정치적 언어를 계속 사용하지만, 더 이상 유럽 중심적이지 않다. 나아가 이러한 위대한 역사적 ‘전환’(디페시 차크라바르티의 말에 따르면, 유럽의 지방화)이, 세계화된 세계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특징으로서 등장하기 이전에, 공산주의에서 (그리고 그것의 쌍둥이 개념인 ‘사회주의’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이는 오늘의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따라서 1917년 혁명)의 흔적을 지녔으며, 공산주의가 없이는 오늘의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도 없고 이론적으로 정의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시사할 것이다.
거꾸로 뒤집힌 이행
결론이라는 겉모습을 취하면서(사실은 추가적인 논의를 위한 시작일 뿐이다), 나는 1917년의 사건과 그 흔적을 또 다른 시간성 속에, 즉 세계화의 현재 추세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시간성 속에서 다루고 싶다. 나는 앞서 인용한 리타 디 레오의 책(『세속적 실험』)에서 ‘거꾸로 뒤집힌 이행’이라는 공식을 빌려오되, 그 해석을 변형하고자 시도한다. 디 레오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그리고 그 복귀(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라는 두 가지 연쇄적 이행을 논한다. 이는 역사의 순환이라는 표상과 양립할 수 있으며 (이러한 표상은 ‘혁명’이라는 범주의 의미론에 매우 깊이 뿌리박고 있다[revolution은 회전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 그러한 표상은 [순환의] 도착점이 (영원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앞으로도 오랫동안, 근본적으로 바로 자본주의라는 생각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1989년 이후 자본주의로 복귀했던 사회주의 체제들의 운명을 묘사하는 것은 간편하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들은 어떤 종류의 자본주의로 ‘복귀’했는가, 따라서 오늘 우리는 어떤 종류의 자본주의에서 살고 (노동하고, 생각하고) 있느냐는 문제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는 20세기의 혁명과 반혁명 과정이 끼친 영향을 (부정적일지라도) 반드시 포함하고 있다. 사실 내 작업의 가설은, 상당히도 (어느 정도인지는 내가 측정하고 개념화해야 하지만), 오늘의 세계 자본주의는 사회주의 이후의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사회주의 이후의 자본주의는, 그 자본주의가 결국 제거하고 세계시장 속으로 삼키는 데 성공했던 바로 그 대립적인 체제[사회주의 체제]가 가한 영향을 받음으로써, 아마도 여전히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나오는 표현대로, 그 대립적 체제의] 유령이 출몰할 것이며, 내부적인 모순에 직면할 것이다.
나는 이것이 ‘사회주의 이후’의 시대에서 (종종 ‘신자유주의’가 승리를 거둔 시대로 묘사되기도 한다), 정치적 상상력의 조건을 명확히 밝히기 위해 우리가 수행해야만 할 결정적 논의라고 제안한다. 지배적인 서사에 따르면, 공산주의 혁명들(1917년, 1949년, 그 외 혁명들)은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거나, 파괴되었다. 그러한 서사는 종종 ‘2단계’ 시나리오로 제시되기도 한다. 먼저 [1단계에서] 공산주의 혁명들은 (특히 후기 제국주의라는 지정학적 맥락에서 권위주의 국가가 됨으로써) 반혁명적 체제들이 되었고, [2단계에서] 그 반혁명 체제들은 다른 국가들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전복되었다. (여기서도 다시금 중국이라는 예외에 주목할 수 있다) 따라서 완전한 과정은 [공산주의 혁명의] 자기 파괴와, 자본주의와 그 담지자들과의 대치에서 발생한 패배의 결합일 것이다. 이러한 서사에서 내가 특히 놀란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반대자들도 이런 서사를 쉽게 채택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제 1917년 ‘세계를 바꾸려’ 했던 ‘공산주의적 시도’를 역사의 망각으로부터 부활시켜야 할 이상적인 모델로 보거나, 아니면 급진적인 대안이 요구되는 반면교사로 본다. 물론 이 양자를 매개하는 해법도 존재하는데, 전형적인 해법은 1917년 레닌의 결정적 개입을 통해 작동한 ‘종합’이 실제로는 완성되지 않았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것이다. (최근 들어 이는 대체로 [당의 기능을 위해 소비에트의 기능을 희생시키는 방식보다는] 오히려 소비에트의 ‘자율적이고’ ‘반권위주의적’인 기능을 위해 당의 ‘이론적’이고 ‘중앙집중적’ 기능을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제안된다) 이에 따라 두 가지 대립적인 표어가 제기된다. 즉 지젝이 제시한 베케트풍의 명령(“다시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는 비관적인 부조리극을 남겼다] 아니면, 네그리가 포스트 산업시대에 맞게 번안한 프란치스코식 이상(“새로운 공유자원(commons)을 창조하자”). [프란치스코파는 작음과 청빈을 추구하는 가톨릭교회의 수도공동체로, 기독교적 공산주의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표어들 중 어느 것도 불합리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역사적 사회주의’의 모순적 효과들을 조사함으로써, 하나의 다른 길을 찾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데, 역사적 사회주의는 공산주의 혁명의 충격과 흔적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논의에서 열쇠가 20세기 자본주의 역사의 두 가지 중심적인 측면이라고 믿는데,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은 사회주의와의 대립을 무시하고서는 다룰 수 없다. 그러한 측면들은 디 레오와 다른 저자들이 명확히 지적했다. 첫 번째는 러시아혁명이 자본주의 사회들의 ‘정치적 구성’에 대해, 특히 ‘선진’ 국가들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의 형태와 결과에 미친 완곡한 효과와 관련이 있다. 이는 [선진국이] 절대적인 불안전에 대비하여 노동보호(복지정책과 공공서비스)를 수용했다는 사실로부터, 순수하게 시장에 의존하는 노동관계와 경쟁하면서 ‘간접임금’이 상당히 발전했다는 사실(따라서 임금노동 형태 그 자체가 상당히 변형되었다는 사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두 번째는 20세기 사회주의가 (권위주의적이긴 하지만) 급진적인 경제계획 형태를 실제로 실행했고, 이를 위한 공식적인 수단 중 일부를 발명했으며, 이러한 수단들은 자본주의에 의해 국가의 경제정책이라는 변형된 형태로 사용될 수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두 가지 현상[즉, 선진국에서, 한편으로는, 정치적 구성에 변화가 나타나 노동보호와 간접임금이 도입되는 과정과,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정책의 형태로 경제계획이 도입되는 과정]이 서로 만나 혼합되었던 결정적인 순간(아마도 또 다른 카이로스)은, 우연이 아니라, 바로 1929년[대불황]이었다. 이때 자본주의는 순수한 자유주의 경제에서 발생하는 민족적, 국제적 위기를 피하기 위해 국가의 규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파시즘이 부상하고 있었으며, (비록 갈등이 있긴 했지만) 공산주의와 많든 적든 조직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계급투쟁의 수위가 고조되어(프랑스의 사례처럼 특히 여러 총파업이 벌어졌다) 노동권을 인정하도록 강제하고 있었다. 또한 이는 반파시즘 민주전선을 창조할 필요성을 의미하기도 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마르크스’로서 케인스는 두 가지 필요성을 모두 인정했고, 시장과 국가정책의 새로운 결합을 이어나가기 위한 방법을 고안했다. 이는 동시에 공산주의의 위협을 ‘중화’시키고 공산주의가 낳은 결과를 활용하는 것이기도 했다. 자본주의가 이러한 역사적 타협을 극복하는 데는 50년이 걸렸는데, 이는 특히 자본주의적 생산을 ‘탈지역화’, ‘탈영토화’함으로써, 그리고 탈식민화 과정을 통해서 착취를 위해 ‘해방’된 빈곤한 노동자 대중을 [자본주의적 생산에] 편입함으로써 가능했다. 오늘날 우리는 레닌, 스탈린, 마오, 히틀러, 케인스나 루스벨트의 세계가 아니라 하이에크의 세계에 살고 있다. 하이에크에게 소련의 계획경제, 뉴딜과 사회복지정책, 나치의 ‘전쟁경제’는 진정한 자유주의로부터의 이탈이며, ‘농노제로 가는 길’에서 서로 대체될 수 있는 사례들이다. 그러나 탈규제와 금융화의 최근 형태들이 ‘순수한’ 시장경제(또는 보편적 상품화)라는 새로운 사건으로 이어지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사회주의적 역전, 따라서 아마도 공산주의적 대안은 여전히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들과 통치형태들의 망과 서로 얽혀있다. 아마도 20세기에 보여준 형태들에 못지않게 폭력적인 형태들을 취하는 그것들이[즉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와 통치형태가], 어떻게 혁명적인 정치를 발생시킬 수 있는지는 가까운 미래에 가시화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