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의 역사
이번 호는 1990년대 이후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의 역사를 다루는 글을 함께 싣는다. 여기에 중국혁명을 다루는 글도 담겨 있으므로, 이번 호는 ‘운동사’ 특집인 셈이다.
먼저, 지난 호에 「2023년 노동조합운동 전망과 과제」라는 제목으로 실었던 좌담에서 토론했던 주제 중에서 두 가지를 ‘쟁점분석’으로 기획했다. 첫째는 정지현의 「민주노총 선거연합정당의 문제점」이다. 이 글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쟁점으로 떠오른 정치방침·선거방침을 다룬다. 민주노총 위원장이 제시한 내년 총선방침은 기존 진보정당들 외부에 가설정당(‘페이퍼 정당’)을 결성해서 공동으로 선출한 비례·지역후보를 선거에 내고, 선거 후 당선자가 원하면 원래 정당으로 되돌아가자는 안이다. 그리고 정치방침은 이러한 성과를 기반으로 하여 장차 진보대통합정당을 건설하자는 안이다. 필자는 민주노동당 분당 이래 진보정당이 분열하게 된 역사적 원인이 무엇인지,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에 대해 각 정치세력이 공유·합의하지 못하는 한 어떤 선거공학적 접근법도 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진보정당의 역사를 되돌아보는데, 민주노동당에서 나타난 파행과 분열, 통합진보당 부정경선과 폭력사태, 2010년대 진보정당들의 야권연대 흐름을 꼼꼼히 짚는다. 그리고 이로부터 거대 정파의 패권주의와 비민주성, 북한·북핵에 관한 편향적 인식, 민주당에 대한 추종적 태도를 반성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명확한 결론을 도출한다.
둘째는 오기형의 「노조법 2·3조 개정안 분석」이다. 자본의 관점을 대변하는 경제6단체는 노조법이 개정되면, 불법파업을 합법화함으로써 파업이 상시화되고 원청이 수백 곳의 하청노조와 교섭을 해야 하며 그에 따라 산업생태계가 붕괴한다는 식으로 공포를 불러일으키려 한다. 하지만, 필자는 실제로 노조법이 개정된다면 자본이 스스로 기정사실인 듯 말했던 것처럼 선뜻 모든 파업을 인정하고 하청노조의 어떤 단체교섭 요구에도 당사자로 나올 것인지 질문한다. 필자는 경영계의 주장이 침소봉대라면서, 제출된 노조법 개정안은 노동시장의 급격한 변화를 반영하여, 법 규범과 법 현실의 괴리를 메우는 최소한의 개정만을 담고 있다고 진단한다. 필자는 이를 매우 치밀하게 논증하는 한편, 노조법 개정에 대비하여 노동조합이 반드시 준비해야 할 과제도 덧붙인다. 마지막으로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각각 제시하는 ‘입법폭주’ 대 ‘입법방해’ 프레임이 충돌하여 법 개정이 무산되는 가장 나쁜 상황을 막기 위해 어떤 투쟁과 선동을 어떤 시기에 어떤 순서로 집중할 것인지에 대해 지금보다 더 세심하고 신중한 접근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세초점’으로는 이유미의 「민주당식 국제정세 인식 비판」을 담았다. 3월과 5월 한일정상회담과 4월 한미정상회담을 두고 민주당은 거친 비판을 쏟아냈다. 민주당은 현 정부가 미일에 치우쳐 북중러와 관계를 악화시켰고, ‘3자 변제안’은 대법원 판결 취지와 어긋나며, 워싱턴선언이 나토식 핵공유 미치지 못해 성과가 없고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 있는 길을 닫아서 문제라고 비판했다. 필자는 이러한 주장을 각각 비판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대하는 것이 국익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무력에 의한 영토·주권 침해에 반대하는 당연히 해야 할 책무를 망각하는 것이다. 3자 변제안이 대법원 판결 취지와 어긋난다면 문재인 정부가 제시했던 1+1안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이 워싱턴선언을 비판하는 맥락은 나토처럼 전술핵을 배치하거나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직결되는데, 이것이 민주당의 공식 당론인가. 필자는 사회운동이 ‘반미 진영론’에 입각해 민주당식 국제정세 인식을 추종한다면,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침략을 물리치고, 중국의 대만 침공 위협을 저지하며, 한반도 비핵화를 요구하는 평화운동과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지상중계’로는 문설희의 「인구감소·저성장 시대, 변화를 주도하는 사회운동으로 거듭나자」를 싣는다. 이 글에는 공공회원모임이 4월에 개최한 워크숍에서 발표한 분석과 주장이 담겼다. 필자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시쿰의 이론을 통해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생산관계에 적합한 제도로서 가족이 역사적으로 변화한 과정을 살핀다. 인구감소라는 불가피한 현실은 곧 자본주의도 외연적 성장을 지속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했다는 의미이므로, 대안적 생산양식과 가족제도의 변혁을 상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공공부문 노동운동은 인구감소와 저성장을 객관적 현실로 인식하면서, 청년·여성 미래세대를 고려한 적합한 요구를 제시해야 한다고 마무리한다.
이번 ‘사회주의 역사 읽기’는 중국에 초점을 맞춘다. 작년 가을호부터 올해 봄호까지는 러시아를 다뤘는데, 파이지스의 『속삭이는 사회』와 피츠패트릭의 『러시아혁명 1917~1938』을 소개하고, 발리바르의 「한 세기가 지난 1917년 10월」을 번역했다. 이아림의 「환상을 버리고 마오와 중국혁명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마이스너의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1999년, 3판)을 읽으며 중국혁명의 쟁점을 선별한다. 분량이 많아 두 번에 나눠 실을 것인데, 이번 글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부터 문화혁명 전야까지 시기를 다룬다. 필자는 다섯 가지 쟁점으로 △ 중국혁명의 농민적 기원과 인민주의라는 문제, △ 왜 신민주주의는 조기종결되었는가, △ 신민주주의 조기종식의 후과는 어떠했나, △ 왜 쌍백운동은 반우파투쟁으로 역전되었나, △ 대약진운동은 왜 실패했는가라는 문제를 뽑았다. 필자는 신민주주의 폐기가 소련에서 신경제정책이 조기에 종식된 효과와 유사한 결과를 낳았다고 진단한다.
크리스텐센, 델만의 「마오쩌둥과 상하이 학파의 과도기 사회론」(1981)은 마오쩌둥과 상하이 학파가 발전시킨 과도기 사회론을 검토하고, 소련의 체계이론(‘사회주의 생산양식론’)과 비교한다. 저자들은 상하이 학파가 1976년에 남긴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최후 원고는 과도기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단지 과거의 잔존 요소로 남아 있는 게 아니라, 사회주의의 사회경제적 과정을 통해 재생산된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중요한 성취를 이뤘다고 평가한다. 국유부문을 보더라도 개별회계 기업 간 상대적 독립성이 존재하며, 따라서 기업 간 관계는 개별 소유자 간 관계가 되고, 따라서 국유부문 생산조차 사적 생산이 된다. 나아가 사회주의 사회의 상품유통은 자본유통으로 변형될 수 있고, 노동력은 다시 상품이 되고 화폐는 자본으로 변형된다. 이렇게 되면 가치법칙이 사회주의 경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역자는 소련에서도 이미 1950년대 말부터 스탈린의 도그마를 깨고 사회주의에서의 상품·화폐관계/가치법칙에 관한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는 사실에 따라, 상하이 학파의 이론이 순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즉 소련에서도 △ 상품·화폐관계/가치법칙이 존재하는지, △ 존재한다면 왜 존재하는지, △ 상품·화폐관계/가치법칙을 적극 활용해야 하는지, 점진적으로 지양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논쟁이 이미 벌어졌다. 기업이 분리되어 있으므로 상품생산이 존재한다는 ‘기업 분리성론’도 이미 1960년대 초반에 등장했다. 따라서 문제는 (독창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분석으로부터 사회주의 이행에 관한 어떤 실천적 결론을 도출할 것이냐에 있다. 바로 여기서 저자들은 마오와 상하이 학파의 최후 입장에 결정적 약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마오와 상하이 학파는 한 번도 자본주의에 대한 명확하고 일관성 있는 정의를 내린 적 없고, 소련은 자본주의로 묘사하고 중국은 그래도 사회주의라고 규정할 만큼 양자 간 어떤 중대한 차이가 있는지 설명한 적 없으며,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잉여가치 생산을 지양하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 제시한 바 없다. 이렇게 본다면, 문화혁명과 탈권투쟁은 이론 없는 실천, 즉 무엇을 공격해야 할지 모른 채 돌진한 맹목적 행동주의로 해석할 수 있다.
사회운동사 ‘1987년 이후 한국 노동자운동의 역사②’로 박준형의 「IMF 구제금융 시기, 노동운동의 대응」을 싣는다. 이번 글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협약이 체결된 1997년 말부터 대략 2003년에 이른 시기를 다룬다. △ 1998년 2월 노사정 협약, △ 1998-9년 총파업 선언과 유보, 노사정위원회 참가와 탈퇴, △ 현대차, 만도기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저지 투쟁, △ 공공부문 구조조정·민영화 저지 투쟁, 사회공공성운동, △ 주 5일제 도입, △ 비정규직 투쟁(금속, 공공, 화물연대)과 같이 우리 노동운동사의 굵직한 쟁점들을 검토한다. 각각의 쟁점에 관한 평가를 관통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마지막 소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며 경제는 점차 위기로부터 회복의 길을 가지만 노동자 간 임금격차는 빠르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는 IMF 시기 노동운동이 조직노동자의 고용을 방어하는 데 치중하고, 위기가 완화되자 기업수준에서 임금을 회복하는 데 주력한 결과였다. IMF 시기 노동운동이 취한 선택은 현재에 이르는 노동운동 노선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책 소개’는 노동운동사를 재검토할 때 참고한 두 책을 골랐다. 고은영의 「87년 체제의 그림자」는 요코다 노부코의 『한국 노동시장의 해부: 도시 하층과 비정규직 노동의 역사』를 소개한다. 필자는 대기업 내부노동시장의 형성은 오히려 특수하고 예외적이며, 방대한 주변 노동시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고, 기업별 노동조합에 포괄하기 어려운 주변 노동자의 경우, ‘초기업적 교섭’을 매개로 한 전략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이경호의 「노동자 연대의 사회적 기반은 존재하는가」는 유형근의 『분절된 노동, 변형된 계급: 울산 대공장 노동자의 생애와 노동운동』을 소개한다. 울산은 핵심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수직적으로 통합하여 공존하는 공업도시로, 위계적인 기업 관계는 고용관계의 계층화, 지역노동시장의 분절화를 낳았는데, 지역 노동운동도 그에 따라 분절화되었다. 하지만 이는 자동적인 결과가 아니었고, 노동운동의 전략적 선택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했다. 필자는 어느 대기업 노동조합이라도 울산과 비슷한 경로를 밟아가기 쉽지만 이러한 흐름을 바꾸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존재했고, 앞으로도 적극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운동사를 다루는 글은 모두 무거울 수밖에 없는데, 현재 우리 운동이 무거운 과제를 안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질문과 토론 제안을 기대한다.
2023년 6월 9일
임필수
임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