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과 상하이 학파의 과도기 사회론
번역: 임지섭 정책교육국장
역자 해설
이 글은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미국 대학원생과 소장 교수가 1968년 설립한 ‘참여 아시아 학자 위원회’(Committee of Concerned Asian Scholars, CCAS)의 소식지 《Bulletin of Concerned Asian Scholars》 13권 2호(1981)에 실린 글이다. 이 위원회의 일부 구성원은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평등주의적 대안으로 중국의 마오주의와 문화혁명에 주목했으며,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의 저자인 모리스 마이스너가 이 위원회의 초기 회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이 글의 저자인 크리스텐센과 델만은 문화대혁명을 이해하기 위해 그 배후에 있는 이론, 특히 마오쩌둥과 상하이 학파가 제시한 과도기 사회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상하이 학파는 푸단대학(复旦大学) 경제연구소의 경제학자 집단을 일컫는데, 이들은 린뱌오(林彪)가 몰락한 1971년 이후 이른바 문화혁명 ‘사인방’, 특히 장춘차오(張春橋)·야오원위안(姚文元)과 함께 소련 『정치경제학 교과서』의 대안으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을 집필했다.
중국 문화혁명 시기의 이론 평가는 문화혁명 평가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중국 문화혁명은 스탈린주의와 현실 사회주의의 모순을 지양하려는 이론적 실천이었나? 아니면 수많은 혼란만을 낳은 10년간의 동란이었나? 해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에 담긴 이론의 의미와 한계에 대한 평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크리스텐센과 델만에 따르면,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으로 집약되는 마오와 사인방, 상하이 학파의 이행기 사회론은 소련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하면서도 스탈린의 ‘체계이론’에서 벗어난 비판적 이론이었다. 또한 사회주의 사회로서 중국의 성격과 구조에 관한 새로운 통찰에 도달할 수 있는 이론이었다.
‘체계이론’은 소련에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유일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제시된 스탈린의 사회주의 생산양식론을 말한다. 이는 사회주의를 이행기가 아니라 독자적인 객관적 법칙을 갖는 생산양식으로 정의한다. 그 핵심에는 생산수단의 국유화로 인해 사회주의에는 적대적 계급투쟁이 존재하지 않으며, 남은 과제는 생산력을 발전시켜 노동 인민의 욕구를 충족하는 것일 뿐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있다. 스탈린이 집필에 참여하고 최종 승인한 소련의 『정치경제학 교과서』(이하 『교과서』)는 이러한 ‘체계이론’을 다루는, 가장 권위 있는 저작이었다.
마오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스탈린의 ‘체계이론’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계급생성이론’을 발전시켰다. (이 시기 마오의 주요 문헌인 「소련 정치경제학 교과서에 대한 주석」은 사회진보연대가 번역한 번역본을 참고할 수 있다.) 마오의 ‘체계이론’ 비판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마오는 사회주의가 독자적인 생산양식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과도기적 사회형태이며, 사회주의 사회에도 여전히 사회모순과 계급모순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둘째, 사회주의 사회에 새로운 부르주아적 요소와 부르주아 계급이 생성될 수 있으며, 이들과의 계급투쟁을 적절히 수행하지 못하면 사회주의 사회는 다시 자본주의 사회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장춘차오·야오원위안과 상하이 학파는 이러한 마오의 ‘계급생성이론’과 문화혁명 경험을 바탕으로 소련 『교과서』를 대체하는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을 집필하고자 했다. 특히 이들은 문화혁명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부활’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 그리고 이를 실현하는 주체로서 ‘새로운 부르주아’는 어떻게 생성될 수 있는지를 이론적으로 해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저자들도 평가하는 것처럼,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첫 원고에 해당하는 1972년 원고는 내용에 있어서 소련 『교과서』와 본질적으로 동일했다. 무엇보다 원고는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의 핵심을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폐지로 보았으며, 계획에 따른 사회주의 생산은 더 이상 사적 생산이 아니라 직접적 사회적 생산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본다면, 사회주의 사회에 여전히 상품 교환과 가치법칙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해, 원고는 사회주의 사회에 국가 소유와 집단 소유라는 두 가지 형태의 소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스탈린의 분석을 그대로 따랐다. 즉, 국가 소유 부문 내의 교환은 더는 상품 교환이 아니라 생산물 교환이지만, 그 외의 부문에서 이루어지는 교환은 상품 교환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생산물도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이는 명백한 오류다. 마르크스에게 직접적 사회적 노동은 그것이 실현되기 위해 가치형태를 사용할 필요가 없는 노동이다. 만약 중국과 소련에서 생산물의 분배가 상품 교환이라는 형태를 취해야 한다면, 이는 중국과 소련의 생산양식이 사적 생산을 직접적 사회적 생산으로 변혁하지 못했다는 것과 다름없다. 베틀렘은 소련의 생산양식을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했다. 즉, “국가적 소유의 외피 속에서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 존재하는 착취관계와 유사한 착취관계가 존재하며 다만 그 관계의 존재형태가 독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사회진보연대가 번역한 베틀렘의 『소련에서의 계급투쟁』 서문을 참고할 수 있다.)
한편, 원고는 마오의 관점을 따라 ‘당내의 주자파’와 ‘관료독점자본가’가 중국에서 자본주의를 부활시킬 수 있는 ‘새로운 부르주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고는 정작 이러한 새로운 부르주아가 출현하거나 자본주의적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증명하지 못하며, 단지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적 영향이나 당과 기업에서의 주도력을 지적할 뿐이었다. 이는 결국 중국공산당 내부의 ‘주자파’가 중국에서 자본주의의 부활을 추동할 수 있으므로, 당내에서 투쟁을 통해 이들을 숙청해야 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불과했다.
이어서 저자들은 1972년 원고가 마오와 사인방의 지침에 따라 여러 차례 개정되는 과정을 상세히 추적한다. 그 결과, 최종 원고에 해당하는 1976년 원고는 첫째, 사회주의는 독자적 생산양식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요소와 공산주의적 요소가 경합하는 과도기 사회이며, 둘째, 사회주의 사회에서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이 출현하는 물질적 기초는 생산관계의 불완전한 변형이라는 측면에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원고는 셋째, 중국에서 자본주의 부활을 막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부르주아 권리’를 제한하는 끊임없는 문화혁명이 필요하다는, 이른바 ‘계속혁명론’을 제기했다.
저자들은 이러한 최종적 이론이 어떻게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부활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관해 나름대로 일관된 분석을 제시했다고 평가한다. 이에 따르면, 첫 원고와 달리 최종 원고는 사회주의 상품생산 문제에 대해, 사회주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교환은 상품교환이며 그 성격이 자본주의에서의 상품교환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회주의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고 재생산되는 자본주의적 요소인 상품화폐관계, 임노동관계, 가치법칙, 분업을 중국에서 자본주의가 부활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로 지적함으로써, 스탈린의 사회주의론과 단절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사회주의 상품생산 문제에 대한 상하이 학파의 논의는 스탈린 사후 소련에서 이어진 가치법칙 논쟁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소련에서는 1950년대 말부터 스탈린의 상품화폐론을 비판하는 다양한 논쟁이 제기되었다. 처음에는 국유부문에 상품생산이 존재하는 원인을 놓고, 비국유부문의 상품생산이 국유부문에도 전파된다는 ‘전파설’과 아직 노동의 직접적 사회적 성격이 미성숙하기 때문이라는 ‘노동설’이 경합했다. 그러다 1960년대 초에 이르면, 사회주의에서 사적 소유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생산단위(기업)가 사회적 분업에 기초하는 분리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상품생산이 존재한다는 ‘기업의 분리성론’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비추어볼 때,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1976년 최종 원고에 담긴 상하이 학파의 사회주의 상품화폐론은 국유부문에서의 교환을 생산물교환이 아니라 상품교환으로 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회주의에서의 생산이 직접적 사회적 생산과 가치창출 생산의 결합이라는 모순적 주장을 유지했다. 이러한 주장 역시 소련에서 앞서 이어졌던 논쟁의 한 축으로 존재했다.
한편, 가치법칙 논쟁에는 단순한 이론적 함의를 넘어 사회주의 경제에 대한 여러 실천적 경향의 분화를 일으키는, 더 깊은 함의가 있었다. 즉, 사회주의 사회에 상품생산과 가치법칙이 존재한다면, 이를 제약하고 소멸시켜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국민경제의 발전에 활용해야 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다. 소련에서 이러한 논쟁은 정책개혁 논의로 수렴되어, 기업과 계획경제 관리기구, 가격결정 방식에 대한 개혁으로 이어졌다.
중국에서 이러한 논쟁은 크리스텐센과 델만이 간략히 소개하는 것처럼, 가치법칙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시장사회주의론과 마오의 계급생성이론으로 분화되었다. 시장사회주의론자들과 달리, 마오는 사회주의에서 가격과 가치법칙의 역할을 제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혁명파와 상하이 학파 역시 마오의 관점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의 사회주의 경제가 자본주의로 복귀하지 않으려면 내부의 어떤 구조가 바뀌어야 하는지 여전히 제시하지 못했다. 이들은 단지 새로운 부르주아가 당과 기업에서 주도력을 갖지 못하게 하고, 지식노동자가 육체노동에 참여하도록 강제하는 방식으로 분업을 폐지하고, 성과급과 노동에 따른 분배라는 원칙을 점차 폐지하며, 생산을 사용가치 기준에 따라 계획해 가치법칙의 영향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최종 원고에서도 해명되지 않은 핵심 문제가 상하이 학파의 과도기 사회론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가로막는다.
또한 문화혁명파와 상하이 학파는 중국공산당이 새로운 부르주아의 주요한 온상이라고 지적하면서도, 바로 그 중국공산당을 자본주의 부활을 막기 위한 구체적 조치를 수행할 행위자로 여겼다. 저자들 역시 ‘문화혁명의 주체’가 결국 (새로운 부르주아의 온상이라는) ‘당’이 되었다는 역설을 제기한다. 이는 문화혁명파가 주도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 작업이 본질적으로 당내 반대파와의 이데올로기 투쟁을 위한 수단이라는 측면도 있음을 시사한다. 그 과정에서 마오와 문화혁명파의 이론은 중국공산당 내에서 ‘주자파’와의 분파 투쟁으로 나타났다. 이는 진지한 정치 논쟁보다는 류사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린뱌오 등 반대파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과 숙청으로 이어졌다.
이는 중국 문화혁명에 대한 발리바르와 레비 그리고 마이스너의 비판과 직결된다. 발리바르는 「마오: 스탈린주의의 내재적 비판?」(1986)에서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을 구별하면서, 대약진운동 시기와 달리 문화혁명 시기 마오에게는 ‘조반유리’(造反有理, 모든 반항과 반란에는 나름대로 정당한 도리와 이유가 있다)라는 구호 외에 정치노선이나 이론이 없었다고 지적한다. 마오는 스탈린의 사회주의 생산양식론을 비판하면서, 사회주의는 계급모순이 존재하는 이행기라고 올바르게 주장했다. 그러나 여전히 스탈린을 따라 소유제 개조를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핵심으로 보았고, 사회주의 내에 상품화폐관계와 가치법칙이 존재하는 문제를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발리바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스탈린주의에 대한 ‘내재적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다음 호에 실릴 예정인 레비의 “Mao, Marx, Political Economy and the Chinese Revolution: Good Questions, Poor Answers”도 같은 문제를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마오주의적 문제의식은 스탈린적 사회주의 생산양식 개념과 단절하고 사회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모순을 올바르게 지적했지만, 이를 대체하는 대안적 제도를 구성하고 발전시키지 못했기에 ‘훌륭한 질문과 서투른 대답’이다.
그 결과 마오와 문화혁명파는 대중적 기반을 잃기 시작했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관료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마이스너는 마오와 문화혁명파가 제시한 문화혁명 개념이 사실상 ‘당·국가의 억압적 독재’였다고 평가한다. 즉, 이들이 마르크스의 『고타강령비판』의 다른 것은 모두 무시하고 ‘부르주아 권리’ 개념만을 인용해 이것이 중국의 불평등과 당내의 수정주의 경향을 낳는 물질적 기반이며 이를 제거하기 위해 강력하고 중앙집권적인 국가권력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마르크스주의를 기괴하게 왜곡한 변종이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윤소영 교수는 『한국사회성격 논쟁 세미나(Ⅲ)』(2022)에서 문화혁명은 우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중심인 ‘주자파’와의 이데올로기 투쟁이었으며, 그런 맥락에서 1956~1957년 쌍백운동의 반전으로서 1957년 반우파투쟁이 부활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크리스텐센과 델만의 이 글을 통해 문화혁명에는 이론적 근거가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레닌은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운동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바로 이것이 중국의 문화혁명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중국의 문화혁명에는 혁명적 이론이 있었는가? 이 글을 통해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에 담긴 마오와 문화혁명파의 이행기 사회론을 살펴보며, 그러한 질문에 대해 진지한 대답을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 () 안은 원문의 설명이며, [] 안은 역자가 추가한 설명이다. 굵게 처리된 부분은 모두 원문에서 기울임체로 강조된 부분이다.
* 독자의 편의를 위해, 원문에 영문으로 표기된 중국어 저작은 필요한 경우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 독자의 편의를 위해, 원문에 영문으로 표기된 중국어 저작은 필요한 경우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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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976년 10월 중국에서 일어난 쿠데타[마오쩌둥 사후 그의 공식 후계자인 화궈펑(华国锋)이 문화혁명 사인방을 체포한 사건을 말한다]는 서방 세계 대부분을 놀라게 했다. 몇 달 사이에 중국의 정치권력 관계는 가장 최근의 역사처럼 역전된 것처럼 보였다. 서방의 여론은 중국의 설명에 놀라고 이 사건의 급작스러움과 결말로 인해 혼란에 빠진 가운데, 승리한 공모자들이 제시한 쿠데타의 이유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단지 권력자가 제시한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설명을 (마찬가지로 낡은 설명 역시) 즉각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문제가 있다. 마오쩌둥과 ‘사인방’이 사회주의 경제와 사회주의 체제를 ‘사보타주’하고 그 ‘기반을 파괴’했다는 등의 비난이 있는 현재 상황에서, 혹자는 문화대혁명을 끝내는 것이 단지 법적 정의(legal justice)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실질적인 증거를 발견한다.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부의 파벌 사이에는 진정한 정치·이론적 모순이 확실히 존재했고, 이는 반복되는 권력투쟁의 토대를 형성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전히 문화대혁명 10년을 연구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마오쩌둥이나 ‘사인방’이 저질렀을 어떠한 실수나 범죄에 ‘면죄부’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 격동의 10년을 좀 더 냉철하고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위함이다.
이 점에서 문화대혁명의 배후에 있는 이론들을, 실제로 이루어졌던 정책 입안을 분석하는 기초로서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 우리는 1949~1976년 사이 중국공산당의 급진파, 특히 마오쩌둥과 상하이 학파가 발전시킨 과도기 사회론의 개요를 제시하고자 한다. 상하이 학파는 (장춘차오나 야오원위안과 같은)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의 급진파와 협력했던 상하이의 경제학자와 정치학자를 말한다.
이들의 과도기 사회론은 소련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하면서도 그에 대해 비판적인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으로 제시되었다. 이들의 이론은 최종적으로는 샤를 베틀렘과 로사나 로산다와 같은 유럽의 신좌파 인사들이 전파한 당대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거의 비슷했다. 이러한 중국의 이론이 가진 흥미로운 특징 중 하나는, 스탈린주의의 교조주의와 소련 마르크스주의의 구속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고 사회주의 사회로서 중국의 성격과 구조에 대한 새로운 통찰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글은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1부에서는 1940년대와 1950년대 초반 소련에서 스탈린의 후원을 받아 개발된 후 중국에 수출된 ‘체계이론’(system theory)을 제시한다. 2부에서는 본론에서 잠시 벗어나,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 중국 시장사회주의 이론의 발전을 짧게 소개한다. 3부에서는 마오쩌둥의 ‘계급생성이론’(generative class theory)의 발전을 추적한다. 4부에서는 1970년대 초중반에 발전한, 이른바 상하이 학파의 이론을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은 중국 외부에서는 처음으로 발표되는 것이다. 마지막 5부에서는 이 이론의 적용 가능성뿐만 아니라 이론의 내적 모순과 명백한 한계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한다.
‘체계이론’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은 1950년대 초까지는 중국에 널리 소개되지 못했다가, 1949년 중국이 해방된 이후 소련이 수행한 경제·정치 원조의 상부구조 일부분으로서 소련 ‘체계이론’이라는 형태로 중국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체계이론’은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유일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제시되었고, 소련의 정치경제학 교범, 특히 1954년에 출판된 『정치경제학 교과서』(Political Economy; A Textbook)로 상술되었다.
이 책이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 중국 경제학자들은 이미 스탈린의 소책자 「소련에서 사회주의의 경제문제」(Economic Problems of Socialism in the USSR, 1952)를 통해 ‘체계이론’의 본질과 사상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었는데, 이 소책자는 저명한 소련 경제학자인 『교과서』의 저자들에게 지침을 주려는 의도로 작성된 것이었다. 『교과서』는 스탈린이 집필에 참여하고 최종 승인했기 때문에, ‘체계이론’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저작이 됐다. 체계이론은 2판과 3판에도 등장했지만, 그 이론적 내용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3판의 공식 번역본이 등장했던 1959년 이전에, 중국에서 『교과서』가 어느 정도 사용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마오쩌둥이 3판의 번역본에 강한 관심을 가졌고, 번역본이 출간된 직후 그의 ‘독서 노트’에서 『교과서』를 비판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체계이론’의 사상과 개념 대부분은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고전적 저술, 스탈린, 그리고 다양한 소비에트 경제학자에게서 나왔다. 그들은 이전에도 잘 알려져 있었지만, ‘체계이론’은 현존하는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을 일관성 있는 독립체이자 과학적인 체계로 제시하려는 첫 시도였다. 『교과서』는 원시공산주의부터 아직 실현되지 않은 공산주의에 이르기까지 알려진 모든 생산양식을 다루는 장으로 나뉘었다. 그 목적은 스탈린의 다소 개략적인 테제와 개념을 상세히 설명하고, 사회 진화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제시하며, 역사의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교과서』의 한 가지 기본 개념은, 사회의 발전은 질적으로 다른 두 범주의 객관적 법칙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법칙의 한 범주는 알려진 모든 생산양식에서 작동하는 일반적 법칙으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이 법칙은 생산관계(스탈린은 이를 소유제, 생산 내부의 상호관계, 분배체계로 구성된다고 정의했다)가 변함없이, 거의 자동적으로 새로운 경제적 규칙에 적응하고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을 따르도록 결정한다. 다른 범주의 법칙은 모든 생산양식이 아니라 하나 또는 일부의 생산양식에서만 작동하는 특수한 법칙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에서의 가치법칙이 있는데, 이는 상품생산의 기본 법칙이다.
『교과서』는 사회주의를 독자적인 객관적 법칙을 갖는, 독립적이고 비교적 안정적인 사회형태로 정의한다. 그 핵심에는 ‘사회주의 기본법칙’(fundamental law of socialism)이 있다. 이는 사회주의 생산을, 자본주의 생산처럼 이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날로 증가하는 노동 인민의 물질적·문화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으로 규정한다.
이 ‘기본법칙’을 중심으로 상호연관된 일련의 비(非)기본법칙이 존재한다. 이는 모두 ‘기본법칙’에 종속되어 있고, 기본법칙의 요구를 수행하는 역할을 한다. 가장 중요한 ‘비기본법칙’은 다음과 같다. ① 경제와 생산의 다양한 부문 간의 적절한 관계를 보장하는, 계획 및 균형 발전의 법칙. ② 물질 생산의 지속적이고 신속한 발전을 보장하는, 노동생산성의 지속적인 상승이 있을 것으로 규정하는 법칙. ③ 모든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적 노력에 상응하는 소득을 얻도록 보장하는, 노동에 따른 분배법칙. ④ 생산물이 그 가치에 따라 등가교환 되는 것을 보장하는, 가치법칙(이는 자본주의에서는 ‘기본법칙’이다).
이러한 법칙은 객관적이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정의된다. 이들 법칙은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다. 또한 이들 법칙은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성립된 뒤 점차 영향력을 미치는 범위를 넓히고, 동시에 이전 생산양식의 특수한 법칙들을 대체한다.
『교과서』는 사회주의에서도 상품 생산과 유통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가치법칙도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스탈린의 주장을 따른다. 그러나 사회주의에서 가치법칙은 공적 소유와 사회주의 계획에 의해 통제되어, 결과적으로 규제 기능만 갖는 ‘정화된 형태’로 작동한다고 강조한다. 사회주의는 독립적인 사회형태로 여겨지지만, 자본주의 경제에 필수적인 것으로 알려진 화폐, 상품, 가치 등과 같은 범주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론적으로 그러한 범주는 사회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객관적 법칙의 구체적인 표현과 징후로 인정되지만, [『교과서』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내용이 없는 ‘정화된 형태’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교과서』에 따르면, 이러한 법칙이 올바르게 이해되고 적용되기만 한다면 사회주의 생산은 원활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 사회는 끊임없이 증가하는 인민의 물질적,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킬 것이다. 따라서 정치경제학자들은 합리적인 경제정책의 기초를 제공하기 위해, 객관적 법칙을 식별하고 연구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
‘체계이론’은 논리적으로 일관되고 과학적인 사회주의 이론으로 제시되지만, 이론의 분석적 잠재력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경향이 있는 일련의 명백한 자기모순과 미해결된 이론적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몇 가지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 첫째, ‘체계이론’은 객관적 법칙을 정치경제학의 대상 중 하나로 정의한다. 그러나 『교과서』를 읽어보면, 이러한 모든 법칙은 소련의 실제 사회 문제, 관계, 모순을 분석하여 도출된 것이 아니라 사전에 정의된 것이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따라서 이 방법은 동어반복이 되는 경향이 있으며,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기계론적으로 만든다.
● 둘째, [‘체계이론’의] 이론적 복합물 전체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그리고 다양한 러시아 경제학자의 글에서 따온 단편적인 구절들을 그 원문의 맥락과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합친 것이다. 스탈린과 저자들의 분명한 의도는 [자신들의] 선입견에 따른 사회주의의 이론을 실증하고, ‘진정한’ ‘과학적’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른 사상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의도는 단지 경제정책의 뜻을 풀이하고 가혹한 사회 현실을 미화하기 위함이었다.
● 셋째, ‘체계이론’은 새로운 법칙을 발견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폐쇄적인 사고 체계다. 이는 『교과서』의 이른바 변증법적 분석 방법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 넷째,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에서 아주 주요했던 비판적 차원은 ‘체계이론’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교과서』는 정치경제학을 사회주의 사회의 성격과 구조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한 과학이 아니라, 경제정책 입안을 정당화하는 데 필요한 과학으로 축소했다.
● 마지막으로, ‘체계이론’은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의 과학이라고 일컬어졌다. ‘체계이론’은 공산당과 그 지도자들이 수행한 모든 것이 ‘노동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생산수단의 국유화로 인해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 사회의 주인이 되었다는 가정에 바탕을 두었다. 나아가, 노동자에 대한 지속적인 착취의 기반을 형성할 사적 소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계급투쟁은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분명한 의도는 생산관계 내에 존재하지 않는 사회적 조화를 이데올로기화하려는 것이었다. 소련의 생산관계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스탈린 치하에서 이루어진 반대파에 대한 폭력적인 탄압이 이를 증명한다. 생산관계를 이데올로기화함으로써, ‘체계이론’은 마르크스의 원래 이론과 같은 계급투쟁의 비판 이론과 도구가 되지 못했다.
‘체계이론’의 정치경제학은 1955년 창간된 중국의 경제지 《경제연구》에 실린 여러 글의 주제였다. 그러나 대부분 글은 그중 특정한 주제, 주로 사회주의에서 객관적 법칙에 대한 문제에 집중했다. 『교과서』 3판의 번역본이 1959년에 등장하기 전까지 ‘체계이론’은 공식적으로 그 전체가 제시된 적은 없었다. 중국식 ‘체계이론’은 기본적으로 소련의 원안과 같았지만, 전혀 다른 사회적·역사적 맥락에서 적용되어야 했다. 따라서 ‘체계이론’은 금세 천윈이나 쉐무차오 같은 시장사회주의자의 반대와, 당시 자신의 독자적인 이론적 강령을 개발하기 시작하고 있었던 마오쩌둥의 반대에 부딪혔다.
시장사회주의 이론
우리는 여기서 시장사회주의라는 주제에 대해 길게 설명하기보다는, 가장 중요한 시장사회주의자인 천윈과 쉐무차오의 이론적 기반을 간략하게 소개할 것이다. 이들에게 ‘체계이론’이 풀지 못한 핵심 문제는 사회주의에서 가치법칙의 기능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가치법칙이 사회주의 경제에서 시장을 발전시키고 통제하는 데 독립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가치법칙은 단지 규제 기능만 수행하며 계획경제에 의해 통제된다는 ‘체계이론’의 사상을 비판했다.
천윈과 쉐무차오는 계획경제의 많은 부문이 가치법칙에 의해 통제되는 시장경제, 즉 근본적으로 공급-수요 메커니즘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계획경제를 지배하는 법칙과 시장경제를 지배하는 법칙의 질적 차이와, 그에 따른 두 법칙 사이의 모순을 인정했다. 그렇더라도 이들은 시장경제가 계획경제에서 나타나는 과도한 집중화, 계획기구의 관료화, 전반적인 균형을 형성할 때 발생하는 비효율성, 원료와 노동력의 광범위한 낭비와 같은 일부 병폐를 여전히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병폐는 모두 소련의 계획 원리와 ‘체계이론’에 기초한 1차 5개년계획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였다.
중국의 시장사회주의 이론은 주로 유고슬라비아의 경험을 비롯하여, 다양한 사례에서 영감을 받았고, 또한 당시 동유럽 국가에서 벌어진 경제 개혁에 대한 논쟁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마오쩌둥의 ‘계급생성이론’
마오쩌둥은 가장 급진적인 ‘체계이론’ 비판자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중반 사이에 그는 ‘체계이론’과 시장사회주의 이론에 반대하면서, 정치경제학의 여러 측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발전시켰다. 마오의 ‘계급생성이론’(사회주의 경제를 물질적 토대로 하는 사회주의 사회 내에서 새로운 계급의 성장에 관한 이론)의 공식화는 의심할 여지 없이 사회주의 이론에 대한 그의 가장 중요한 공헌이었다.
‘계급생성이론’은 적어도 세 단계(1958년 이전, 1958~1961년, 1961년 이후)를 거쳐 길고 다소 복잡한 발전의 결과로 1960년대 중반에 제시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상하이 학파의 이론에 대한 중국의 이론적, 개념적 배경을 제공하기 위해, 이 발전 과정의 요점을 간략하게 요약할 것이다.
[첫 번째 단계인] 1958년 이전에 마오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기여는, 소유제가 개조된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계급투쟁은 지속되며, 생산관계를 변혁하는 것이 사회적 생산력의 광범위한 발전(즉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데 필요한 전제 조건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나아가 마오는 ‘체계이론’에서 배제되었던 수정주의 개념을 되살렸고, 이를 사회주의 사회 자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공산당 내부의 부르주아적 경향으로 간주했다. 마오는 수정주의 주창자들이 “자본주의 체제의 부활을 꿈꾼다”라고 말했다.
두 번째 단계[1958~61년]에 마오는 소련의 이론을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위에서 언급한 스탈린의 소책자[「소련에서 사회주의의 경제문제」]에 대한 두 차례(1958년과 1959년)에 걸친 비판과 1960년 ‘독서 노트’에서, 마오는 일련의 새로운 사상을 제시했다. 이 세 글은 모두 소련 문헌에 대한 비판이었기 때문에 일관된 이론적 저작으로 제시된 것은 아니었다. 그 글들은 사회주의 사회의 성격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은 마오가 개략적인 논평과 비판적인 주석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 작업에서 마오는 사회주의가 독자적인 생산양식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났다. 그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과도기적 사회형태라는 것을 발견했다. (객관적 법칙이 올바르게 해석되고 적용된다면) 사회주의는 조화롭고 평화로운 발전이라는 특징을 나타낸다는 ‘체계이론’의 주장과 달리, 사회주의는 그런 특징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마오는 사회주의가 경제적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모순,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하게는 생산관계 그 자체 내에서의 모순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따라서 마오는 여전히 사회모순과 계급모순이 사회발전과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여겼다.
마오는 객관적 법칙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결국 그것들은 인간이 만든 것일 뿐이며 ‘체계이론’의 주창자들처럼 스스로 그러한 법칙의 노예가 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마오는 그가 반복적으로 강조한 생산력에 대한 생산관계의 우위라는 관점에서, 훨씬 더 의지주의적인 접근법을 선호했다. 마오는 생산력의 주요한 발전은 항상 생산관계의 변화 뒤에 온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 생산관계를 끊임없이 변혁하는 과정은 소유제, 생산 내부의 상호관계, 사회적 생산물의 분배체계라는 세 가지 측면을 모두 동시에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그 과정의 방향은 다음과 같다. [소유제는] 사적 소유에서 집단적 소유와 국가 소유를 거쳐 마지막으로 전체 인민의 소유로 이어진다. [생산 내부의 상호관계는] 일인경영에서 당위원회의 통제와 다른 형태의 민주적 경영으로 이어진다. [사회적 생산물의 분배체계는] 개인적 소비에서 집단적 소비로 이어지고, 노동에 따른 분배에서 필요에 따른 분배로 이어진다.
마오는 생산관계의 세 가지 측면을 모두 동시에 변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함으로써, ‘체계이론’에 내재한 진화론적이고 기계론적인 신념을 버리고 대신 사회주의의 혁명적 잠재력을 강조했다. 이러한 접근법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나타났다. 첫째, 마오는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확인한 가치법칙의 내재적 논리와 암묵적인 사회적 결과를 회피하려는 의식적인 시도로서 1958년 대약진운동을 보았다. 대약진은 경제적 측면에서는 그것에 든 비용을 정당화하지 못했지만, 정치적 측면에서 생산의 새로운 요구를 충족하는 데 필요했다. 둘째, 생산관계를 끊임없이 변혁하는 미완의 과정은, 경제가 급격히 앞으로 나아가고 끊임없이 불균형에 시달리도록 하는 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마오는 균형적이고 비례적인 발전을 객관적 법칙으로 간주하는 ‘체계이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은 단지 정치적 명령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결과적으로, 발전은 파도와 같아서, 약진 이후에는 새로운 약진이 뒤따를 때까지 정체, 심지어 어쩌면 퇴행이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마오는 계획이 결코 언제나 균형 발전과 수요공급 사이의 올바른 조정을 확보할 수 있는 메타역사적(meta-historic)인 것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계획의 역할은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지만, 이는 일시적으로만 가능하다. 계획은 학습의 과정이며, 계획은 오직 약진, 불균등, 불균형이 발생할 때마다 이를 학습해야만 완벽해질 수 있다. 따라서 계획이 경제적 토대에 속한다는 ‘체계이론’의 주장과 달리, 계획은 의식의 한 형태로서 상부구조에 속한다.
사회주의 사회에 가치법칙과 상품경제가 존재하는 문제에 대해, 마오는 기본적으로 스탈린의 관점에 동의했다. 그러나 마오는 단순히 생산수단이 국유기업에서 생산되고 국유부문 내에서 이전된다는 이유로 상품이 아니라는 스탈린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마오는 집단 소유와 국가 소유라는 두 가지 소유제가 있는 한, 생산수단은 여전히 상품으로서 교환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상품생산을 최종적으로 폐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생산력 발전의 필수적 단계를 감안하여) 생산의 모든 영역에서 전 인민에 의한 소유로의 전환, 상품 교환에서 생산물의 교환으로의 전환, 그리고 가치의 교환에서 사용가치의 교환으로의 전환을 수행하는 것뿐이다.
세 번째 단계[1961년 이후]에서 마오는 다시 중국의 내부 문제, 특히 계급투쟁의 성격에 초점을 맞췄다. 이로부터 결국 마오는 1964~65년 무렵에 ‘계급생성이론’을 공식화했다. 이 과정은 마오의 용어 발전을 통해 추적할 수 있지만, 우선 전제 조건부터 정리해 보자. 1950년대 중반에 마오는 과거와 같은 격동적인 계급투쟁은 끝났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동시에 마오는 부르주아 계급은 여전히 존재하며,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모순이 상당 기간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계급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으며, 심지어 상호 적대적인 계급과 정치집단 사이의 폭력적인 충돌 상태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런 투쟁이 현재는 사회화된 구래의 부르주아에서 비롯되는지 아니면 사회주의 사회 내에서 생성된 새로운 부르주아에서 비롯되는지에 관한 질문을 제기했다. 마오는 이 점에 관해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독서노트’에서 마오는 사회주의 사회에 ‘기득권 집단’과 ‘보수적 계층’이 존재하며, 이들은 자신의 기득권과 특권을 보호하기 위해 사회발전의 새로운 단계마다 영향력을 행사하여 발전을 굳히고 더 이상의 변화를 막으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론적 관찰에 기초하여, 마오는 1961~64/5년 사이에 이루어진 중국의 실제 발전과 자신의 이론을 결합하여 새로운 통찰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1962년 초, 마오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은 주어진 사회적 틀 안에서 생성된 ‘새로운 부르주아적 요소’와 마주하고 있으며, 이러한 요소가 공산당 내에서도 발견되므로 당 내부에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1962년 8월, 마오는 계급투쟁이 새로운 비(非)사회주의 세력, 즉 새로운 부르주아적 요소와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사람’을 목표로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마오는 처음으로 ‘주자파’[走資派]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그는 또한 만약 이러한 주자파가 정책을 입안하도록 허용된다면, 중국의 색깔이 바뀌어 수정주의자 또는 심지어 파시스트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1962년 말, 마오는 ‘사회주의 역사시대를 위한 당의 기본노선’이라는 글에서 계급투쟁을 지속하는 정책을 주창했는데, 이는 앞서 제시한 이론적 개념을 요약한 것에 불과했다.
1961~65년 사이에 마오는 몇 번이고 특권에 대한 지도부의 욕망을 비판하는 한편, 지도자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시도를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 모든 점은 소련에서 ‘자본주의 부활’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고 사회주의 사회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새로운 특권층의 물질적 토대를 밝히고자 시도한 「흐루쇼프의 거짓 공산주의와 그 역사적, 세계적 교훈에 대하여」(1964)에서 요약되고 더 정교해졌다. 이 분석은 주로 외교 정책상의 이유로 이루어졌으며, 마오가 이러한 분석적 접근법을 중국에 상세하게 적용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마오는 분명히 중국에서도 비슷하게 [자본주의] 부활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는 중국의 사회계층에 새로운 계급(특히 ‘새로운 부르주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공산당 내의 권력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들은 1964년 12월 말에 자본주의 정책의 주창자로 여겨졌고 ‘자본주의 길을 걷는 공산당 내부의 권력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렇게 마오는 자신의 ‘계급생성이론’에 대한 기본적인 분석 개념을 공식화했다.
1967년 5월에 마오는 ‘주자파’ 문제에 대해 한층 더 나아가 비판했다. 그는 주자파가 민주주의 혁명과 함께 멈춘 케케묵은 혁명가라고 말했다. 그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원하지 않았고 따라서 자본주의 정책을 선전했다. 공산당을 새로운 부르주아가 생성되는 전체 사회적 과정의 결절점으로 간주하고 끊임없는 계급투쟁의 필요성을 지적함으로써, 마오는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향후 중국에서 벌어질 정치투쟁에 대한 지침을 제시했다. 마오는 새로운 부르주아의 존재를 계급으로 직접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계층’이나 ‘요소’ 등으로만 인정했기 때문에, 그의 ‘계급생성론’은 기껏해야 사회학 이론에 불과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분명히, 마오는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계급과 계급투쟁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이론과 결합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오는 1976년 ‘지침’(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겠다)을 발표하면서, 특히 그의 마지막 10년간 장춘차오나 야오원위안 같은 새로운 문화혁명 이론가들과 협력하면서, 새로운 이해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상하이 학파와 ‘사회주의 정치경제학’
문화대혁명에서 발생했던 수많은 격동의 사건과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개혁 이후에, 이러한 현실의 경험으로부터 이론적 결론을 도출하고 이를 이론적 틀로 구성할 수 있는 정리 작업이 이루어져야 했다. 가장 급진적인 문화혁명 개혁이 사실상 중단된 1967년과 그 이후, 중국공산당 내 ‘문화혁명파’는 문화대혁명의 이론적 관점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했다.
1970년부터 1976년까지(특히 린뱌오가 몰락한 1971년 이후), 사회주의에 대한 포괄적이고 독립적인 중국식 이론을 개발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는 문화대혁명의 경험과 중국 사회의 성격 및 구조에 대한 마오의 해석을 바탕으로 작성한 교범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이었다. 이 작업은 주로 상하이 출신의 경제학자 집단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그들 중 다수는 푸단대학의 경제연구소와 관련이 있었다. (우리는 이 집단을 ‘상하이 학파’로 칭할 것이다) 이 교범을 작성한 목적은 중국공산당 내 ‘문화혁명파’가 선전하는 실제 정책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기초를 요약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었다.
‘상하이 학파’와 ‘문화혁명파’ 사이 관계의 정확한 성격을 알지는 못하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은 이 작업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맡았다. 특히 장춘차오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인방과 상하이 학파는 1976년 10월 체포된 뒤 ‘장춘차오 사상’을 찬양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최종판은 결국 나오지 못했다. 1976년 10월 6일 쿠데타로 출판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책은 압수되었고 1년 후에는 “‘사인방’의 반혁명 기획에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선고받았다. 우리는 아래에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 최종판의 이론적 내용에 대한 개요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 책을 쓰는 과정은 많은 단계와 국면을 거쳤고, 이론에 대한 수정과 발전을 지속적이고 철저하게 시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 과정에서 쓰인 다른 원고들에 대해서도 설명하고자 한다.
중국에서 중요한 정치적 사안에 대한 논의와 결정은 비공개로 이뤄지는 것이 일반적 규칙이다.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사안에 대한 해법과 문서는 대중에게 제시되지 않는다. 아주 혼란스러운 문화대혁명 시기를 제외하면, 이러한 절차는 1949년 이래로 중국 정치 생활의 주요 양식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이 중국공산당 내의 ‘문화혁명파’ 정책 입안자들에게 상당히 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절차는 지켜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원고에 대해 의견을 말할 기회를 주고 따라서 이론의 끊임없는 개선에 기여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원고가 제한된 부수나마 출판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이론에 대해 비교적 개방적인 토론을 할 수 있는 풍부한 기회가 있었다.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은 1971년부터 1976년까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매우 철저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에 있던 원래의 자기모순은 점차 해결되었고, 최종판은 포괄적이고 일관된 이론을 제시하였다. 이 이론은 중국 사회에 존재하는 계급모순의 사회적 토대를 분석한다. 위에서 언급한 소련의 ‘체계이론’과는 달리, 이 이론은 중국의 사회 구조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수 없었다. 그것은 ‘비판’ 이론이었다.
- 시작점
중국 경제학자들은 1970년대에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교범을 쓸 때 소련의 『교과서』와 1961년 상하이에서 작성된 교범뿐만 아니라 마오의 사회주의 개념 역시 참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문화대혁명 기간에 이루어진 실제 계급투쟁의 경험뿐만 아니라 소련에서 ‘자본주의의 부활’로 여겨졌던 것에 대한 비판을 통합함으로써 마오의 사회주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교범은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했다.
중국 경제학자들은 1970년대에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교범을 쓸 때 소련의 『교과서』와 1961년 상하이에서 작성된 교범뿐만 아니라 마오의 사회주의 개념 역시 참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문화대혁명 기간에 이루어진 실제 계급투쟁의 경험뿐만 아니라 소련에서 ‘자본주의의 부활’로 여겨졌던 것에 대한 비판을 통합함으로써 마오의 사회주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교범은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했다.
● 소련은 어떻게 자본주의로 돌아가게 되었는가?
● 중국도 자본주의로 돌아갈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그러할 수 있으며, 어떻게 이를 막을 수 있는가?
● 중국에서 언젠가는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찬탈할 수 있는 부르주아가 생성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 부르주아는 어떤 모습일 것인가? 그리고 이 부르주아가 자본주의적 발전을 시작하고 촉진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상하이 학파가 정교화한 이론의 발전에 관해 설명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여러 원고에서 나타나는, 스탈린주의 ‘체계이론’에 대한 비판의 단계를 나타내는 요소들을 강조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그 원고들이 위에 언급된 질문들에 어떻게 답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여러 원고에서 나타나는 질문들에 대한 답이 점차 ‘체계이론’의 도그마와 공식을 깨뜨리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과 원고에 대한 전체적이고 완전한 그림을 제시하기보다는 주요한 이론적 발전만을 서술하고자 한다.
- 첫 번째 원고
1971년부터 1976년까지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다섯 가지 판본이 작성되었다. 실제 작업은 1971년 6월 장춘차오가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을 쓰기 위한 계획을 승인하면서 시작되었다. 첫 번째 원고는 1972년 9월에 발표되었다. 이 원고에 따르면, 사회주의의 주요 특징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폐지다.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와 다른, 일관성 있는 사회 체계다. 사회주의 체계는 그 체계 내에 있는 다양한 요소의 성격을 결정하며, 따라서 이러한 요소는 자본주의에서 그것에 대응하는 요소와 선험적으로 다르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다섯 가지 판본이 작성되었다. 실제 작업은 1971년 6월 장춘차오가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을 쓰기 위한 계획을 승인하면서 시작되었다. 첫 번째 원고는 1972년 9월에 발표되었다. 이 원고에 따르면, 사회주의의 주요 특징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폐지다.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와 다른, 일관성 있는 사회 체계다. 사회주의 체계는 그 체계 내에 있는 다양한 요소의 성격을 결정하며, 따라서 이러한 요소는 자본주의에서 그것에 대응하는 요소와 선험적으로 다르다.
원고는 사회주의 개념을 설명할 때 중국을 예로 들었다. 이에 따르면, 중국은 사회주의 개념이 구체적으로 현실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는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이론이 중국 사회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또한 [원고가] 중국 사회의 특정한 현상을 선험적으로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정의하면서, 그러한 현상을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 나타나는 그것과 유사한 현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여긴다는 뜻을 내포했다. 즉, 상품, 화폐, 임금, 자본, 이윤 등과 같은 경제적 범주는 중국 사회 내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이는 자본주의에서 그것과 대응하는 경제적 범주와 동등하지 않으며 단지 그 형태만 같을 뿐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현상들은 사회주의적이다. 경제적 범주를 이렇게 이해하는 방식은 스탈린의 유산으로, 오랫동안 중국 사회의 실제 문제에 대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분석을 수행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원고에 따르면,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폐지로 인해 종합적인 경제계획이 가능해졌다. 의식적인 계획의 도입은 그 자체로 사회주의 생산의 성격에 변화를 초래하여 사적 생산과는 완전히 달라지게 했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주의 생산은 직접적 사회적 생산이며, 따라서 사회주의 생산에서 노동은 더는 사적 노동이 아니라 직접적 사회적 생산물을 생산하는 직접적 사회적 노동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내에서 이루어지는 교환은 상품 교환이라는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사회주의 생산의 생산물도 ‘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사회주의 생산은 직접적 사회적 노동과정과 가치 창출 과정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 개념은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에 관한 소련의 교과서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보기에 이는 이론적 오류이고 현실을 이데올로기화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직접적 사회적 노동은 그 사회적 내용물을 실현하기 위해 가치형태를 사용할 필요가 없는 노동이다. 모든 상품은 교환가치뿐만 아니라 사용가치의 결합이며, 이 결합은 실제로 원고가 서술하는 바와 같다. 중국에서 생산물의 분배가 상품 교환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면, 이는 중국의 계획경제가 생산을 직접적 사회적 생산으로 변화시키고 노동을 직접적 사회적 노동으로 변화시키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961년 상하이 교범은 사회주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생산을 상품생산으로 서술했지만, 여전히 이를 자본주의에서의 상품생산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형태의 상품생산으로 서술했다.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1972년 원고에 따르면, 사회주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상품생산은 자본주의에서의 상품생산과 기본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그중 일부분은 더 이상 상품생산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국유부문 내에서의 교환은 ‘상품 교환’이 아니라 ‘생산물 교환’이다. 생산물 교환은 시장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계획에 따른 국가의 할당(allocation)을 통해 실현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1972년 원고는 스탈린이 「소련에서 사회주의의 경제문제」에서 사회주의 사회 내에 상품관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국가 소유와 집단 소유라는 두 가지 형태의 소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선전했던 사상을 고수한다. 스탈린에 따르면, 경제의 국유부문 내에서 이루어지는 교환(주로 생산수단의 교환)은 더는 상품 교환이라고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1972년 원고 역시 사회주의에서 생산물 교환과 상품 교환은 역사적으로 알려진 다른 모든 형태의 상품 교환과 기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교환과 함께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요소들, 즉 생산수단과 소비재의 직접적 분배라는 요소가 나타난다.
대체로 이 원고가 제시한 사회주의 개념은 단지 스탈린의 기초 사상과 개념을 복제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회주의 개념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 폐지로 인해 부르주아는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상실했으며 이에 따라 부르주아는 이제 절대 다시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결론을 담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부활’의 위험은 더 이상 없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계획생산을 통해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생산력 발전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로의 점진적인 전환을 이끌 것이다.
1972년 원고의 가장 명백한 자기모순은, 저자들이 한편으로는 ‘체계이론’에 선전된 근본적인 개념과 사상을 반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마오의 비판적 관점과 ‘체계이론’의 사회주의 개념에 대한 그의 거부를 통합한다는 데 있다. 이를 보여주는 몇 가지 예시는 다음과 같다.
- 원고의 저자들은 소유제의 변화를 사회주의의 구성 요소로 보았지만, 동시에 중국은 경제의 주요 부분이 여전히 집단적으로 소유되고 있어 소유제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만 사회주의를 달성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여전히 경제에서 국유부문의 주도력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계급과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가 권력을 잃는다면, ‘부르주아와 당 내부의 대리인, 즉 자본주의 길을 걷고 있는 자들’이 기업을 자본주의적 기업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부르주아가 권력을 찬탈하고 국가를 자본주의적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원고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소련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 1961년 교범은 또한 집단 소유 단위의 지도력을 부농과 상층 중농에게 빼앗기면 집단 소유 부문의 성격이 자본주의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972년 원고에서 지도력 문제는 국유부문 내의 관계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이로써 마오로부터 물려받은 도식적 분할, 즉 생산관계를 세 요소(소유제, 생산 내 상호관계, 분배체계)로 분할하는 것을 거부하는 첫걸음이 나타났다. 마오는 소련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이 도식적인 삼분할을 물려받았고, 이 삼분할은 중국공산당이 고수했던 스탈린주의 유산의 일부였다. 그러나 지도력 문제를 소유제의 구성 요소로 간주하게 되면, 이 삼분할은 부적절한 분석이 된다. 소유관계가 형식적이고 법률적인 관계와 동의어인 한, 이러한 삼분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본래 생산 내 상호관계 범주에 속하는) 지도력을 소유제의 구성 요소로 보면, 생산관계의 세 가지 측면 사이의 경계선은 모호해진다. 이는 따라서 생산관계를 총체로서 다루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한편으로, 생산관계의 변형은 단순히 생산수단의 소유권에 대한 법적 변형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산관계의 변형은 생산력 발전에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이런 점에서 원고는 ‘독서노트’에 나타난 마오의 생각, 즉 “생산관계의 변화는 항상 생산력의 주요한 발전보다 앞선다”라는 생각을 채택한다.
- 원고는 계획이 생산의 성격을 변화시킨다고 주장하면서도, 계획의 불완전성에 대한 마오의 생각을 지지한다. 원고의 저자들은 계획이 부문 간의 완전한 균형을 유지하는 발전을 결코 보장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세상 어느 것도 완전한 균형상태에서 발전하지 않는다. 균형은 일시적이고 상대적이며, 불균형은 부단하고 절대적이다.”
- 원고는 ‘당 내의 주자파’와 ‘관료독점자본가’라는 두 가지 개념을 도입해 ‘자본주의 부활’에 앞장설 수 있는 ‘새로운 부르주아’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그러나 원고는 이러한 ‘새로운 부르주아’가 출현하거나 자본주의적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증명하지 못한다. 원고는 단지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법적이고 ‘체계 외적’인 요인들, 즉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적 영향, 자본주의적 인습과 모반(母斑), 암시장이나 부패와 같은 자본주의의 불법적 싹 등을 지적할 뿐이다.
- 원고는 사회주의의 경제적 범주가 자본주의 경제에서 그것과 대응하는 경제적 범주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그와 같은 [사회주의의] 경제적 범주와 현상이 어떻게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의 구성 요소가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 나아가, 1972년 원고는 국유부문 내의 교환을 더 이상 ‘상품 교환’이라 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이 ‘생산물 교환’이 다시 자본주의적인 상품 교환으로 변형될 수 있는 전제조건은 무엇인가?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첫 번째 원고에는 이후 개정 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수많은 자기모순과 비일관성이 있었다. 첫 번째 원고가 1972년 9월 출판된 이후, 상하이 일간지 《문회보》[文汇报]는 ‘정치경제학을 약간 배운다’라는 제목으로 여러 기사를 실었다. 그들은 원고의 가장 중요한 사상과 개념을 좀 더 대중적인 형태로 제시했고, 이를 1972년 11월에 같은 제목의 소책자로 다시 정리하여 출판했다. 이 소책자의 서문은 원고의 서문과 같은 글이 담겼는데, 이는 본래 기관지 《홍기》에 실린 팡하이[方海]의 글이었다. 이 소책자를 출판한 목적은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대중적 학습 캠페인과 토론을 시작하려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두 번째 원고
1972년 9월 첫 번째 원고가 완성된 이후,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은 글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논의하는 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베이징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 10월에 열린 회의에서 장춘차오는 이 책이 제시한 기초 이론과 논증 방식에 대한 새로운 ‘지침’을 제기했다. 지침은 다음과 같은 주제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야 하며 이 책의 이론적 핵심을 제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1972년 9월 첫 번째 원고가 완성된 이후,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은 글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논의하는 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베이징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 10월에 열린 회의에서 장춘차오는 이 책이 제시한 기초 이론과 논증 방식에 대한 새로운 ‘지침’을 제기했다. 지침은 다음과 같은 주제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야 하며 이 책의 이론적 핵심을 제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1) 사회주의 생산관계 내부에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있다.
2) 소유제 문제는 권력 문제다.
3) 노동 인민 내의 상호관계는 계급관계다.
이 회의를 거쳐 원고에 대한 첫 번째 철저한 개정이 이루어졌고, 1973년에 개정 과정이 마무리되어 두 번째 원고가 작성되었다.
두 번째 원고 자체는 구할 수 없지만, 1974년 5월 상하이에서 「정치경제학 기초지식」이라는 제목의 또 다른 대중적 교범이 출판되었다. 원고가 수정되었음에도, 이론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72년 10월 회의에서 장춘차오가 언급한 세 가지 주제는 면밀히 검토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적 생산관계 내부의 자본주의적 요소’라는 개념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사실 이 개념은 1976년 10월 최종 판본까지도 등장하지 않는다) 첫 번째 원고에서 드러난 자기모순은 여전했고, 저자들은 여전히 ‘자본주의 부활’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체계이론’의 기본적인 사상을 고수했다.
- 마오의 1975년 지침
1975년 1월 제4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직후, 중국 언론은 마오의 발언을 인용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 학습 운동’이라는 대중토론 운동을 시작했다. 마오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많은 중국 관측통은 이를 대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마오의 방식으로 해석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마오의 발언을 공론화한 데 이은 대중토론 운동은 대회에 대한 마오와 그의 정치적 동지들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1975년 1월 제4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직후, 중국 언론은 마오의 발언을 인용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 학습 운동’이라는 대중토론 운동을 시작했다. 마오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많은 중국 관측통은 이를 대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마오의 방식으로 해석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마오의 발언을 공론화한 데 이은 대중토론 운동은 대회에 대한 마오와 그의 정치적 동지들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 문제에 대한 마오의 최신 지침’이라고 불리는 인용문에서, 마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마디로,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다. 해방 전에 중국은 거의 자본주의와 다를 바 없었다. 지금도 중국은 각자의 노동에 따라 분배하고 화폐로 교환하는 8등급 임금제를 시행하고 있다. 이는 구사회와 거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달라진 점은 소유제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 현재 중국은 상품체계를 시행하고 있고, 8등급 임금제가 있는 등 임금제도 역시 불평등하다. 이러한 것들은 오직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만 제약할 수 있다. 따라서 린뱌오 같은 사람들이 권력을 잡는다면, 이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밀어붙이는 일은 아주 쉬울 것이다.”
이 인용문은 상하이 학파의 이론적 발전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이는 처음 두 원고의 근본적인 이론적 문제, 즉 한편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스탈린주의적 개념을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 부활’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사이의 모순을 해결했다. 마오에 따르면, 상품, 화폐, 임금과 같은 사회주의 경제적 범주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상품, 화폐, 임금과 같은 경제적 범주와 다르지 않다. [이들 사이에] 질적인 차이는 없으며, 따라서 이러한 경제적 범주들은 자본주의 생산 과정에서도 쉽게 기능할 수 있다.
같은 해인 1975년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도 각각 3월과 4월에 글을 발표했다. 그들은 마오쩌둥의 ‘지침’에 제시된 사상과, 『사회주의 정치경제학』 원고가 제기한 구성과 주제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 학습 운동’의 시작과 상하이 학파의 이론적 작업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은,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의 글과 마오의 ‘지침’이 이 운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명백하다. 중국공산당 내의 ‘문화혁명파’였던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는 상하이에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이론적 작업에 직접 관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 학습 운동’에 상하이 학파의 이론적 발전이라는 측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이 운동은 또한 중국에서 새롭고 매우 격렬한 정치투쟁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는 ‘린뱌오파’라는 명칭을 ‘새로운 부르주아’와 동의어로 사용했다. 분명히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의 글은 린뱌오와 그의 정치적 동지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이 글은 ‘새로운 부르주아’의 출현과 ‘자본주의 부활’의 가능성이 있는 물질적, 사회적 토대를 분석하려는 시도였다. 의심할 여지 없이, 글의 분석 대상은 린뱌오 주변의 집단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사회 집단이었다. 글에 따르면, ‘새로운 부르주아’라는 문제는 린뱌오와 그의 집단을 숙청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새로운 부르주아’는 여전히 중국의 유력한 지위에서 발견되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마오의 ‘지침’을 비롯해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의 글은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두 번째 원고에서 가장 눈에 띄는 약점과 자기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 약점과 자기모순은 첫째, ‘새로운 부르주아’가 출현하는 물질적 토대에 대한 분석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 사회주의의 경제적 범주와 메커니즘은 자본주의의 경제적 범주 및 메커니즘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해석과 ‘자본주의 부활’이 사회주의에서도 가능하다는 가정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는 ‘부르주아 권리’를 자본주의와 ‘새로운 부르주아’가 출현하는 물질적 토대로 지적했다. 그들은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첫 두 원고가 제기했던 관점, 즉 ‘부르주아 권리’를 ‘3대 격차’(즉, 도시와 농촌 사이, 노동자와 농민 사이, 지식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격차)와 밀접하게 관련된 현상으로 간주하고 주로 분배 영역 내에서 기능하는 원리로 간주했던 관점을 거부했다.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는 ‘부르주아 권리’를, 상품생산에 뿌리를 둔 가치의 등가교환이자, 생산관계의 모든 측면에서 역할을 맡는 더 일반적인 개념으로 여겼다. 이들은 마오의 ‘지침’을 따라, 사회주의 경제적 범주나 메커니즘이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서 그것에 대응하는 경제적 범주나 메커니즘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부르주아’가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 세 번째 원고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의 글이 발표된 후 『사회주의 정치경제학』 원고에 대한 두 번째 주요 개정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세 번째 원고가 나왔다. 이 원고는 마오의 ‘지침’과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의 글에 포함된 이론적 관점을 포함했다. 그러나 동시에, ‘생산물 교환’ 개념이 여전히 경제에서 국유부문 내의 교환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사회주의의 상품이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상품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국유부문 내에서 생산되고 교환되는 상품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마오의 ‘지침’과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의 글은 상하이 학파의 이론적 해명에 커다란 영감을 주었지만,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은 1975년에도 여전히 애매함과 자기모순을 담고 있었다.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의 글이 발표된 후 『사회주의 정치경제학』 원고에 대한 두 번째 주요 개정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세 번째 원고가 나왔다. 이 원고는 마오의 ‘지침’과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의 글에 포함된 이론적 관점을 포함했다. 그러나 동시에, ‘생산물 교환’ 개념이 여전히 경제에서 국유부문 내의 교환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사회주의의 상품이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상품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국유부문 내에서 생산되고 교환되는 상품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마오의 ‘지침’과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의 글은 상하이 학파의 이론적 해명에 커다란 영감을 주었지만,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은 1975년에도 여전히 애매함과 자기모순을 담고 있었다.
- 네 번째 원고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네 번째 원고는 1975년 6월부터 12월까지 장춘차오가 직접 초안을 수정하여 작성되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원고를 구할 수 없었지만, 1975년 12월에 「정치경제학 기초지식」의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이 교범은 네 번째 원고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고 간주할 수 있으므로, 이를 통해 네 번째 원고의 이론적 내용을 상당히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네 번째 원고는 1975년 6월부터 12월까지 장춘차오가 직접 초안을 수정하여 작성되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원고를 구할 수 없었지만, 1975년 12월에 「정치경제학 기초지식」의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이 교범은 네 번째 원고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고 간주할 수 있으므로, 이를 통해 네 번째 원고의 이론적 내용을 상당히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정치경제학 기초지식」은 초기 원고들과 비교하면 두 가지 측면에서 더 나아갔다. 하나는 사회주의에서 국가의 기능에 대한 분석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에서 상품생산에 대한 분석이다.
1) 국가에 대한 분석: 교범은 레닌의 말처럼, 사회주의 국가를 ‘부르주아 국가’로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사회주의 국가가 ‘부르주아 권리’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국가 소유로 전환하는 것은 소유제를 ‘비(非)부르주아’적인 형태로 전환하는 것과 같지 않다. 따라서 「정치경제학 기초지식」은 사회주의를 생산수단에 대한 국가 소유와 동일시하는 것을 폐기하는데, 사회주의를 생산수단에 대한 국가 소유와 동일시하는 사고는 장춘차오의 글과 세 번째 원고까지도 여전히 존재했던 것이었다. 이로써 보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소련을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 상품생산에 대한 분석: 교범은 앞선 원고들에서 사용된 ‘생산물 교환’ 개념을 폐기한다. 「정치경제학 기초지식」에 따르면, 사회주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교환은 상품교환이며, 이는 국유부문 내의 교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는 국유부문 내에서의 생산에 대한 스탈린의 사고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다. 사실, 1961년 상하이 교범이 이미 ‘사회주의에서 모든 교환은 상품교환’이라고 주장한 바 있었다. 그러나 1961년 교범이 사회주의에서 이루어지는 상품교환이나 상품생산은 자본주의에서 이루어지는 상품교환이나 상품생산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간주한 것과 달리, 「정치경제학 기초지식」은 사회주의에서의 상품교환이 자본주의에서의 상품교환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1975년 원고는 사회주의 상품생산에 대한 스탈린의 분석과 그의 총체적인 사회주의 개념을 거부하고 상하이 학파의 이론적 설명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앞선 원고들로부터 물려받은 근본적인 자기모순, 즉 사회주의에서의 생산은 직접적 사회적 생산과 가치를 창출하는 생산의 결합이라는 사고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자기모순은 1976년 10월 상하이에서 출판된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원고가 쓰일 때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 다섯 번째 원고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네 번째 원고가 1975년 12월 완성되었을 때, 장춘차오는 원고에 대한 마지막 수정을 시작할 새로운 ‘지침’을 작성했다. 이 ‘지침’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네 번째 원고가 1975년 12월 완성되었을 때, 장춘차오는 원고에 대한 마지막 수정을 시작할 새로운 ‘지침’을 작성했다. 이 ‘지침’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수정주의를 비판해야 한다. 류[사오치], 린[뱌오], 덩[샤오핑]을 비판하라. 트로츠키, 부하린 등을 비판하라. 수정주의를 비판하지 않으면 정치경제학을 제대로 쓸 수 없다. … 우리는 스탈린의 오류로부터 받는 영향이 여전히 매우 강하다는 것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장춘차오의 ‘지침’에 따라] 개정한 결과가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다섯 번째 원고였다. 저자들은 1976년 10월에 이 책을 출판할 계획이었으나, 앞서 언급했듯 원고가 출판되던 와중에 10월 6일 쿠데타가 일어나 압수되었다. 쿠데타 이후 중국 언론은 이 미출판 원고를 비롯해 상하이 학파와 긴밀히 협력하여 톈진에서 작성된 이와 비슷한 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비판적인 언론 기사에는 ‘사인방’과 그 지지자들의 이론적 작업의 결과로 여겨졌던 두 권의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에서 인용한 내용이 꽤 많이 담겨있다. (기사들의 목록은 부록을 참고하라.) 비록 두 권의 『사회주의 정치경제학』 원고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신문과 잡지에 실린 많은 인용을 통해) 우리는 원고에 담긴 이론적 내용에 대한 상당히 포괄적인 상을 그려볼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상하이 학파가 정치적으로 패배하기 직전에 정교화한 하나의 사회주의 정치경제학 이론으로서 원고를 제시하고자 한다.
상하이 학파의 이론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적 요소와 자본주의적 요소로 구성된 과도기적 사회이며, 이러한 요소들은 사회주의 생산관계 내에 동시에 존재한다. 자본주의적 요소는 단순히 자본주의 구조의 잔존 요소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의 사회적·경제적 과정을 통해 재생산되는 요소들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요소는 사회주의 경제의 모든 영역에서 발견된다. 사회주의 생산관계 내에 자본주의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와 부르주아가 사회주의 사회 내에서 끊임없이 생산되고 재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부르주아’는 노동자계급 그리고 특히 공산당 내부에서 출현한다. 새로운 부르주아가 출현하는 물질적 토대는 불충분하게 변형된 사회주의 사회의 구조들, 즉 구(舊)사회로부터 물려받은 상품, 화폐, 임노동관계, 경제를 규제하는 원칙으로서 가치에 따른 등가교환, 그리고 마지막으로 분업의 존재에서 발견할 수 있다.
분업은 노동자에게서 생산수단에 대한 진정한 지도력이라는 권리를 박탈하는 ‘지적 특권층’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방식으로 소유제는 점차 그 성격이 변화될 것이다. 기업 내에서는 지식노동자가 육체노동자를 지배하는 체계가 등장할 것이다. 상하이 학파의 최종 입장에 따르면, 그러한 체계는 중국에서 이미 어느 정도 발전해왔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는 이미 ‘새로운 부르주아’에 의해 지배당하고 착취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부르주아’는 사회주의 기간 전체에 벌어지는 계급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가장 중요한 적이 될 것이며, ‘새로운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따라 수행되는 혁명의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모순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가장 주요한 모순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의 결과인 계급투쟁은 무엇보다 ‘부르주아 권리’의 확대 또는 제한, 즉 사회주의 생산관계 내부에서 자본주의적 요소의 확대 또는 제한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투쟁이 될 것이다.
집단 소유 경제는 소유제 내에서 불충분하게 변형된 구조다. 생산의 결과뿐만 아니라 생산수단 역시 개별 집단 단위가 소유한 사유 재산이다. [집단 소유 경제에서의] 생산은 그런 의미에서 사적 생산이다. 또한 국유부문 내의 지도력 문제뿐만 아니라 집단 단위의 지도력 문제가 역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특히 어떤 계급이 실제로 생산수단을 통제하느냐가 결정적 문제다. 기업에서 지도력의 권력구조가 달라지면, 그에 따라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ownership)가 달라질 수도 있다. 사회주의 기업에서 노동자가 지도 권력, 즉 기업이나 집단 단위를 관리하는 권리를 박탈당하면, 그 기업은 성격이 변화하고 관료적 독점자본가의 소유물이 될 수 있다. ‘새로운 부르주아’가 생산수단을 손에 쥐게 되면, 이들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을 촉진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사회주의 생산의 모든 영역에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회주의 생산은 상품생산이다. 사회주의 사회에 상품과 상품생산이 존재하는 이유는 소유의 두 가지 형태, 즉 국가 소유와 집단 소유가 공존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국유부문만 놓고 보더라도 개별 회계 기업에게 상대적 독립성이 존재한다는 이유 역시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기업 간의 상호관계는 사실상 개별 ‘소유자’ 간의 관계가 될 것이고, 따라서 국유부문 내의 생산조차 다시 사적 생산이 될 것이다.
사회주의에서 상품 유통은 또한 자본 유통으로 변형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변형이 이루어진다면, 노동력은 다시 상품이 될 것이고 화폐는 자본으로 변형될 수 있을 것이다. 상품 교환의 목적이 사용가치의 실현이 아니라 가치 실현의 필요성에 있게 되면 이러한 변형이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인데, 왜냐하면 가치법칙은 상품생산의 법칙이고, 원고는 이제 가치법칙이 사회주의 경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1976년 원고에 따르면, 사회주의에서 가치법칙은 자본주의에서 가치법칙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가치법칙이 생산을 규제하도록 함으로써, 부르주아는 사용가치 생산을 가치 생산에 종속시킬 수 있다. 화폐와 가격을 사용하게 되면, 어떤 상품 가격은 그 상품의 가치보다 더 높을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상품을 생산하는 것은 다른 평범한 상품을 생산하는 것보다 더 큰 이윤을 얻을 것이고, 이는 따라서 특정 기업이 수익성이 낮은 (그러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상품보다는 더 큰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함으로써 이윤을 극대화하는 유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잉여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생산은 전반적인 생산과 사회주의 사회에 종종 부족한 자원의 배분을 왜곡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자본주의의 부활은 무엇보다도 화폐수단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상품유통의 존재로 인해 일어날 수 있다. 게다가, 다양한 기업의 ‘기금’은 불충분하게 변형된 자본 형태일 뿐이므로, 여전히 구사회의 자본과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그러한 기금은 그 형태나 내용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고도 자본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임금도 마찬가지다. 사회주의 원리인 ‘노동에 따른 분배’는 기본적으로 임금노동과 다르지 않다. 임금의 형태와 내용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더라도, 노동력은 얼마든지 다시 상품이 될 수 있다.
1976년 원고에 따르면, 중국에서 ‘자본주의 부활’의 이데올로기적 형태는 ‘생산력 이론’이나 ‘4개 현대화’와 같은 것이다. 이 둘은 모두 ‘사회주의에서 계급투쟁은 소멸한다’라는 이데올로기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가 확실하게 공산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분업처럼 구사회로부터 물려받은 생산관계 내에서 ‘부르주아 권리’로 규정되는 요소를 포함하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점차 제한하고 제거하기 위한 ‘문화혁명’을 끊임없이 펼칠 필요가 있다고 원고는 주장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새로운 부르주아’와 자본주의가 출현하는 물질적 토대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가 기업 관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통제권을 행사하고, 지식노동자가 정기적으로 육체노동에 참여하도록 강요함으로써 낡은 분업을 없애야 한다. 지식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모순은 이러한 수단을 비롯해 생산과 교육의 경계를 점차 없애는 교육제도의 재구성을 통해 제거해야 한다. ‘새로운 부르주아’의 물질적 특권은 임금체계 개혁을 통해 점차 제거해야 한다. 임금체계 개혁은 첫째, 노동자들의 열정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물질적 인센티브’를 사용하는 것을 폐지하고, 둘째, 더욱 균등한 임금 분배를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상여금과 성과급은 폐지되고, 사회 전체가 ‘노동에 따른 분배’라는 원칙을 점차 떠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산은 반드시 사용가치 기준에 따라 계획되어야 하며, 반대로 가치 범주의 영향은 제한되어야 한다.
최후의 이론에 대한 평가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1976년 원고는 급작스럽게 중도반단된 오랜 이론적 발전과정의 최종적 결과였다. 이는 마오에게 해결되지 않은 채 남은 질문,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자본주의 부활이 중국이나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어날 수 있으며 어떤 사회 세력이 그러한 발전을 촉진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일관된 답변을 내놓았다.
이러한 최종적인 이론적 입장은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초기 원고에 내재한 자기모순을 대부분 해결했지만, 여전히 명확히 해명되지 않은 지점과 약점을 얼마간 포함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상하이 학파의 이론적 발전에서 기본 쟁점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오와 상하이 학파는 한 번도 자본주의에 대한 명확하고 일관된 정의를 공식화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1949년 이전의 중국을 ‘반(半)봉건 반식민지’로 설명하기도 하고 ‘거의 자본주의와 같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애매함 때문에, 어째서 소련은 ‘자본주의’로 묘사하는 반면 중국은 ‘사회주의’로 규정할 수 있을 만큼 소련과 중국의 차이가 커다란지에 대한 설명을 찾기 어렵다. 마오와 상하이 학파는 중국의 ‘사회주의 경제’가 자본주의 생산처럼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으려면 대체 그 내부의 어떤 구조가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최종적인 이론적 입장의] 또 다른 약점은 계급 분석이다. ‘새로운 부르주아’는 ‘관료적 독점자본가’와 ‘생산에서 지식노동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정의는 공산당이 이 ‘새로운 부르주아’의 주요한 ‘온상’이라는 원고의 선전과 어떻게 부합하는가? 상하이 학파는 중국공산당의 기능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다른 한편, 상하이 학파는 ‘자본주의’의 부활을 막기 위해 취해야 할 구체적인 조치를 설명하면서 누가 이러한 조치의 행위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공산당에 중심적인 역할을 부여했다. 이는 당을 새로운 부르주아와 자본주의적 경향의 가장 중요한 ‘온상’으로 정의한 것과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상하이 학파는 스탈린의 경제사상과 이론을 비판하고 버릴 수 있었던 것 같지만, 실제적인 정치적 조치와 그 실행에 있어서는 레닌의 사상과 전위당 이론에 매달리는 것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상하이 학파가 다름 아닌 중국공산당을 다른 정치구조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던 중국공산당 문화혁명파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이는 역설적으로 보인다.
마오쩌둥의 이론과 상하이 학파의 이론은, 교조적인 스탈린주의를 계승하고 정치적 민주주의가 없는 공산당 내에서 분파 투쟁으로 나타났다. 소련공산당이나 중국공산당의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전통에서, 분파 투쟁은 진지한 정치적 논쟁보다는 반대편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분파 투쟁의] 궁극적인 목표는 반대자를 숙청하는 것이지, 그들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부르주아’라는 용어는 상대를 매도하는 데 유용한 단어 중 하나였다. 혹자는 한 파벌이 권력을 추구하면서 다른 경쟁 파벌을 ‘부르주아’라고 부르는 것은 공산당의 정치 문화에 따라 필요한 일이었기에, 이에 대해 그다지 진지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너무 성급한 결론일 것이다. 마오와 상하이 학파가 엄격하고 교조적인 스탈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그들의 이론이 갖는 분석적 잠재력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마오와 상하이 학파가 발전시킨 전체 이론적 과정을 보면, 그들의 관점과 분석 방법이 새로운 것이라는 충분한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체계이론’에 만연해 있던 얼마간 형이상학적인 사회주의 개념을 없애고 중국 사회의 문제에 대해 현실적인 태도를 보이려는 열망을 드러냈다. 마오와 상하이 학파는 마침내 이른바 사회주의 사회에서 불충분하게 변형된 사회 구조와 경제 구조를 분석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와 같은 비판적 이론이, 이른바 사회주의 나라의 당과 국가기구 내 주요 정치지도자에 의해 구상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상하이 학파의 이론이 진정한 이론적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현대 중국을 이해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상하이 학파가 세운 이론적 기반은 어떤 식으로든 과도기 사회에 대한 이론의 발전에 이바지하는가? 이는 여전히 열려있는 매우 중요한 질문들이며, 우리는 이후의 연구가 이에 대한 답을 제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