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2023 여름. 1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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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연대의 사회적 기반은 존재하는가

『분절된 노동, 변형된 계급』

이경호 | 금속노조 현대모비스 화성지회 조합원
 

1.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혁, 노동조합운동의 사활적 과제

 
윤석열 정부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을 명분으로 노동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노동시장 이중구조 형성의 근본적인 원인을 면밀히 살피고 해법을 제시하려는 태도보다는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며 기존의 노조를 고립시키려는 방편으로 이용하고 있다.

정부의 정치적 활용과는 별개로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혁은 노동운동의 입장에서도 사활적 과제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1987년 이후 민주노총을 건설하고 조합원을 꾸준히 늘려왔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발전과 별개로 민주노총은 전체 노동자의 삶을 책임지는 대표 조직으로 자리매김하지는 못하고 있다. 한국 노동운동은 오히려 내부분열과 사회적 고립에 시달리며 허물어지고 퇴보하는 길을 걷고 있다.

저자는 한국 노동운동의 중심이었던 울산 대공장 노동자의 생애와 노동운동을 통해 현재 한국 노동운동이 처한 현실과 그 원인을 밝히고자 했다. 울산은 지역 경제를 지배하는 핵심 대기업이 중소기업들을 수직적으로 통합하여 공존하는 공업도시다. 이러한 위계적인 기업 간 관계는 고용관계의 계층화를 낳으며 지역노동시장의 분절을 심화했다. 기업 간 분업구조(원하청관계), 고용형태(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절)에 따른 복잡한 노동계급 내 지위의 계층화는 노동자 연대를 가로막는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저자는 그러한 요인이 현대계열사 소속의 일부 대공장 노조운동과 현대계열사와 하도급 관계를 맺고 있던 중소기업 노조운동 간의 불균등 성장을 낳았다고 본다. 노동시장의 분절선을 따라 노동운동도 분절화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울산 지역 노동자 연대의 사회적 기반이 협소해진 이유로 초기 ‘결정적 국면’에서 지역연대 조직 건설의 실패와 그 이후 대공장 노동자의 전략적 선택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울산 지역의 활동가들은 초기 지역연대 조직의 결성을 통해 노동계급의 조직적 역량을 확보하고 노동자 내부의 연대의식을 넓히고자 했다. 하지만 이를 실행할 수 있었던 ‘결정적 국면’을 놓치게 되면서 기업별 노조 체계와 활동으로 노동운동의 리더십이 분산되었다. 

그 이후로는 울산 대공장 노동조합의 전략적 선택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울산 대공장 노동조합은 기업별 단체교섭을 통해서 임금 극대화와 기업복지 확대를 일관되게 추진해 나간다. 결국 대공장 노조의 전략적 선택과 전체 노동계급의 장기적인 계급 이익 사이의 균열이 점점 커졌다.

울산뿐만 아니라 현재 전국적인 노동운동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노동자 연대의 사회적 기반이 협소해졌고, 단결의 토대는 무너지고 있다. 이런 척박한 토양에서 노동자 단결을 위해서는 진지한 내부 성찰과 과감한 전략적 선택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고민을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 기업과 노동자의 도시 ‘울산’

 
‘공업도시 울산’은 국가의 거시적 개발정책에 의해 군사정부 시기, 1962년 울산을 특정공업지구로 지정, 공포하며 시작된다. 이후 현대그룹의 투자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1970년대 말이 되면 대기업이 지역사회를 지배하는 현대시 또는 현대공화국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1986년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두 공장의 종사자는 4만 5천여 명에 이르렀다. 현대가 1987년 울산에 설립하거나 인수한 기업은 총 12개였는데 이 기업들은 현대중공업 사업장 안에 위치하거나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계열 기업들의 공간 집중과 더불어 노동자 주거지도 사업장 인접 지역에 형성되었다. 같은 그룹 소속의 수만 명 산업노동자가 생산과정과 노동력 재생산 과정에서 공간적으로 거의 분리되지 않은 조건을 지닌 매우 독특한 양상이 출현한 것이다. 

이러한 공간적 특성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노동의 힘’으로 전화된다. 1987년 이전 울산 현대계열사의 산업노동자는 매우 유동적인 집단이었다. 생산직 노동자는 내부노동시장의 보호 기제에서 제외되어 있어 경기 변동에 따라 해고가 잦았기에 이탈 성향이 매우 컸다. 1970년대 이래 전국 각지에서 울산의 현대계열사에 취업한 노동자의 가장 큰 취업동기는 ‘없는 사람 벌어먹기 좋은 곳이 울산’이라는 점이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에 입사한 노동자들은 당시의 작업장을 ‘이북의 강제노동수용소’ 같은 곳, 똥 구루마, 탄광촌 분위기, 조지나 공장이라고 묘사하고 있을 정도로 근로조건이 매우 열악했다. 산업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했고, 장시간 노동, 억압적 노동통제와 비인격적 대우가 만연해 있는 곳이었다. 이러한 작업환경에서도 ‘고생은 되어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경제적 동기가 노동자들이 울산으로 모여든 주요한 이유였고, 그것은 ‘객지’였던 울산에서의 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심리적 기제였다.
 
 

3. 노동자대투쟁: 정부의 탄압과 사측의 관리 전략, 그리고 노동운동의 전투적 동원 전략

 
울산은 19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의 진원지였다. 1980년부터 노조 조직화를 준비해온 개별 노동자와 이들 간의 네트워크는 정치적 자유화 조치인 6.29선언과 함께 노동조합의 연이은 결성으로 이어졌다. 울산에서 1987년 현대엔진, 현대중전기,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지에서 1987년 이전부터 현장 활동을 하던 소수의 노동자와 이들이 조직한 소모임들이 있었다(독서회, 고적답사회, 취미써클 등). 현장 소모임을 주도했던 노동자들은 당시 지역의 사회운동가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이들은 1986년 10월에 설립된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 노동문제 상담소를 매개로 느슨한 형태의 인적 네트워크로 연계된다. 노동자들은 정례적으로 모여 단위 사업장별 현장 활동 경험과 정보를 공유했고, 때로는 울산 바깥의 노동운동 활동가와 교류도 추진했다. 7월부터 9월까지 현대계열사의 노동자, 특히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가 초기부터 울산 지역 노동운동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하였고 이 두 사업장 노동자의 동원이 지역 전체의 동원을 좌우하고 있었다.

현대그룹의 대공장 노동운동에 대하여 정부는 경찰력의 동원, 지도부에 대한 인신적 제재와 같은 물리적 강제수단을 자주 동원했다. 체계적인 노무관리의 부재와 국가의 물리적 강제력에 대한 전적인 의존 상태에 있었던 자본은 노동자대투쟁 이후 자체적인 노무관리와 대 노조 전략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계열사 노조의 잇따른 결성과 폭발적 집합행동에 직면한 이후부터는 노조의 기업 내부화, 즉 기업별 노조로의 순치와 일원적 노사협조 체제의 강화를 추구했다. 민주화 이행에도 불구하고 자원동원 능력에서 국가의 압도적 우위, 노조 활동을 제약하는 노동법 체제, 노동자 계급 정당 및 이익대표 세력의 부재, 노동운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제약 등 구조적 요인들은 큰 변화가 없는 조건에서 자주적 노조 활동을 지향하는 단위 노조는 조합원의 최대 동원을 통하여 노조를 인정받고 자신의 이해를 실현하려는 전략, 즉 ‘전투적 동원’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4. ‘결정적 국면’에서 지역연대 조직 건설의 실패

 
울산의 노동운동은 단위 사업장을 넘어선 지역 수준의 연대를 추구해 나가며, ‘지역연대 조직’의 결성을 도모했다. 국가의 물리적 억압, 단위 사업장별로 파편화된 노조조직 형태, 제삼자 개입금지와 같은 노동법 독소조항, 기업별 임금교섭 관행이 단위 사업장을 넘어선 연대행동을 제약하는 상황에서 지역연대 조직의 결성 문제는 노동계급의 조직적 역량을 확대하고 노동계급 내부의 연대의식을 높이는데 사활적인 과제로 초기 노동운동 리더들에게 인식되었다.

1989년 하반기부터 1990년 5월 현대중공업노조의 ‘골리앗 투쟁’까지의 시기가 지역연대와 관련하여 울산노동운동의 ‘결정적 국면’이었다. 1989년 하반기 전국적 결집체로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건설이 본격화되고 있었고, 울산 노동운동의 핵심부대였던 대공장에 연대 지향적인 민주노조 집행부가 연이어 들어서면서 이 시기 지역연대 조직 건설 시도가 가시화될 수 있었다. 그리고 지역적 차원에서는 현대해고자복직실천협의회(현해협)를 중심으로 지역 노동운동의 지도력이 주요 단위 사업장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19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투쟁을 통해 사회적 연대가 크게 확대된 시기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현해협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민주노조의 지역연대 조직 결성에 뜻을 모으고 연대조직 건설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런데 다른 지역의 지역노조협의회가 지역 연대투쟁의 경험을 기반으로 조직 결성에 성공했던 데에 반해, 울산은 현대계열사 노동자 사이에서만 연대 경험이 있을 뿐이었고 다른 공단이나 업종 노동자들과의 연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지역연대 조직은 현대계열사 노조들의 연합조직이었다. 그렇지만 지역노조협의회를 근간으로 한 전노협 결성이라는 대의에 따라 울산에서도 울산지역노동조합협의회(울노협)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게 된다. 그러나 지역 연대의 경험이 미약한 조건에서 울노협 준비위는 결성 이후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못했다. 이렇게 ‘결정적 국면’에서 지역연대 조직 건설 시도가 좌절되었다. 울산은 1996년 2월 민주노총 경남지역본부 울산시협의회가 만들어질 때까지 지역연대 조직이 부재하게 된다. 

울산은 기업내부의 쟁점을 둘러싼 전투적 동원을 통해 노조운동이 성장하고 리더십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러한 리더십 형성 과정은 자체 동원력을 보유할 만큼 규모의 경제가 되는 대공장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1987년 이후 결정적 국면에서 울산의 중소기업 노조운동은 초보적인 상태에 있었다. 현대자동차 부품업체들이 밀집된 효문, 연암 지구와 석유화학업종이 밀집된 남구 지역의 노동운동이 여기에 해당했다.

이후 현대계열사들의 연대조직(현총련)이 1990년 1월에 결성되었지만, 현총련은 엄밀한 의미에서 지역연대 조직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현총련 설립 초기의 문제의식은 울산의 지역연대 조직 건설에 방점이 찍혀 있었지만, 조직의 제도화가 진행되면서 현대그룹이라는 공식적인 ‘조직적 경계’가 점점 더 공고해졌고, 지역 내에서 조직적 경계 바깥의 노동자와 연대는 주변적인 활동이 되었다.

저자는 노동시장 분절구조에 조응하는 형태로 지역노동운동의 패턴이 형성되면서 대공장 노조의 전략적 선택이 중요해졌음을 지적했다. 대공장 노조가 자기 특수이익의 실현을 최우선적인 운동 과제로 제기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특수이익을 폭넓은 시야 속에서 계급 연대의 구현을 위한 일부로 위치 짓는지에 따라 노동운동의 성격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현실은 전자의 경로, 즉 대공장 기업별 노조의 활동이 기업별 교섭을 중심으로 좁은 범위의 경제적 이익 실현을 위주로 이루어졌다.
 
 

5. 내부노동시장의 구축과 임금인상의 정치 

 
대공장 노동자들은 내부노동시장의 보호 기제를 만듦으로써 자본주의 체제에 고유한 실업의 위험성과 노동자 간 경쟁을 최대한 억제하고자 했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의 경우, 점차 이직률이 낮아지고 근속이 증가한다. 또한 자본과 연례적 단체교섭을 통해 임금을 상승시키고 조합원 간의 임금 차이를 최대한 억제함으로써 단결을 강화하는 전략을 추구했다. 그러자 노동운동의 성장으로 형성된 내부노동시장이 오히려 계급 연대의 사회적 기반을 침식하는 효과를 낳게 된다. ‘성공의 역설’로 부를 수 있는 이런 현상을 낳은 핵심적인 매커니즘은 대기업 노조의 임금정책이었다. 

국가의 경제, 사회정책에 관여도가 높았던 북서유럽의 노동조합은 임금정책을 수립할 때 수요 안정화, 산업 혁신과 생산성 향상, 물가안정, 완전고용 등 거시경제 목표를 적극적으로 고려했다. 노조운동 지도부는 산업, 지역, 전국 차원의 포괄적 조직을 통해 초기업 교섭 또는 다양한 방식의 임금조율 제도를 발전시켰다. 그런데 한국은 조율되지 않은 기업별 교섭이라는 오랜 전통이 기업 규모별 임금격차를 유발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국의 노조운동은 현재까지도 임금 평준화 전략보다는 단기적인 임금 극대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울산 대기업 노동조합의 임금정책은 임금 극대화와 내부적 임금 평준화가 결합된 것이었다. 한국의 노동조합은 생계비 임금론에 근거한 최대한의 임금인상을 우선시했고, 이와 더불어 기업 내 임금격차를 축소하려고 했다. 생계비 원리는 가족 구성원의 생활보장이라는 노동자들의 기본적 요구에 부응한다는 점에서 저임금을 받으며 생게부양의 책임을 지던 노동자들에게 호소력을 지녔다. 하지만 생계비와 현재 임금수준의 차액이 충분히 크지 않다면 높은 수준의 임금인상 요구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이 문제는 1990년 초반에 벌써 현실화되었다. 이후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노조는 최저생계비 모형 대신 ‘필요생계비’ 모형을 자체적으로 고안하여 임금인상의 근거로 사용했다. 임금 극대화 정책의 결과로 1987년 이후 3년간 연간 20% 이상의 대폭적인 인상이 이루어졌다. 내부적 임금 평준화 정책은 직군 간 임금격차의 해소, 생산직 내부의 동질화, 그리고 연공급 중심의 임금체계 유지가 핵심이었다. 인사고과에 의한 임금 차등지급 관행이 폐지되고 정액인상을 통한 하후상박의 원칙이 적용되면서 교섭 범위에 속한 노동자들 내부의 임금격차가 줄고 기업 내 동질성이 강화되었다. 

한국과 같이 조직률이 낮고 분권적, 비포괄적인 노조형태와 교섭 구조를 가진 상황에서 독점 재벌이 산업의 가치사슬을 지배하게 되면, 대공장 사업장의 임금 극대화가 야기하는 충격이 외부 또는 주변부 노동시장으로 전가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노조운동은 주체적으로 임금정책을 통해서 전체 임금노동자 간의 불평등을 완화하고 계급 연대의 기반을 강화할 수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저자는 ‘임금인상의 정치’의 효과가 두 가지 측면에서 노동자 연대의 기반을 침식했다고 보았다. 첫째, 임금인상의 정치의 혜택은 노동시장의 지위에 따라 비대칭적이었다. 동일 산업 내에서 대기업의 고임금 노동자와 중소기업의 저임금 노동자 간의 격차는 확대되었고 그것은 산업의 하도급 관계에 따른 구조적 분절로 고착된다. 둘째, 분산적인 기업별 교섭은 그 최대의 수혜자인 대기업 핵심 노동자층의 선호와 행위 지평의 경계가 기업 내부로 협소화되도록 했다. 초기업적 수준에서 임금연대 가능성이 약화했고 계급 연대의 사회적 기반이 취약해졌다. 
 


6. 노동자 주택문제의 해결과 기업복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울산 대공장 노동자들이 사회적 욕구 충족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안은 ‘주택문제’였다. 이와 더불어 노동자 가구의 생애과정에 따라 여타의 욕구가 기업복지 제도의 형태로 확대되었다. 이 또한, 울산 지역 전체 노동계급을 이질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1987년 이전 울산지역 노동자의 전형적 모습은 외부에서 이주해 온 20대의 단신 노동자였다. 1987년 이후 약 10년 동안 평균적인 현대자동차 노동자의 ‘가족의 시간’은 혼인과 첫 자녀 출산 등 가족형성기에 해당했다. 이후 2~3인 가구의 생계 부양자가 되면서 그만큼 생활안정의 욕구는 커졌고 그에 따라 노동력 재생산 비용은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1980년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수출 제조업의 고도성장이라는 ‘산업의 시간’과 맞물렸다. 민주노조운동이 대중화되는 ‘노동운동의 시간’, ‘가족의 시간’ 그리고 ‘산업의 시간’이 특정하게 만난 상황에서 울산의 1세대 노동자들은 다른 무엇보다 ‘전투적 경제주의’라는 노조운동의 지향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기업별 단체교섭을 통해 임금인상과 기업복지 확대를 일관되게 추구해 나갈 수 있었다.

노동력 재생산 영역에서 가장 큰 변화는 대기업 노동자의 주택문제가 자가 보유의 확대를 통해 해결되고 간접임금에 해당하는 기업복지가 대폭 확충된 것이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주거지원금 지원 및 사원아파트 건립과 분양을 요구했다. 회사의 자료에 의하면 1990년대 초반 20%였던 자가 보유율이 1997년에 오면 종업원의 72%가 자가를 소유하게 되었다. 1991년 10월 기준으로 현대중공업의 주택보급률은 이미 74.9%를 달성하고 있었다. 당시 현대중공업 노동자에게는 주거공간의 열악함과 협소함이 더 큰 문제였다. 노동자들은 회사에 대책을 적극적으로 요구했고, 1990년대 초반부터 기존 노동자 주거지의 대대적인 재개발, 재건축 사업을 벌였다.

저자는 울산 대공장 노동자 가족의 주택문제 해결이 자가 보유의 열망으로 응축된 것은 서구에서 나타난 공공주택이나 사회주택과 같은 대안적 주택 복지 정책이 발달하지 못한 역사적 조건이 작용한 것으로 보았다. 기업복지의 확대는 다른 현실적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조합원의 생활조건을 향상하고 노조의 기반을 다지는 데 매우 유리한 선택지였다. 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애과정을 고려할 때 자가 보유는 뚜렷한 계층 상승의 경험이었다. 자가 보유의 경험을 통해 일반 노동자는 기업별 노조의 경제적 효용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조합원 다수가 40세 이상이 되면서 자녀교육비와 의료비 혜택이 기업복지의 또 다른 주요의제로 등장했다. 저자는 대기업 조직 노동자가 ‘사적 복지국가’에 속하고 있다고 보았다. 기업복지는 기업별 노조의 조합원에게 일종의 ‘선별적 보상’을 줌으로써 노조의 집합행동 딜레마에 일정한 해결 수단을 제공하지만, 반대로 협소한 범위의 집단연대를 공고히 하고 노동계급 내부의 분절 효과를 배가시키는 것이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대공장 노조운동의 성공이 전체 노동계급의 연대에는 부정적 효과를 미친 역설적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90년대에 중심-주변노동시장, 원청-하청업체 간의 임금 격차는 공고화되었고 지역노동시장 수준에서 노동자 간 계층성은 명확해졌다.
 
 

7. 대공장 노동자의 소비규준 고도화와 중산층 지향성

 
저자는 작업장 바깥 노동자 가족의 생활방식을 중심으로 계급상황과 집단 정체성의 변화를 살펴본다. 우선 노동자들은 자기 자식이 ‘기름 묻은 옷’을 입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중산층 지향성과 전투적 집합행동의 특수한 결합은 노동조합을 사회적 무시와 신분적 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기구로 인식하게 했다.

노조 결성 이후 큰 폭의 임금 상승이 지속하면서 대기업 노동자 가족의 소비규준 고도화가 진행되었다. 이제 ‘자동차는 꼭 사야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살 수 있는 필수품’이 되었다. 그 외에 가전제품과 같은 내구소비재 보유도 1990년대 초반부터 빠르게 증가했다. 이제 고도화된 소비수준은 다시 노동자 가계의 소득과 지출을 함께 상향시키는 압력으로 작용했다.

1990년대 울산 대공장 노동자의 지배적 가족형태는 ‘남성 생계부양자 가족’으로 정착했다. 기혼 남성의 단독 생계부양자화와 기혼 여성의 전업주부화가 맞물린 과정이었다. 가구 경제의 운영에 있어서 기혼 여성의 취업을 통한 소득원 추가보다는 남성의 장시간 노동을 통한 소득 극대화가 주로 선택되었다. 가정생활의 중산층화 또는 가정중심성에 대한 강조는 노동자를 기업 내로 포섭하려는 대기업의 기업문화 전략의 중요한 일환이었다. 대표적으로 현대중공업이 노동자 투쟁이 가장 격렬했던 1990년에 직원 부인을 대상으로 현중주부대학을 개설했다. 고정화된 성별 역할 모델에 대한 강조와 남성 가장을 위한 전업주부의 내조가 주요한 교육 내용이었다. 노동계급의 생활세계를 중산층 지향적인 가정중심성이 지배하게 된 것은 기업의 전략과 ‘남성 생계부양자 가족’의 효용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8. 현대자동차의 초국적 기업화와 노조의 임금정책 변화

 
저자는 2000년 이후 현대자동차의 초국적 기업화와 경영 상황을 살펴보고 그것이 노동자 계급에 미친 영향을 고찰한다. 그리고 대규모 구조조정 이후의 임금교섭과 노조의 임금정책을 분석한다. 현대자동차는 한국 자동차산업의 구조조정과 인수합병 과정에서 기아자동차를 인수하며 내수시장을 사실상 독점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현대차 최고경영진은 경영 목표를 ‘글로벌 top 5’로 수정하고 본격적으로 글로벌 경쟁에 뛰어들었다. 2009년 현대자동차그룹은 판매 대수 기준 세계 5위로 올라서며 ‘추격의 완성’을 달성했다. 2010년대 중반에 40~50대 중년이 된 당시의 노동자들은 전 세계에 걸쳐 연간 500만 대에 육박하는 자동차를 만들고 연간 매출액이 40조 억 원이 넘는 글로벌 자동차 회사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2011년 기준 현대자동차 조합원의 월임금총액은 전문가와 관리자 직종의 임금총액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이 되었고, 자동차산업의 전체 평균과 비교해 보았을 때, 영업이익률은 2배 더 높고, 1인당 노동보수는 약 2.2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가치사슬의 위계적 속성은 하청의 지위일수록 이윤이 낮아지고 하청기업 노동자 임금을 하락시키는 동시에 원청업체의 이윤율 하락의 경향은 하청업체에서 이전된 가치로 상쇄하게 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지속적인 임금인상에 대한 현대자동차 조합원의 요구는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커져만 갔다. 가족생활의 중산층화, 소비구조의 고도화, 조합원의 고령화로 인한 가계지출의 증가 경향은 2000년대에 들어와서 임금 극대화 목표를 강화하는 기저 요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자동차의 임금정책도 변화했다. 1999년 연말 현대자동차의 최고경영자는 일정 이익금을 넘어서는 초과이익금에 대해 ‘종업원 성과배분제’를 시행할 것을 밝혔다. 2001년부터 노조는 기본급 인상 요구 이외에 성과급 요구사항으로 당기순이익의 30%를 조합원에게 정액 지급할 것을 매년 임금인상 요구안으로 공식적으로 제기해왔다. 노동조합으로서는 생계비 원리에 기반한 임금 극대화의 전통적인 제도적 수단의 효력이 한계에 달한 상황에서 대안적인 수단이 될 것이고, 사용자로서는 임금과 경영 성과의 연계를 긴밀히 하고 목표 생산량 달성을 위한 유인책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성과배분제는 두 집단 간 타협의 산물이었다.

1987년 직후 내부노동시장이 제도화되면서 만들어진 기존의 임금 평준화 정책은 외환위기 이후 급증한 사내하청 노동자의 ‘동일노동 동일임금’ 요구에 직면하여 그 딜레마를 드러내었다. 외환위기 전후 사내하청제도는 현대자동차 노사 간에 맺어진 고용안정과 생산 유연화가 교환된 담합적 거래의 산물이었다. 연공에 기초한 사업장 내 평등주의적 임금정책은 내부노동시장의 경계를 벗어난 사회적 맥락 속에서는 ‘편협한 평등주의’로 귀착될 가능성이 커졌다.

저자는 이러한 결과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로 초기업적 임금 평준화 정책의 표류를 꼽았다. 일찍이 민주노총은 출범과 동시에 임금 평준화 전략에 대한 새로운 모색을 시도했고, 초기업적 임금 평준화를 임금정책의 최우선적 목표로 제기했다. 법정 최저임금의 현실화, 산업별 최저임금 협약, 원하청 불공정거래 개선을 통한 임금격차 해소, 정규직 노동자와 중소영세 및 비정규직 노동자의 차등적 임금인상과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리의 적용을 통한 연대임금 쟁취가 구체적인 요구사항으로 등장했다. 금속노조는 산별 중앙교섭 테이블에서 기업 규모별 또는 원하청 간 임금수준의 현격한 차이를 좁히기 위해 금속산업 최저임금 제도의 신설, 동일업무 수행 비정규직의 기본급 인상 차별금지 등의 노사합의를 이루어 내기도 했다. 완성차 대기업의 이윤 일부를 산업 수준의 연대기금으로 조성하여 기업 규모 간 임금격차 확대의 부작용을 완화하려는 연대임금정책의 초보적 시도도 나타났다. 하지만 기업규모별 임금격차는 지속해 확대되었다. 한국의 경우 총연맹이나 산업별 노조가 대기업 노조의 임금교섭을 통제할 제도적 수단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결국 금속산업 노조운동 내부에서 임금정책의 통일성은 해체되었고, 초기업적 임금 평준화와 관련된 기존의 노조 임금정책은 더는 발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효력을 잃어갔다. 
 
 

9. 풍요로운 노동자의 생활세계와 정규직/비정규직의 단층선

 
‘풍요로운 노동자’는 고임금과 향상된 생활수준을 누리며 경제적 풍요 속에서 살지만, 다른 한편으로 장시간 노동과 단순 반복적 육체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노조를 중심으로 한 집단주의적 행위 성향을 강하게 견지하고 있다. 노동계급의 집단주의적 행위 성향의 목표가 개별 가족의 사회적 지위 상승을 배타적으로 추구하는 경우를 저자는 ‘도구적 집단주의’라고 부른다. 이와 비교해 집단주의적 행위 성향이 노동계급 내부의 연대와 상호부조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면 ‘연대적 집단주의’라고 이름 붙인다. 울산 대공장 노동자의 행위 성향은 도구적 집단주의 성향이 일반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러한 행위 성향이 가장 잘 드러나는 지점은 작업장에서 함께 일하는 사내하청 비정규직과의 문화적 경계긋기다. 양자 간의 단층선은 작업장 너머 울산 지역사회의 생활세계에서도 이어진다. 노동자 가계의 소비수준, 여가생활, 자녀교육, 사회적 교류 등에서 그러한 단층선은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소속 기업과 고용형태에 따른 생활수준의 격차는 이렇게 사회적 지위의 계층화로 나타나게 된다.
 
 

10. 내부의 타자, 사내하청 노동자

 
외환위기 이후 대공장 노동자의 집단 정체성 형성의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우리’와 완전히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우리’와 완전히 다르지도 않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을 ‘내부의 타자’로 구성하는 과정이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대공장 노동자의 집단 정체성이 뚜렷해졌다. 정리해고 사태를 겪으며 현대자동차 노조는 2000년에 들어와 노조활동의 최우선 목표로 자연스럽게 고용안정을 내세웠다. 노조의 고용보장 요구와 회사의 고용 유연화 전략 사이에서 타협책으로 2000년 6월 ‘완전고용보장합의’가 체결된다. 이 합의는 정규직 노조가 사내하청 노동자를 정규직 조합원의 고용안정을 위한 완충장치로 인식하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과거를 되돌아보면 1987년 전후한 시기에 두 노동자 집단은 동료의식이 강했다. 1987년 이전 현대중공업 직영 기능직과 사내하청공 집단의 경계는 유동적이었고 둘 사이의 임금 및 노동조건의 차이는 별로 크지 않았다. 이러한 동료의식은 노조 설립 이후 내부노동시장 형성을 계기로 조금씩 변화했다. 1990년도 초중반 사내하청 고용이 조금씩 도입되고 있었을 때, 정규직 노동자들은 양면적 태도를 보였다. 한편으로 위험, 기피 공정에 투입된 사내하청의 경우 묵인했지만, 그 이상의 역할이 확대되면 일자리와 임금수준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하청 투입을 반대하는 조직적 행동을 취하기도 했다. 동료 정체성은 빠르게 사라졌다.

이런 배경에서 2003년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노동조합을 설립하여 민주노총 금속연맹에 가입했다. 정규직 노조도 초창기에는 고용보장의 안전판으로 비정규직 사용을 사측과 합의했다는 ‘원죄 의식’을 갖고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조에 대한 정규직 노조의 입장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정규직 노조 집행부로서는 비정규직을 자신의 고용안정을 위한 완충장치로 여기는 정규직 노동자의 이해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12년 8월 재개된 특별 교섭에서 현대자동차 사측은 3천 명 규모의 사내하청 신규 채용안을 제출했다. 회사의 신규 채용안을 수용할지 여부를 두고 정규직 노조와 비정규직 노조 사이에서, 그리고 같은 비정규직 노조 사이에서 갈등이 표출됐다. 입장 조율의 실패로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 노조와의 협력을 사실상 중단했고, 이후부터 비정규직 노조와 회사 사이에서 일종의 ‘중재자’로 역할을 수행하기에 이르렀다.
 
 

11. 계급 연대는 왜 실패했는가?

 
기존의 대다수 연구는 대체로 원하청 노동자 간의 계급연대가 사내하청 조직화에서 결정적 요인이라는 데 동의하며, 그것의 실패 원인을 주로 원하청 노조 사이의 상호 작용과 연대 규범 형성의 실패라는 미시적 과정에서 찾으려 했다. 그러나 저자는 계급 연대의 좌절은 그것보다는 구조적, 역사적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하다는 입장이다. 

2000년대 완성차 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운동은 분절화된 기업 내부노동시장, 사내하청의 희생을 동반한 작업장 교섭, 정규직 노조가 대표권을 독점한 공장체제에서 내부 도전자로 등장했다. 내부 도전자로서 사내하청 운동은 당시 대공장 정규직 노조의 활동을 비판하며 비정규직을 희생시키는 공장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바라는 투쟁으로 발전했다. 따라서 공장체제의 기존 질서가 바뀌지 않는 한, 사내하청 노조의 권력 자원이 확대될 가능성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에 따라 원하청 노동자의 계급 연대가 실현되는 시기는 매우 짧거나 예외적일 수밖에 없었다.
 
 

12. 노동운동의 분기와 새로운 노동운동 주체의 출현

 
30년간 울산 노동운동의 궤적은 크게 보아 두 개의 세대로 구분된다. 예전 세대는 저항의 1차 사이클(1987~89년) 속에서 폭발적으로 투쟁하던 시기에 조직된 노조들이라면, 새로운 세대는 저항의 2차 사이클(1997~98년)과 그 직후의 변화된 형세, 즉 외환위기 이후 노동 양극화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조직되었다. 이들은 조직화의 시기만 다른 게 아니라 업종이나 고용형태의 측면에서도 상이하다. 1987년 이후 지역노동운동의 중심세력은 자동차, 조선의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였고, 1998년 세대 노조들은 건설업, 금속산업(사내하청), 공공행정 등의 주요 업종과 함께 3차 산업에 속하는 다양한 종류의 노조들, 그리고 다양한 업종의 비정규직 노조들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노동자 집합행동 주체의 이동 현상을 ‘노동운동의 주도세력 교체’로까지 평가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 이유로 첫째, ‘1998년 세대’ 노동운동은 조직의 장기적 생존 가능성, 즉, 노조의 유지와 활동의 지속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어려운 조건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노동계급의 조직적 재형성을 주도할 수 있을지는 확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 ‘1998년 세대’ 노동운동은 아직 집합행동의 레퍼토리 혁신을 이루어 냈다고 말하기 힘들다고 분석한다. 작업장 교섭력이 취약하기 때문에 다른 사업장의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 정당 등과의 연대와 연합이 더 많이 활성화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한 힘이 강화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셋째, 노동운동에서 과소 대표된 새로운 집단의 이해와 요구가 노조 내부 구조와 조직문화에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비정규직, 여성, 청년, 이주자 등 새롭게 등장한 집단이 노동운동 조직 내부에서 대표성을 갖추고 의사결정에 적극적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여전히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저자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향후 계급의 재형성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기업별 체계라는 조직의 분산성과 분절된 노동이라는 계급상황의 이질성이 결합된 악조건 속에서 노동운동의 새로운 주체 형성에 성공할 수 있을지에 달려 있으리라 전망한다.
 
 

13. 책 소개를 마치며

 
노동조합을 설립하면 ‘임금 극대화와 기업복지의 확대’는 노조의 기본적인 지향이 된다.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은 어쩌면 그동안 노동운동이 해왔던 전략적 선택의 결과다. 하지만 그 효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 격차는 확대되고, 노조 활동도 기업별 체계의 울타리를 벗어나기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불능력이 있는 대기업은 ‘성과급’이라는 무기를 통해 해당 기업의 노동자를 기업별 체계 내로 단단히 묶어 두려고 한다. 그리고 중소기업과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비용을 부담시킨다. ‘성과급’을 통한 대기업 노사 간의 실리주의적 담합의 결과는 노동자 단결을 위한 영역을 더욱 좁아지게 만든다.

지불능력이 있는 대기업의 노동조합은 비슷한 경로를 밟아가기 쉽다. 하지만 예정된 흐름을 바꾸고 노동자 연대의 기반을 쌓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존재한다. 2021년 현대모비스와 현대위아 비정규직 노동자는 그룹사의 기본급 차등인상의 관행을 바꾸기 위해 기본급 공동정액인상을 요구하고 쟁취해내기도 했다. 그리고 사업장 조합원의 요구뿐만 아니라 함께 사업장에서 일하는 청소, 경비, 식당 노동자의 처우개선을 임단협 교섭요구안에 담기도 했다. 물론 기업별 분업구조(원하청관계)라는 조건을 뛰어넘고 임금과 복지 불평등 해소를 위한 적극적인 시도가 여전히 필요하다. 당장 모든 과제를 해결할 순 없지만, 혁신을 위한 노동운동의 실험과 실천은 계속될 것이다. 저자는 노동계급의 집단주의라는 것이 다면성과 모순을 품고 있다고 보았다. 다면성을 가능한 한 온전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주조해 낸 구조와 환경의 힘을 밝혀내며, 그 속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장기적인 시야 속에서 찾아가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것은 이 서평을 읽고 있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넓은 시야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실천을 구체적인 현실로 만들어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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